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이 몸을 던져 촉구한 것은 메이지의 맹목(盲目)으로부터 동양평화로의 개안(開眼)이다. “이는 종래의 외국에서 써오던 수법을 흉내 내고 있는 것으로 약한 나라를 병탄하는 수법이다. (일본은) 아직 다른 강한 나라가 하지 않은 것을 해야 한다.” 법정에서 안중근이 검사에게 던진 말이다. 훗날 일본이 서양 패도의 주구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쑨 원의 호소를 떠올리게 한다. 중화를 대신하여 서구를 새로운 주인으로 섬기고 있음을 꾸짖는 대목에서는 전후의 타케우치 요시미(竹內好, 1910~1977)가 연상되기도 한다. 타케우치는 일본 근대가 주체성 없는 노예정신의 발현이었다며 통탄했던 것이다. 일본민중의 관점에서 이토오를 비판한 점도 경청할 만하다. 메이지일본의 발흥은 자유민권운동의 뼈아픈 좌절을 밟고 일어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민권론을 방기한 군국의 폭주는 결국 동아시아에 ‘불’을 지르고야 말았다.

안중근의 ‘동양’ 프로젝트

안중근이 동양을 고수하면서도 개화파와 다른 길을 걸었음은 퍽 흥미로운 지점이다. 근대에 짓눌려 친일의 독배를 들이킨 문약(文弱)한 지식인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개화파의 젖줄이 일본유학에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도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톡을 전전했던 그의 망명생활은 눈에 띈다. 이 행로의 차이가 사상의 날카로운 차이를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안중근은 사회주의나 아나키즘과도 팽팽한 긴장을 유지했다. 인터내셔널국제공산주의운동을 말함의 드높은 이상 속에 민족의 현실을 업신여기는 편향 또한 허다했던 것이다. 1차 러시아혁명의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극동에서 체류하는 중에도 그의 안광은 모스크바가 아니라 조선과 동양을 향해 있었다.

이처럼 안중근에게 동양은 개화와 척사의 극한대립을 지양하고 이국선망의 정치적 판타지에도 물들지 않은 역동적 균형의 거처였다. 유학(儒學) 공부와 심신수련으로 단련된 자존의 기개가 근대성에 마멸되지 않은 야성의 보루였다면, 카톨릭에 입문하여 흡수한 사해동포주의는 협애한 국수주의에 매몰하지 않도록 절묘한 균형추가 되어 주었다. 이 아스라한 중도(中道)의 암중모색 끝에 독보적인 「동양평화론」이 탄생한 것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 구상이 값진 것은 그 꼼꼼한 구체성에도 있다. 공허한 추상담론에 머무르지 않고 자주독립과 동양평화가 공존할 수 있는 실천적 청사진들을 두루 제시한 것이다. 그는 동양 3국의 공동은행 창설과 공동화폐 발행을 제안한다. 일본의 대륙진출이 재정문제에서 비롯한 것임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문제를 지역의 공안으로 접수하고 동아시아 단위의 금융체계를 설계코자 한 선견지명이 걸출하다.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여 3국 공동 군대를 편성하고 2개국어 이상의 언어를 가르치자는 발상도 신선하다. 나아가 동북아에 한정하지 않고 타일랜드, 버어마 등 동남아시아 국가를 아울러 인도까지 가 닿는 담대한 범아시아연대를 제안한다. 자그마치 100년 전에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마른 반서구주의로 떨어지지 않았던 점은 더욱 소중하다. 여느 아시아주의의 조바심과는 사뭇 다른 국제주의자로서의 유연함과 대범함은 발군이다. 안중근은 늘 국제법과 국제기구, 국제회의를 중시했다. 근대세계의 지평 안에서 동양평화를 궁구한 것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이 사려 깊음은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는 그의 유명한 독서열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안중근이 구상한 ‘동양평화론’의 전모를 알 길이 없다. 그의 죽음으로 「동양평화론」은 미완인 채 남았다. 그로부터 35년 후, 제국일본은 총체적 파산을 맞이한다. 개안을 거부한 맹목의 대가는 무서운 것이었다. 동아시아의 자해적 분쟁과 갈등으로 2천만 아시아 민중이 희생한 뒤였다.

억압된 안중근의 소망은 20세기의 무의식이 되었다. 1910년 그가 처형당한 이후, 우리는 그의 무의식이 역사의 지층을 뚫고 분출하는 장면을 간헐적으로 목도해 왔다.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이 일어났다. 메이지의 입헌군주제를 대신하여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가 들어선 것이다. 그 기운은 조선의 3·1운동(1919)과 대륙의 5·4운동(1919)으로 이어졌다. 인도에서는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의 스와라지(Swaraj)운동 간디가 이끈 비폭력 독립투쟁이 동북아시아와 화음을 이루었다. 메이지일본이 결락한 자유민권운동이 범아시아 단위에서 실현된 것이다. 아시아의 도전과 저항에 쇼와(昭和, 1926~1986)일본은 대동아(大東亞)로 응답했다. 파시즘의 진군 속에 영미를 구축(驅逐)하고 신질서를 건설하겠다는 망상에 떨어진 것이다. 그 아비규환의 끝에서 평화헌법이 제정(1948)되고, 이듬해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1949)한다. 1955년 반둥(Bandung)인도네시아 소재에서는 대륙 간 대화의 서막이 오르고 1968년에는 피억압주체의 전지구적 대합창을, 그로부터 40년 후에는 검은 피부의 혼혈인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미국의 개과천선(改過遷善)도 목격하게 된다. 바야흐로 후천(後天) 세상의 개벽이 다가오는 중일까.

근대 너머의 평화로

목하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의 파고는 자본주의의 태평성대가 안녕을 고하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그 격렬했던 근대가 황혼기에 접어든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천사는 인류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갈림길의 저 편에 무엇이 있을지 우리는 여전히 아는 바가 없다. 패장이 사라진 시대, 군웅이 할거하는 글로벌 전국시대의 암흑기로 들어설지도 모르겠다. 하여 지금 다시 「동양평화론」을 꺼내 읽는 심정은 간절하고 곡진하다.

「동양평화론」은 1979년 일본의 서고에서 발견되었다. 이 해는 이토오의 분신 박정희(朴正熙, 1917~1979)가 죽은 해이기도 하거니와 두 거물의 죽음 끝에 안중근은 복권된 것이다. 돌아보면 안중근은 20세기 초 동아시아의 공론장을 휩쓴 유력한 기호였다. 박은식(朴殷植, 1859~ 1925)이 1914년 상하이에서 『안중근전』을 집필한 것은 중국인의 뜨거운 관심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중국현대연극의 선구자 임천지는 안중근을 소재로 공연을 만든다. 저우 언라이(周恩來, 1898~1976)와 그의 부인 덩 잉차오(鄧穎超, 1904~1992)는 5·4 운동 시기 안중근 소재의 연극에 출연한 청년배우이기도 했다. ‘안중근신드롬’은 대륙에 그치지 않았다. 안중근 전기는 1920년대에 이미 몽골어와 베트남어로도 번역되었다. 일본에서도 안중근은 비전(非戰)론을 비등하게 만든 기폭제가 되었다. 조선은 물론 말할 것도 없겠다. 상하이에 거점을 둔 초기 영화인들도 첫 작품 소재로 안중근을 택했다. 연극, 영화, 소설, 전기 등 대중문화 속에서 안중근은 끊임없이 호명되고 소비되는 ‘한류스타’였던 것이다.

따라서 안중근을 민족이라는 협소한 울타리로 끌어안으려는 변방적 경직성을 털어내고 식민과 분단의 가난한 조건에 말미암은 소아병적 태도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안중근의 큰 사상을 동해와 황해로 방류하는 대범함을 발휘하자. 도처에서 담금질한 단단한 동양평화의 꿈이 한반도로 되돌아와 북과 남의 화해에도 기여할 것이다. 한반도의 허리에서 발원하는 평화의 물줄기가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으로 흘러나가 근대 너머의 ‘천지창조’로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아픔을 특권화하는 자기도취는 제1의 경계대상이다. 21세기는 동아시아의 시대라는 메시아적 과대망상도 금물이긴 매한가지다. 기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도 ‘동양’의 평화론이로되, ‘동양적’ 평화론에는 미치지 못했음을 엄정히 접수해야 한다. 동양정신의 창조적 현실적용은 통 엿보이지 않는 것이다. 당대의 엄혹한 국제정세에 입각한 명민한 세력균형론에 가까웠다 하겠다. 근대성에 함몰되지 않은 사상적 기백은 돋보였으되 근대 너머를 궁구하는 근원적 혜안에는 가닿지 못한 것이다. 자본과 국가의 이중주로 전개되는 근대의 변주 안에서 영구평화의 꿈이란 한낱 모래성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안중근 사후의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 서른하나, 그 짧은 생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는 동아시아의 평화체제 구축과 함께 ‘동아시아다운’ 평화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모색할 때이다. 그것이 한 세기 전 미완성의 ‘동양평화론’을 온전히 계승하는 참된 태도일 것이다.

물론 동아시아다운 평화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또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인지 확언할 수는 없다. 다만 근대의 맹목과 격투하며 획득한 지난 세기 저항의 경험과, 근대가 도래하기 전에 존재했던 비근대적 삶과 사유의 창조적 융합 속에서 근대 너머의 천하(天下)를 전망할 수 있지 않을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안중근의 시대와는 달리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얼빈의 잘못된 만남과도 같은 극단적 대립이 아직은 덜하다는 점이다. 소련에 이은 미국의 뒷걸음질로 동아시아의 운신 폭이 더 넓어진 것도 흔치않은 기회다. 이 모처럼의 그러나 위태로운 상생과 공존의 기운을 한껏 북돋아 신세계의 평화원리를 탐구하는 동아시아인들의 집합적 슬기가 간절하다. 이 글이 미완인 것 또한 동아시아인들의 폭넓은 참여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다음 문장의 주어는, 바로 여러분이 되어야 한다.

李炳翰 1978년 경남 거제생. 세교연구소 연구원. 최근 쓴 글로 「청년의 귀환」, 「탈민족적 수사학을 넘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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