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반가운 책을 만났다. 민족적 자부심과 과거에 대한 상상이 가득한 역사물의 범람 속에서 쓰라린 우리 역사를 발굴한 이 심각한 글을 만난 것은 흐뭇한 일이다. 소설에는 작가가 1년간 옌볜(延邊)에 거주하며 그 사투리와 풍물을 기록한 굵은 땀과 수년간의 고민이 배어 있다.

미국 빈민가의 흑인 청소년들끼리 일상적으로 서로 총질하는 것과 쿠데타로 압제 정권을 무너뜨린 뒤 동지들이 서로를 죽이는 기막힌 이야기를 그린 영화들 <보이즈 앤 후드Boyz N The Hood>(1991)와 <파워 플레이Power Play>(1978)이 있다. 이 소설은 그보다 더 기막힌 사건, 즉 1930년대 초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던 만주 동남부의 공산투쟁가들끼리 서로를 죽였던 민생단(民生團)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그때 유격구(遊擊區)의 중국인 공산당 지도자들은 조선인 민족주의자와 민생단(유격대 속에 침투했다는 가공의 일본 간첩단)을 모두 동일시, 500명 이상의 조선인들을 처형해, 이 지역 항일 역량의 자멸을 초래했다. 소설은 혁명을 꿈꾸었던 롱징(龍井)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에 있는 도시 출신의 네 중학생과, 그 친우인 한 여인, 그리고 이곳에 부임하여 이들과 운명적으로 얽혀버린 청년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배신, 기구한 종말을 그렸다.

사건의 긴장감과 만주 골짜기의 묘사 등 소설 전체에 넘치는 에너지가 책을 중도에 접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좌절에 대한 묘사는 뛰어나다. 루 쉰(魯迅, 1881~1936)이 젊은 시절 상실감으로 시골의 폐가에 누워 벌레 먹은 뽕잎 사이로 하늘을 언뜻 보면서 세월을 보내듯, 사경을 헤매는 주인공이 창호지 중간의 엉성한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장면은 압권이다. 그리고 항일운동에 관한 기존의 이항대립(일본 측과 그에 맞서는 영웅적인 항일투사) 스타일을 탈피, 조선인 이외에도, 중국인 공산주의자, 블라디보스톡에서 유년을 보낸 여인, 일본 관동군 장교, 전향 일본지식인인 만철남만주철도회사의 약어 직원, 만주를 달리는 철도 등을 등장시켜 일본 제국주의의 복잡하고 광활한 면(시야를 조선, 만주, 러시아로 확장)을 그리는 매력이 있다. 마치 근래 발견한 한설야(韓雪野, 1900~1963)의 『대륙』(1939)1을 읽는 것 같은 재미가 있다. 광대한 지역에 걸쳤던 일본 제국주의는 전래의 지역적, 사회적 장벽을 흔든 일종의 국제화 현상을 초래했는데, 그 백미는 1930년대 초 만주의 등장이다. 만주는 조선, 일본에서 100만 명 이상을 흡인한 동양의 엘도라도(El Dorado)2가 되었다. 초특급열차 노조미(のぞみ)와 히카리(ひかり)는 부산에서 만주로, 『벽공무한』(1940)과 『농군』(1939)을 쓴 이효석(李孝石, 1907~1942)과 이태준(李泰俊, 1904 ~ ?)을 태우고 탄환처럼 달렸다. 민생단 사건은 일본의 이 거룩한 제국사업에 원시적인 무기로 저항한 투사들 사이에서 일어난 살육이다.

소설의 근원적인 질문은 민족과 사회주의 이념 간의 갈등인 듯한데, 그것은 중요한 고민이다. 민생단 사건 혹은 만주 한중(韓中) 문제의 근원은 일본이 만든 한중 간 갈등의 틀에 있었다. 1920년대 일본의 만주 침략은 조선인을 통한 삼투적 팽창의 면이 있었고, 그 결과 양측 간에는 완바오산(萬寶山) 사건(1931)3 등 유혈분쟁이 있었다. 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외치는 사회주의 이념은 사해동포주의적인(혹은 국제적인) 성격이어서 그 앞에서 민족문제는 늘 억제되었다. 그러나 후자는 전자보다 더 질기고, 파괴적일 수 있는 정체성이다. 자국 내 다양한 민족들에 대한 중국 공산주의의 국제성은 그렇게 순수하지 않다. 티베트, 몽골, 위구르 등의 민족집단들과 제휴했던 중국의 마지막 제정 청조(淸朝, 1636~1912)와 비교할 때, 20세기 중국의 정권―공화정이든 공산정부이든―지도자들은 한족중심주의에 물든 사람들이었다. 이념적으로 환치시키면, 소설은 조선 민족주의에 대한 (국제성을 천명하는) 중국 공산주의(그러나 내용상 중국 민족주의)의 공격이라는 이념적 갈등에 끼인 조선인 혁명가들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 아이디어와 극적 구성, 문학적 서술에서 성공, 이 분야의 고전이 될 것으로 본다.

그런데 몇 가지가 치밀성을 다소 떨어뜨린다. 첫째, 만철 내부의 좌익 검거 시기 등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있고, 일부 논문 투가 글의 흐름을 방해한다. 둘째, 어중간한 주인공들의 존재이다. 공고를 졸업한 21세의 통영 출신 철도회사 기사인 주인공은 작가의 투영인지 온종일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와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를 읊조리는 문학도 같고, 이화여전 출신의 첫 연인은 피아니스트로, 온통 러시아풍의 이국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그의 롱징 잔류 동기도 부족하다. 좌절은 어둠처럼 깊지만, 정작 이념에 대한 이 문학도의 지적 고민은 최인훈의 『광장』(1960)의 명준만큼 깊지 않다. 또한 뒷부분에서 그가 관동군 장교를 납치, 일본군의 추격을 물리치는 장면은 숫제 만주웨스턴의 장면(독립군 주인공이 일본군 전부를 섬멸시키는)이다. 무엇보다, 파월병사 출신 황석영의 소설 「몰개월의 새」(1976)가 전달하던 이역의 밀도 같은 것이 약하다. 그것은 유격대 생활을 겪지 않은 작가의 원천적 한계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항일, 옌볜 등 민족의 관념에 매여 있으므로 영화 <색/계(色/戒)>(2007)처럼 지배자와 저항자 사이의 미묘한 관계의 복잡성(혹은 압제와 저항 사이의 넓은 현실)과 같은 제국주의에 관한 새로운 고민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드물게 보는, 만주의 산하만큼 웅혼한 서사시임에는 분명하다.

주)

1       조선인 주인공들을 배제한 채 중국인과 양심적인 일본인의 시각에서 새 만주대륙의 건설과 민족의 화합을 그림.

2      16세기 에스파냐 사람들이 남아메리카 아마존강가에 있다고 상상한 황금의 나라.

3      1931년 7월에 중국 지린성(吉林省) 완바오산 부근에서 관개 수로 때문에 한국과 중국 농민 사이에 일어난 분쟁 사건.

韓錫政 1953년 마산생. 동아대 사회과학대학장. 저서로 『만주국 건국의 재해석』, 『만주, 동아시아 융합의 공간』 등. sjhan@d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