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60분>(KBS)에서 20대 실업자는 “저보다는 부모님이 더 힘드세요”라며 부모님 걱정에 목멘다. 실업자인 그들을 겨우 부양하든 득의양양하게 해주든 그건 다 가족의 몫이다.

“용서 못해! 복수할 거야!” _은재, <아내의 유혹>

그런데 불황을 견디는 방어막으로서 혹은 경제적 발판으로서 가족의 중요성이 강조될수록 나의 가족과 나의 가족이 아닌 것의 구분이 명확하다 못해 우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적이라는 늪에 빠질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 <너는 내 운명>의 호세 모, 양금석 분 그리고 <아내의 유혹>의 교빈 모 금보라 분는 그 갈등의 정점에서 가족중심주의를 헌신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렇다면 피해자인 은재 장서희 분는 다를까? 가장 친한 친구김서형 분와 남편의 공모로 아이를 잃고 목숨까지 잃을 뻔한 은재의 불행은 엄밀하게 법률적 영역의 사건이다. 그런데 은재는 그것을 개인적 보복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수의 칼을 간다. 은재가 잃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수의 과정에서 알 수 있듯 능력 있고 미모가 빼어난 여자가 모든 걸 포기하고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으며 키워왔던 그녀만의 가족이다. 그러기에 그녀의 복수는 정당하다 못해 당당하고 그것을 보는 시청자들은 그에 적극 공감하는 것이다.

IMF 경제위기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재론의 여지가 있지만, 이번 불황은 솔직히 무지 억울한 것이다. ‘잘 살아보자’는 대통령 뽑아놓고 이제 가속 기어를 밟을 일만 남았는데 느닷없이 아버지 같은 미국이 휘청거리다니! 그로부터 불어온 무지막지한 경제적 타격은 사람들에게 친한 친구에게 남편과 아이를 잃은 은재의 불행처럼 억울한 것이다. 겨우 견디고 살 만한데 흔드는 세상이 원망스러운 것이다. 그럴 때 어리석은 남편과 길길이 날뛰는 친구를 이리 저리 휘두르는 은재의 복수는 통쾌한 카다르시스를 지나, 불황의 전장을 뛰어넘을 용기를 주는 한판 푸닥거리와도 같을 것이다. 그것을 보며 각자 은재처럼 “할 수 있어요. 해볼게요”라며 주문을 걸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남자가 내 희망이라는 건 버린 지 오래예요”      

_은재, <아내의 유혹>

남자의 바람과 그로 인한 환란, 돈에 얽힌 적나라한 인간사야 고유한 가족드라마의 소재였다. 그런데 이제 거기에 다수의 여성들을 꽉 잡아 앉히는 양념으로 들어가는 것이 있으니 바로 여성의 성공 스토리이다.

<조강지처 클럽>에서 남편 한원수안내상 분에게 사람 취급도 못 받던 나화신 오현경 분은 이를 악물고 노력해 패션 브랜드를 이끄는 최고경영자가 되었다. <며느리와 며느님〉(SBS, 2008)의 구박 받던 며느리 이순정 문정희 분은 자신의 특기를 살려 김치회사 대표가 되었다. <아내의 유혹>의 구은재는 일, 춤, 심지어 도박까지 못하는 게 없다. 백마 탄 왕자님 역시 빠질 수 없다. 하지만 이제 이 시대의 여성들은 더 이상 그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 자립하고 성공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실천한다.

물론 그 성공이 대부분 부의 획득에 이은 사회적 성공이라는 점이 이 사회의 트렌드를 또한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 개운치는 않지만, 최소한 사랑이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수동적 인간상에서 자유로워진 점 또한 진일보한 성과일 것이다.

이혼이 더는 특별한 일이 아니고, 여성의 새로운 삶이 당연한 수순이 되는 드라마, 그리고 핏줄로 뭉친 가족이 아니라도 가족애보다 더한 정을 나눌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드라마의 변화는, 만병통치약인 가족신화가 조금씩 금이 가고 뒤틀리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그 모습에 사람들은 또 브라운관 앞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엄마라고 불러” _민여사, <아내의 유혹>

신화학자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은 문명이 발달된 후 신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때로는 종교로, 때로는 소설로, 혹은 영상매체로 자신의 불안함을 달래줄 것을 찾아 헤맨다고 말한다. 2009년 대한민국 사람들은 상당수가 그 잃어버린 신화를 드라마를 통해 충전 받고 있는 듯하다. 확고하게 자신을 지켜주었던 그 가족이라는 신화를 말이다. <아내의 유혹>에서 가족으로부터 쫓겨나고 상처받은 은재를 보듬어 주고 지원해 주는 건 또 다른 복수를 꿈꾸는 민여사정애리 분와 그녀의 양아들 이재황 분로 이루어진 가족이니, 참 질기고도 긴 인연이다.

신화란 그저 재밌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을 자극하고 변화시키는 적극적인 방식이라 한다. 그러면 현재 우리의 가족드라마는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을까? 물론 역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었겠지만, 그저 내 상처에 지레 놀라, 주저앉아 상처를 보듬고 감싸 안는 것에 급급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았으면 싶다. 짚을 이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격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말썽의 소지를 제공하는 게 또한 가족 아닌가. <너는 내 운명>에서처럼 가족에서 비롯될 수 있는 갈등이란 무궁무진하니 말이다.

李定禧 1964년 수원생. 대중문화평론가, 2008 <플랫폼>미디어비평상 수상. 최근 글로 「삶을 바라보는 서늘한 눈길에 동화되다」, 「누난 너무 이뻐」 등. 5252-j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