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디지털카메라의 발달을 보고 있자면 참으로 당혹스럽다. 값도 싸고 크기도 작은 보급형 디지털카메라(일명 똑딱이)에 초점거리 22~300㎜의 줌(zoom)렌즈가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초광각(超廣角)에서부터 망원(望遠)까지 커버하는 대단한 고성능의 렌즈인 것이다. 수치만으로 보면 말이다. 그런데 50만원 정도의 카메라에 고성능렌즈를 달았을 때는 제대로 된 성능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런 카메라를 쓰는 일반인들은 300㎜의 망원렌즈를 가지고 흔들리지 않게 찍기도, 정확히 구도를 잡아서 찍기도 어렵다. 광각 촬영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형태의 왜곡이 심한 광각렌즈는 앵글을 잘 잡아서 찍어야 흉측하지 않은 사진을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22~300이란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용적으로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이 숫자는 한낱 장식일 뿐이다. 더 쉽게 말하면 쓸모없는 장식을 달고 소비자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초점거리 300㎜의 렌즈를 가짐으로써 자신이 천리안을 가졌다는 착각을 하고 카메라는 전지전능한 신의 눈에 한 발 더 다가가게 된다. 기능하지도 않는 기능이 상품의 전면에 나서 있으니, 이는 한낱 장식일 뿐이다. 사실 오늘날의 테크놀로지를 보면 장식 역할을 하는 기능이 참 많다.
디자인의 역사를 보면 한때는 장식과 기능을 철천지 원수처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1920년대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가 “장식은 죄악이다”라고 말했을 무렵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지금, 기능이 장식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렇게 해괴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런 현상에 대해 역사, 철학, 심리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오늘날 디자인은 상품이 되어버린 사물들의 외관을 편집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저자의 말은 아니지만 필자가 정리해 보면 그렇다는 것이므로 오해없길 바란다.

원래 디자인이란 사물의 외관만이 아니라 그 속 내용과 기능까지 함께 꾸미는 일인데, 기 드보르(Guy Debord, 1931~1994)가 『스펙타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1967)에서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스펙타클(spectacle)이 되고, 상품은 자기지시적인 이미지가 되었기 때문에, 디자인도 외관에만 집착하게 된다.

르네상스 시기 일점원근법(linear perspective) 물체의 연장선이 일정한 점에서 만나는 것이 탄생한 이후 오늘날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시각, 신체와 사물의 관계 변화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이 서평에서 다 요약할 수는 없다. 다만 인터페이스(interface) 인간과 사물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하기 위해 만든 매개체라는 개념을 통해 박해천은 오늘날 디자인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위기를 진단하고 있다는 점을 파악해야 한다. 그는 요란을 떠는 현상에 대해서 일단 경계의 눈으로 바라본다. 아니면 요란과 법석의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어떤 책의 유행이 지나가야 비로소 읽기 시작한다"고 했듯이 말이다. 먼지가 가라앉은 후에 보는 문화현상들에는 거품이 빠져 있기 때문에 실체가 보이고, 비로소 담론의 칼날을 들이댈 수 있는 것이다. 한때 컴퓨터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듯 보였지만, 이제 매킨토시 컴퓨터는 매력적인 외관만을 갖게 된 것처럼 말이다.

서울시가 디자인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디자인을 화두로 정책도 디자인 중심으로 돌아가는 요즘에 이 책은 특히 더 가치가 있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 찬물을 끼얹듯 냉정한 말투로 오늘날 디자이너의 위치는 노동자에 불과하고 그가 꿈꾸었던 유토피아적인 디자인이란 아주 먼 과거의 일이었거나 먼 미래의 일, 혹은 인터페이스의 개념이 급진적으로 변한 다음에나 가능한 일이라는 비관적이지만 매우 현실적이고 준엄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 책은 다양한 담론들과 사고들로 이어지는 많은 접점들을 지닌 인터페이스 노릇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디자인의 문제가 단순한 시각의 문제만이 아니라 신체와 촉각, 권력과 심리, 역사와 경제, 기능과 의미 등의 온갖 이질적인 항들의 조합이라는 생각에 자신을 열어놓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