은사 중 한 분은 1980년대 중국의 경제성장이 세계인의 이목을 끌기 시작하던 시절, “중국이 강해져야 합니다”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서양과 일본의 견제를 위해서였을까? 신해혁명(1911)을 도운 일본인 미야자키 토오텐(宮崎滔天, 1871~ 1922)은 아시아를 위해 중국이 강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일본인들은 제국주의자들이고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만들고자 한 침략자들이라 인식하는 많은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에겐 신기한 내용일 것이다.

ⓒ창비 │2008    

우리가 지금껏 알아온 동아시아는 아주 좁았다. 각 사회구성원들에게 제공된 일국중심의 역사인식은 서로 경계를 짓고 반목하게 하는 데 더 적합했다. 새로 알아가는 동아시아는 다른 것일 수 있다. ‘내가 몰랐던 나’를 상대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는 일은 집단 관계에서도 드물지 않다. 역사를 통해 서로 말 걸었을 때 우리는 ‘나’를 알고 ‘타자’를 알고 그래서 ‘더 큰 우리’를 형성하는 데 한 발 다가설 수 있다.

『동아시아를 만든 열 가지 사건』은 동아시아의 상호관계사에서 돌출한, 혹은 숨어있던 사건들을 추려, 이에 대한 한국, 중국, 타이완, 일본 네 나라 역사학계의 시각을 소개했다. 역사적 화해를 위해서다. 작년 여름부터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연재된 기사들이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아편전쟁(1840)에서 러일전쟁(1905),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을 거쳐 개혁·개방(1978~ )과 민주화 한국의 1987년 6월항쟁, 타이완의 1987년 계엄령해제 등까지 살폈고 한국 주류 논객들이 잘 다루지 않는 베트남전쟁(1960~1975)도 빠뜨리지 않았다.

저자들은 ‘동아시아를 만든 사건들’이라 말하지만, 엄밀히 본다면 근대국가를 먼저 형성한 후 이웃국가들에 대해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으로 나갔던 일본과 근대적 국민국가로의 전환을 위해 몸부림쳤던 한국, 중국, 타이완 사회의 대응 속에서 일어난 관계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일단, 일본의 침략적 얼굴에 대해 반성적이다.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1878~ 1933)가 3·1운동 후 “오늘날의 일본에는 침략의 일본과 평화의 일본, 이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129면)라고 한 것은 일본인들은 물론 다른 아시아인들에게도 일본 속의 평화, 평화의 일본을 키워가야 할 필요성을 인식시켜준다. 타이완과 중국의 관계를 이데올로기적 대립관계로만 여기던 사람들에게 여러 개의 타이완 본성인(本省人)과 외성인(外省人) 1의 존재와 이들이 형성하고 있는 여러 층의 역사인식에 대한 서술은 동아시아가 얼마나 복잡한 세계인지를 깨닫게 한다.

관계망으로서의 동아시아 역사의 발굴을 위한 노력은 새로운 전망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이 책의 전체 구성에서 빠진 부분이 있다. 북한은 두어 줄의 언급 말고는 거의 배제되어 있다. 현재 일본과 북한,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냉기가 감돌고 있다. 정치적 이유로 남한의 새 정부가 대북정책을 바꾼 것은 그렇다 치고, 일본이 북한에 대해 강경책을 지속하는 것은 식민지배와 그 유산에 대한 인식결여 때문일 것이다. 북한을 따돌린 동아시아 논의가 얼마나 실질적 의미를 가질까.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이 점이 궁금했다. 단순한 지식만으론 안 된다. 한국전쟁이 일본에 “전후부흥의 기폭제가 된 전쟁 ‘특수’를 가져다 준 사건”(249면)으로 인식되는 것은 ‘따로 노는 동아시아’를 보여준다.

또한 러시아는 동아시아 외부의 행위자로만 비친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는 유럽 열강의 일원으로만 다루어지고 이에 대응하는 아시아 세력으로서 일본의 승리를 부각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그 면적의 가장 큰 부분이 아시아에 속해 있으며, 영토문제를 둘러싸고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갈등관계에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북한과 러시아의 관점이 누락되어 있는 것은 현실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아쉬운 점이다.

이 책은 『동아시아를 만든 사건』이라고 제목을 달고 있어 동아시아라는 단위의 형성이 이미 완료된 것처럼 말한다. 살짝 성급해 보인다. 동아시아는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져 가는 중이다. 그것은 유럽통합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정치경제적 통합체를 지향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아직까지는 교류와 화해, 연대의 공동체라는 밑그림 위에 어렴풋이 떠올라 있는 담론적 구성물이다. 역사는 오랫동안 동아시아인들을 갈등케 하고 대립케 해왔다. 만약 역사를 비교하여 살핌으로써 관계망으로서의 동아시아를 발견하고 비전으로서의 동아시아를 만들어갈 수 있다면, 이는 역사를 위해서나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를 희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나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주)

1      본성인은 타이완 원주민을, 외성인은 전후 이주해온 대륙출신자.

韓貞淑 1957년 경북 문경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최근 저서로 『역사용어 바로쓰기』,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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