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센 머리, 이랑처럼 골 깊은 주름이 자리 잡은 얼굴. 가뭄 타는 논처럼 갈라진 손끝, 미처 자랄 새도 없이 닳은 손톱 밑에 굳은살처럼 낀 흙, 굽은 허리와 걸음을 걷는 것도 힘이 드는 다리. 팔순 세월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할아버지 주인공 최원균의 몸은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 보인다.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몸에 바스러질 듯 까칠한 털, 엉덩이에 말라붙은 똥, 얼굴을 찌를  것처럼 길게 자란 뿔, 닳을 대로 닳은 발굽, 보통의 소들이 사는 15년 수명보다 25년을 더 살아온 소. 그 마디가 불거진 네 다리는 스스로의 몸조차 가누기 힘겨워 보이지만 할아버지가 고삐를 잡으면 소는 있는 힘을 다해 움직인다.

여와<워낭소리>의 한장면    

팔순이 넘은 할아버지의 몸도, 40년을 살아온 소도 이미 일을 하기엔 한참 지난 육신이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새벽이면 일어나 가마솥에 쇠죽을 끓이고 논둑을 기면서 풀을 베 소에게 먹인다. 할머니주인공 이삼순가 따라다니며 늘어놓는 푸념에는 눈도 꿈쩍 않지만 워낭소리에는 곤한 잠을 자다가도 번쩍 눈을 뜨는 할아버지다.

소는 아침이면 할아버지를 태우고 들로 나가 할아버지가 모는 대로 논밭을 갈고 짐을 나르며 논둑에서 할아버지가 일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봐준다. 그리고 해가 저물면 다시 할아버지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온다. 할아버지에게 소는 가장 든든한 일꾼이자 자가용이며, 친구이자 평생을 함께한 동반자다. 할아버지는 그 소와 함께 30년 넘게 농사를 지어 아홉 남매를 공부시켜 세상으로 내보냈다. 할아버지와 소는 둘이면서도 한 몸이다.

할아버지와 소, 소 때문에 고생이라고 끊임없이 푸념하는 할머니, 이젠 소리도 나오지 않는 라디오와 함석지붕의 나지막한 집.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낡거나 늙었거나 오래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는 요즘 세상에 아직도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고, 소한테 해롭다고 비료는커녕 농약도 치지 않는 할아버지. 모든 것이 교환가치로 평가되는 세상에, 그런 가치에 눈 돌리지 않고 우직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사는 할아버지는 지금의 우리를 있게 만든 모두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소꼴을 해다 놓고 학교에 가고, 학교 갔다 오면 소를 몰고 들이나 산으로 나갔던 때가 있었다. 동무들과 어울려 냇가에서 물장구도 치고 묏등에서 미끄럼도 타며 놀다보면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서산너머로 넘어가고 소는 순한 눈을 굴리며 집에 가자고 목을 뽑아 긴 울음을 울곤 했다. “딸랑, 딸랑” 워낭소리를 앞세우며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을에는 집집마다 굴뚝에서 저녁연기가 하얗게 피어오르곤 했다. 그 시절 소는 가축이 아니라 한 식구였다.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는 일꾼이자, 형과 나를 공부시켜 주는 든든한 재산이기도 했으며 가장 가까운 동무이기도 했다.

영화<워낭소리>의 주인공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소  

그때 함께 여물 먹이던 동무들은 모두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들이 그랬던 것처럼 단단한 팔과 다리로 어린 자식들을 키우고 공부시키느라 저마다의 일터에서 등이 휘게 일하고 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부박한 삶을 살지만 가슴 깊은 곳에는 화인(火印)처럼 새겨져 있는 고향과 늙으신 부모님. 세상이 변해 아버지가 살아온 삶의 터전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은 다르지만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아버지들이 살아왔던 고된 삶은 우리들에겐 지울 수 없는 기억이면서 각박한 현실을 버틸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기승전결의 뚜렷한 줄거리가 있고 배우들이 세련된 연기를 펼치는 요즘, <워낭소리>는 한 편의 시 같은 영화다. 갈등이나 반전도 없고 현란한 화면도, 화려한 배우들도 나오지 않는다. 농촌의 사계절 풍경을 담은 화면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지만 할아버지의 고된 노동과 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소의 아름다운 사랑과 믿음은 영화를 보는 내내 봄비처럼 촉촉하게 우리들의 가슴을 적신다. 묵묵히 주어진 삶을 살다 조용히 눈을 감고 흙에 묻히는 소. 할아버지도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고, 잊고 살지만 세월이 흐르면 우리들 또한 그리될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효율성이 없다고 외면해버린 가치들에 대해 다시 한번 뒤돌아보게 해주는 영화 <워낭소리>는 우리 아버지들의 삶과 우리를 키우고 공부시켰던 일하는 소에게 바치는 잔잔하지만 가슴 찡한 헌시 같은 영화다.

韓政崎 1960년 경북 오도(梧島)생. 동화작가. 작품으로 『플루토 비밀결사대』, 『남극에서 온 편지』 등. jgh601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