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은 호남지방을 예향(藝鄕)이라 불리게 한 장본인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8~1893)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자신의 자서전 제목인 『몽연록(夢緣錄)』(1867)1처럼 “꿈같은 인연” 속에 19세기 조선 문화계를 주유한 허련의 화업을 기리고자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은 <남종화2의 거장 소치 허련 200년展>(국립광주박물관, 2008.7.8~8.31)과 <진도가 낳은 소치 허련 탄생 200년 기념 특별기획展>(진도 운림산방,3 2008.11.8~11.23)에 이어 이번 전시를 개최하였다. 짧은 기간에 전통시대의 한 작가에 대해 여러 차례 전시를 개최하고 집중 조명을 한 것은 2006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서거 150주년을 맞이하여 국립중앙박물관, 과천문화원, 삼성미술관 리움 등이 전시를 개최한 경우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2006년을 ‘추사 김정희의 해’라고 부를 수 있었듯이, 2008년은 ‘소치 허련의 해’ 또는 ‘운림산방 화맥(雲林山房 畵脈)4의 해’라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소치이백년, 운림이만리 展>전시장 모습
국립광주박물관의 전시는 허련의 작품을 망라한 대규모 전시로서 그의 회화의 다양성과 깊이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고, 진도 운림산방의 전시는 진도, 해남 등 남도(南道)의 질박한 서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이에 비하여 서울서예박물관의 이번 전시는 앞서 개최한 두 전시에 비하여 허련 작품의 수효는 적지만 보다 정선한 작품을 소개한 정품전(精品展)의 성격이 강했다. 우리나라 전통시대 화가들 가운데 “작품을 모으는 것보다 골라내기가 더 번거로운 유일한 작가”라는 평을 듣는 허련이기에 정품을 모아 소개하는 일이 더욱 요구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동안 사진으로만 알려졌을 뿐 그 소재를 확인할 수 없었던 <일속산방도(一粟山房圖)>(1853) 등 소중한 작품이 이번 서울서예박물관 전시에 처음 소개된 점은 특기할 만하다. 허련의 기년작(記年作)작고한 해의 작품으로서 특유의 필력을 발휘한 수작들이 이러한 기회를 통해 점차 공개되고 있는 점은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위로부터 <묵매도>,<묵란도>,<매화서옥도>
서울서예박물관은 비록 유리나 아크릴로 차단하기는 했지만 관람객과 작품의 거리를 최소화하는 장점을 가진 전시공간인데 이번 전시에서도 이러한 장점을 최대한 살렸다. 병풍, 족자 등을 코앞에서 볼 수 있도록 하여, 작품들이 유리 안에 멀찍이 진열되어 거리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다른 전시들과는 관람의‘격’이 다르게 하였다. 그동안 다른 전시에서는 층마다 5, 6개씩 방이 나뉘어져 있어 리듬이 끊기고 호흡이 분산되는 느낌이 있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별, 그림의 종류별로 작품을 구분하고 배치하여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진 공간이 오히려 효율적인 느낌이었다. 특히 『호로첩(葫蘆帖)』(1868), 『천태첩(天台帖)』(1869) 등 중요 화첩을 펼쳐 모두 실견할 수 있게 한 것은 다른 전시와 비교되는 미덕이 아닐 수 없다.
<묵모란> <산수도>
지금까지 개최된 허련 관련 전시가 허련에 집중한 것에 비해 이번 <소치이백년, 운림이만리(小癡二百年, 雲林二萬里)展>은 허련의 작품과 함께 허련의 후손들인 미산 허형,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1891∼1977), 남농 허건, 임인 허림, 임전 허문, 허진 등 호남화단의 주류를 이루는 진도 양천 허씨 5대의 작품도 진열하여 호남지방 예맥의 뿌리를 확인시켜줌과 동시에 변화해가는 호남화단의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우리나라 회화사는 물론 미술사 서술 전반에서 전통시대 미술과 근대 이후의 미술을 단절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와중에 허련과 그 후손들로 이어져 내려오는 예술의 흐름은 중요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일속상반도>
이번 전시는 허련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을 넘어 전통시대의 문화적 유산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화두를 다시 한번 던져 주었다는 점에서 전향적인 의미가 있다. 남종화의 정신 운운하며 형식만 취하고 기본에 소홀하고 사제 간 또는 동문 간에 유사한 화풍을 답습하여 창의성과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혹평을 듣고 있는 호남지방의 한국화 제작 풍토를 극복하려면 철저한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통렬한 비판은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미지 제공_ 서울서예박물관
金相燁 1963년 서울생.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 최근 저서로 『조선 남종화의 마지막 불꽃 소치 허련』, 논문으로 「동아시아의 삼국지 그림」 등. happybard@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