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여름가을겨울의 새 앨범 <아름답다, 아름다워>(2008)를 들었다. 2008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평범한 40대 후반 남성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평범한’ 남성이라니? 스스로 아웃사이더 봄여름가을겨울, <아웃사이더>(1992)를 자처하며 다른 사람에게 휩쓸려가기를 거부하던 젊은이들 봄여름가을겨울, <어떤 이의 꿈>(1989)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험한 세상, 정글 같은 세상”에서 “바람처럼 자유롭고” 싶었던 욕망을 모두 포기한 채 그저 자신이 지켜야 할 가족을 “존재의 이유”로 삼는 소시민 봄여름가을겨울, <남자의 노래>(2008)이 과연 그리도 아름다운 존재일까? 2002년 7집에서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치던 이들이 기껏 6년 만에 <인생 뭐 있어?>(2008), <슬퍼도 울지 않을 거야>(2008)를 되뇌는 모습을 보며 지난 20년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그들의 변화는 그저 자연스러운 성장의 한 부분인 것일까?

1990년대 말 어느 날 아버지의 처진 어깨를 바라보며 눈물짓던 때가 기억난다. 산업화의 험난한 여정을 맨몸으로 헤쳐 오며 자신의 전부를 내던져 가족을 지켜왔던 아버지. 그러나 그가 만들어냈던 사회의 냉혹한 논리는 자신의 창조자에게조차 아무런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우리 사회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쓸쓸하게 퇴장하는 아버지를 보고 우리는 스스로의 미래를 예감하며 불안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너무 빨리 절망을 배워버린 세대. 그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너도나도 이른바 자기개발서를 손에 들었고 무책임한 사회에서 최소한의 안전판을 마련하기 위해 부동산을, 그리고 펀드를 시대의 트렌드로 만들었다. 그 알량한 몇 푼의 돈 속에서 우리는 불안한 세상의 격류를 헤쳐갈 한 가닥 가느다란 밧줄을 구하고자 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기실 불안이란 현대인의 삶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의 안온한 품에서 뿌리 뽑힌 채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흐름에 혼자 몸으로 맞서야 했던 현대인은 공동체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자유의 대가로 불안이라는 불치병을 가지게 되었다. 그 두려움을 떨쳐버리고자 만들어낸 것이 바로 가족. 사랑의 공동체라는 이데올로기로 포장되어 있는 이 작은 집단 속에서 현대인은 산업사회의 냉혹한 이빨에 견뎌낼 수 있는 튼튼한 벽돌집을 꿈꿨다. 아버지란 존재는 그 집의 입구에 버티고 서 외부의 압력을 막아주는 듬직한 파수꾼이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는 버팀목이었던 아버지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넓어 보이던 그의 어깨는 송곳바람으로 밀려드는 경제한파를 막아주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강인해 보였던 근육 역시 비인간적인 괴물 앞에서는 마른 수수깡만큼이나 연약한 것이었다.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아버지 뒤에서 우리는 극복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간직한 채 세상과 대면해야 했다. 외환위기의 충격이 어느 정도 완화된 후에도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의 냉소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 그 상처의 후유증 때문이었으리라. <살인의 추억>(2003)이 상징하는 불가해한 현실, 기껏해야 <괴물>(2006)이라는 추상적 형태로밖에 표현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우리 모두는 너무나 무력했으므로.

2000년대 이후의 문화계에서 복고가 힘을 발휘했던 데는 좋았던 옛 시절, 성실하게 사는 것만으로 합리적 예측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영화로 성공하여 뮤지컬로도 제작된 <라디오 스타>(2006)가 자본주의적 관계가 지배하기 이전 세계에 대한 향수를 담은 것이라면, 2004년 초연 후 다시 찾아온 뮤지컬 <맘마미아>는 그 시절의 낭만과 쾌활함을 되살리고 싶은 욕망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잃어버린 시절을 회고하는 과정에서 때로 우리는 판타지를 꿈꾸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각광받았던 사극이 주요 매개체였다. <허준>(MBC, 1999)과 <대장금>(MBC, 2003) 등의 휴먼드라마에서 상처를 어루만질 부드러운 손길을 찾는 한편 <태왕사신기>(MBC, 2007)에서 정점에 이른 영웅드라마에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환상으로나마 넘어보는 대리만족을 경험했다. 흥미로운 것은 〈베토벤 바이러스〉(MBC, 2008)의 강마에김명민 분처럼 그들 드라마의 주인공 모두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상처를 지니고 있는 존재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미국발 금융위기가 촉발시킨 충격과 공포는 이 알량한 자위의 행위조차 한 순간에 헛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지난 10년 동안의 애처로운 노력이 갑자기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반토막이 나버린 펀드 잔고는 우리가 믿었던 밧줄이 그저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되살아나는 경제 분위기에 힘입어 시대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던 웰빙(well-being)이 미처 만개하기도 전에 우리는 다시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아버지조차 사라져버린 시대에 우리는 완벽히 무장해제된 채 새로운 위기를 맞이해야 한 것이다.

모든 수단이 무력해지고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져 버린 시대는 퇴행을 부추긴다. 사회적 존재를 대변하는 아버지의 허상이 밝혀졌으므로 이제 기댈 존재는 어머니밖에 없다. 사실 어머니는 산업화 과정에서도 위안이 필요할 때마다 언제나 되돌아가던 존재였다. 산업화 결과 초래된 1997년 외환위기에 아버지가 잠시 부상했던 이유는 아버지가 바로 그 산업화의 과정을 표상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세상을 향해 나섰던 아버지의 모험이 실패했음을 알고 있다. 상처입은 몸을 추스르기 위해 우리는 다시 집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그때 우리가 다시 찾을 존재는 어머니이다.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가 좀 더 원초적인 존재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대변하는 존재여서만은 아니다. 그녀는 부서져버린 대문 안 깊은 곳에서 우리를 보듬어 주던 존재이고 또 그녀에게는 세상에 나오기 이전 마지막으로 머물러 있던 곳, 그래서 우리가 존재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간다는 불가능한 꿈을 품어볼 수 있게 해 줄 통로, 즉 자궁이 있기 때문이다.

                  ⓒ오픈하우스│2008     ⓒ창비│2008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한장면

그래서 교보문고가 2008년 출판계의 키워드로 어머니를 꼽았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엄마가 해주는 소소한 위로를 담은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2008),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가족 간 갈등과 해소를 다룬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올해 인기를 끈 작품이라는 것이다.<경향신문> (2008.12.8) 그렇다면 2009년 우리 문화계에서도 가족은 좀 더 자주 등장할 것이다. 1980년대 이후의 불황기에 할리우드가 가족의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들로 위기에 대한 처방전을 썼듯이 말이다. 처진 아버지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볼 여유조차 상실해버린 우리에게 가족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상징되는 가족일 것이다.

어머니가 완전한 퇴행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아직 조금이라도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싶은 사람들은 그저 자기 안으로 웅크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웅크린 자세란 스스로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취하는 태초의 자세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희망의 싹을 발견할 수 없었을 때 우리는 늘 웅크린 채 스스로를 돌보곤 했다.

하지만 웅크렸다고 그저 겁에 질려 아무런 생각도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세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관조적이 된다. 그 속에서 인생을 반추하며 그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봄여름가을겨울의 새 앨범은 과거 아버지의 몰락을 지켜보았고 이제는 자신이 그 위치에 서게 된 40대 후반 세대가 위기에 처한 스스로를 위안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위안에서 스며 나오는 우울한 색조야 이 사회의 냉혹한 논리를 염두에 둘 때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2009년에는 자기 보호를 위한 노력과 퇴행의 욕망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두 경향이 모두 양의 차이일 뿐 동일한 방향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전투의 격렬함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을 것이다. 불안한 시대를 맞을 때면 늘 그랬듯이 우리는 이곳저곳 눈치를 보며 적극적 행동을 주저할 것이다. 불황으로 인해 문화영역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 것이라는 점이 그런 경향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세계체제론자1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은 지금이 자본주의가 최초의 진정한 위기를 맞이한 대격변의 시대라고 주장한다. 변화의 시점이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폭풍이 몰아치기 전에는 언제나 먼저 고요가 찾아오는 법이다.

주)

1      세계체제이론은 월러스틴이 1970년대에 제창한 것으로 세계를 하나의 사회체제로 파악하여 중심부와 주변부의 비대칭적(非對稱的) 발전으로 인한 교환, 이동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이론

丁俊榮 1963년 경북 영주생. 한국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최근 저서로 『텔레비전 보기-시청에서 비평으로』, 『열광하는 스포츠 은폐된 이데올로기』 등. junechung@knou.ac.kr밑바닥의 이전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