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 또 그런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했다. 불황과 미니스커트가 관계가 있다는 둥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인간이란 존재의 복잡함을 단순화하기를 즐기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단순한 공식을 만들고 기계적으로 적용하면서 예측도 쉽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미니스커트와 불황과의 관계만 보더라도 우리는 10년 전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명확하게 확인했다. 1998년 외환위기로 불어 닥친 경제한파 때 미니스커트의 유행은 없었다. 미니스커트의 유행은 바로 그 전 시기였다. 1990년대 초중반 신세대 바람이 불면서 청소년들은 이른바 똥꼬치마라고 불리는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다. 게다가 색도 형광색처럼 과감하기 이를 데 없는 것들도 많았다.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긍정하고 이를 도발적으로 발산하고 싶었던 당시 신세대 문화는 어른들이 기막혀 하는 패션들을 골라가면서 선택했다. 너덜너덜 찢은 청바지, 바지가랑이 하나에 몸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것을 골반에 걸쳐 입어 거리를 청소하듯 쓸고 다니는 힙합바지, 그리고 아슬아슬한 똥꼬치마 등이 그것이었다.

1997년 경제가 급격히 어려워지면서, 10대들의 댄스뮤직이 크게 위축됨과 동시에 힙합바지와 똥꼬치마, 형광색의 유행이 급격히 사라졌다. 화려한 것, 일탈적 감각, 다양한 욕망을 인정하면서 기성세대와 각을 세우는 태도가 위축된 것이다. 구세대에 대한 저항과 변화의 촉구도 배가 부르고 미래에 대해 자신감이 있을 때에 나오는 것인데, 경제가 급격히 위축되니 이를 계속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대신 세대화합적이고 보수적이며 검소한 분위기가 지배했다. 1998년 여름은, (여름으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회색과 검정 등 무채색이 유행했다. 하지만 이것이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관리체제 종료 이후 지표상 나아진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은 카드대란에 빠졌지만, 계속 무채색과 단정한 보수적 감각이 유행한 것은 아니었다. 색깔은 다시 발랄함으로 돌아왔다.

불황기의 대중들의 심리상태는 결코 동일하고 일률적이지 않다. 호황의 끝에 온 불황인지, 늘 힘들고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결국 불황의 늪으로 빠졌는지, 혹은 불황의 시작인지, 지루한 불황의 한복판인지, 극복 시기인지에 따라 대중의 마음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대중예술이 10년 전 그것과 결코 같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대중예술에서 경제한파 현상이 본격화되기 전에, 조짐이 먼저 느껴진다. 10년 전에도 1997년 초 기아자동차와 진로그룹 등이 무너질 즈음부터 5년을 승승장구하던 신세대 감각의 댄스뮤직이 견딜 수 없이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영화에서도 로맨틱 코미디가 사라지고 <접속> 같은 차분한 감각의 새로운 영화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 의미를 알기가 힘들다. 지나야만 안다.

2007년 초의 TV드라마도 심상치 않았다. <쩐의 전쟁>(SBS, 2007)의 폭발적 인기에서 이미 경제한파의 조짐은 피어오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참여정부 시절 지표상의 경제가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진행되어온 양극화는 심화되어 가는 중이었고, 2007년에 이르러 이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잘 나가던 서울대 출신 증권맨 금나라박신양 분는 아버지의 카드빚으로 집안과 연애가 풍비박산 나자, 노숙자 생활로부터 시작하여 사채업자로 거듭나 이전투구(泥田鬪狗) 자기의 이익을 위해 비열하게 다툼를 거듭했다. 그야말로 전쟁이나 다름없는 이 징글징글한 상황은, 순식간에 시청자의 눈을 휘어잡았다.

      영화<접속>의 포스터                       드라마<이산>                       

하지만 2007년 후반 TV드라마는 선거에 임박하여 ‘정치의 계절’을 보여주었다. 1990년대 이후 선거철마다 그랬듯이 사극이 떴다. 2007년 사극의 최고 인기 캐릭터는 정조였으며, 이 정조 붐은 실패한 개혁에 대한 아쉬움과 실사구시의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마음이 함께 녹아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에 대한 강한 관심은 광우병 파동과 관련한 촛불정국(2008.6)까지 이어졌다. 퓨전사극의 주인공들은, 마치 촛불집회의 참가자들처럼, 낮에는 어벙한 소시민으로 살아가지만 밤에는 의적이 되어 썩어빠진 나라와 양반들을 향해 칼을 날렸다.

하지만 2008년 가을이 되면서 새로운 흐름이 포착되었다. 가장 인기 있었던 두 편의 드라마 <타짜>(SBS, 2008)와 <에덴의 동쪽>(MBC, 2008)을 보자면 〈쩐의 전쟁〉을 잇는 작품들이었다.

2007년 <쩐의 전쟁>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코미디의 인기는 유지되었다. 나이도 어리고 별로 꿈도 없는 청소년들의 코믹한 신데렐라 이야기가 윤은혜를 내세워 인기를 모으면서, ‘백수’와 ‘백조’‘ 여자 백수건달’이라는 의미의 드라마들이 줄을 이었다. <메리대구 공방전>(MBC, 2008), <얼렁뚱땅 흥신소>(KBS2, 2007), <꽃 찾으러 왔단다〉(KBS2, 2007) 등 일련의 작품들은 번듯하게 내세울 만한 직업도 없고 그렇다고 그 상태를 벗어날 출구도 없는 청년들이 벌이는 우울한 코미디로 마니아들의 관심을 모았다. 외환위기(1997) 이후 10년이 다 되어가도록 서민들의 경제상황은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이제 희망은 버리고 ‘허접한’ 방식으로 사는 것이 만성화되기에 이르렀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서 한 발만 더 내려딛으면 그것은 생존을 위한 이전투구가 되는 것이었다. <쩐의 전쟁>은 카드대란을 시청자들에게 상기시키는 한편, 이 고통이 결코 지난 일이 아님을 분명히 느끼게 해주었다. 오히려 경제적 궁핍이 오랫동안 계속되자 웃음으로 눙치고 견뎌보려 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까지 와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그런데 2008년의 경제위기는 우울한 웃음조차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타짜>와 <에덴의 동쪽>은 더 이상 내몰릴 데 없는 상태에 이른 주인공을 보여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말종 같은 사채업자 금나라의 뒤를 이어, <타짜>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극악한 직업 도박꾼 고니장혁 분를, <에덴의 동쪽>에서는 어둠 속에서 주먹질로 살아가는 조직원 이동철송승헌 분을 주인공을 설정하였다. 그야말로 합법적 영역의 바깥에서 주먹과 속임수, 야합 등으로 돈과 힘을 축적하고 소비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세상은 오로지 남을 죽이고 짓밟아야만 생존이 가능한 험악한 곳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돈과 힘의 논리만이 세상을 지배한다.

조폭 같은 불법 영역의 인물들을 한두 해 보아왔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래시계>(1995)의 박태수최민수 분와 백재희이정재 분는 청소년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멋있었고, <가문의 영광>(2002)에 나온 조폭은 코믹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2008년 TV드라마의 어둠의 자식들의 상황은 끔찍하다. 예쁜 얼굴에 상처를 낸 송승헌은 여전히 <에덴의 동쪽>을 보게 만드는 큰 이유 중 하나임이 분명하지만, 주먹패 이동철과 타짜 고니의 살아남으려는 이전투구는 그 끔찍함과 고통이 TV드라마가 허용하는 한계치에 도달해 있다.

 

이들 주인공이 살아가는 목표가 오로지 생존과 복수뿐이라는 것 역시 암울하다. 이들의 목표는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거대한 꿈은 물론 아니거니와 신분상승 혹은 사회적 성공도 아니다. 설사 단기적으로 이러한 설정이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작품 전체 틀에서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죽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며 남을 죽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싸우는 것일 뿐 야망도 없다. 이들의 남다른 재주는 복수를 위해 소모된다. 따라서 이들의 삶의 궤적은 해결이 아니라 자기 파괴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10년 전 경제위기 때와는 매우 달라진 지점이며, 희망이 상실되었다는 점에서 10년 전보다 훨씬 더 우울한 징후이다.

그래서 이들 주인공은 끊임없이 분노하고 울부짖고 피눈물을 흘리며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그 눈물에 화답해 주지 않는다. 이미 눈물로 인정과 사랑에 호소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생산적이지 않은 감정의 상태만 그저 높아져 있을 뿐이다.

달리 생각하면, 이것이 마지막 희망의 조짐일 수도 있다. 눈물 흘리고 울부짖는다는 것은 이 상황을 충격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상태가 계속되어 일상이 된다면 작품의 질감은 더 냉랭해질 수도 있다. 사람이 계속 울부짖으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절망이 밑으로 가라앉아 차분해지면, ‘묻지마 범죄’가 횡행하는 스릴러의 세계로 들어설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끔찍한 상상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李英美 1961년 서울생. 대중예술평론가, 연극평론가. 최근 저서로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광화문 연가』 등. ymlee02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