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28일 제주올레1 12코스 개장 행사가 있었다. 제주도의 서쪽 끝에서 서귀포와 제주시의 경계인 무릉2리를 거쳐 용수리로 이어지는 약 18㎞의 도보여행길을 정비하고, 사람들에게 공개한 자리였다. 홍보는 제주올레 홈페이지에 올린 공지사항이 전부였지만 2,500여 명의 올레꾼올레를 걷는 사람을 칭하는 말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평소에도 사람들은 삼삼오오 혹은 홀로 제주올레를 걷는다. 코스마다 매일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걸으니, 12개 코스 전체를 놓고 보면 매일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제주올레를 걷고 있는 셈이다.

제주올레는 단순하다. 사람들이 걷기 좋은 길을 찾아내, 정비하고서 함께 걷는다.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 생각해 보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시도해 봤을 것이다. 제주올레는 새로 길을 정비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그 전부터 있던 길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제주올레는 대동강 물을 판 봉이 김선달만큼 대단해 보인다. 무엇이 사람들을 제주올레에 모여들게 하고 열광하게 만드는 걸까?

제주올레를 이야기하려면 우선 (사)제주올레의 서명숙(徐明淑) 이사장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서명숙 이사장은 피말리는 마감과의 전쟁을 해야 하는 23년간의 기자생활을 마무리하면서 2006년 9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 이하 산티아고)로 36일간 도보여행을 떠났는데, 거기서 만난 한 영국 여성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처럼 스페인을 찾을 수 없다. 저마다 돌아가면 자기 나라에 까미노 산티아고 가는 길(Camino de Santiago)의 줄임말를 만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그곳에서 쉬어가고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이 대화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서명숙씨는 고향인 제주에서 사람들이 위안 받을 수 있는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2007년 2월 제1코스 개장 행사를 시작으로 평균 2개월 간격으로 코스를 개발해 2009년 현재 서귀포 지역에 11개 코스, 제주에 1개 코스를 개발한 상태이며 앞으로도 계속 코스를 개발해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도보여행길을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제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서울에서 생활했던 한 경계인이 경계 양쪽을 상생시키는 길을 찾아낸 것이다.

제주올레를 걷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제주에서 생활하는 제주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어떤 길은 어린 시절 걸었던 길이기도 하고, 매일 지나쳐 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똑같은 길을 걸으며 위안과 즐거움을 얻고 있다. 그동안 제주는 제주만의 매력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낙후된 흙길이 아스팔트가 되는 것이 좋은 것이라 생각했고, 자연 풍광보다는 골프장 같은 관광시설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국제자유도시가 되기 위해 변화해야 한다는 논지엔 현재 제주는 발전하지 못한 곳, 뒤떨어진 곳이라는 기본 전제가 있었다. 마음속에 있는 정겨운 마을, 길, 자연은 자부심의 대상이 아니라 빨리 벗어나야 할 질곡(桎梏)이었다. 이제 제주인들은 제주올레를 걸으면서 자신의 경험과 제주의 과거와 현재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새로 생긴 것이 아니다. 원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재발견한 것이고, 그동안 표현하지 못한 것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어설픈 근대화의 논리 속에 도시와 외국을 베끼기에 급급해하며 상처받았던 제주인들은 스스로를 인정하는 자기정체성과 자기긍정성을 발견한 계기를 갖게 되었다.

제주올레에서 위안을 받는 또 하나의 부류는 여성들이다. 그동안 한국의 관광문화에서 유흥은 상당히 중요했다. 이에 해외 배낭여행이 유행함에도 불구하고 국내를 여성이 혼자 여행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 쉬었다. 이제 많은 여성들이 홀로 혹은 삼삼오오 제주올레를 걷는다. 여성전용 민박집도 생겨 숙박도 안전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여성들은 ‘더 빠르게, 더 높이, 더 많이’를 외치는 스포츠보다 공원 등지를 걷는 것을 즐겨한다. 걷기 운동과 제주라는 자연 풍광이 만나면서 여성들이 선호하는 독특한 문화 현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제주올레는 많은 직장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직장인들은 매일 일터에서 강도 높은 두뇌 노동을 하는데, 자연과 자신의 몸이 만나는 제주올레는 그들에게 삶의 균형추 같은 역할을 한다. 많은 철학자들이 걸으면서 사유를 했듯이, 걷기 운동은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서명숙 이사장이 기자 생활을 정리하면서 산티아고 길을 걸었듯이,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사람들 역시 제주올레를 찾는다. 그들은 자연 앞에서 자신을 겸허히 돌아보고, 또 다른 위안과 희망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왜 사람들은 길을 걸으면서 위안을 받게 되는 걸까? 제주올레는 걷기 여행의 특성을 갖고 있지만, 특별한 명상 프로그램이나 심리치유 프로그램은 없다. 그저 바닷길, 오름작은 산을 의미하는 제주방언과 들판을 걸으며 만나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걷는 길이다. 등산과 제주올레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등산은 정상 정복이라는 목표를 위해 인내를 가지고 극복하는 과정이며, 정상을 정복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하고 누가 더 높이 올라갔느냐가 중요하다. 하지만 제주올레에는 잣대가 없다.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은 있지만 꼭 그것을 지킬 필요는 없다. 속도도 마음대로 조절하면 된다. 높고 낮음이라는 획일적인 잣대나 목표가 없다. 제주올레는 최고, 최초, 최대 등의 획일적 잣대와 경쟁에 주목하지 않는다. 높고 낮음을 떠나 오름마다 주는 각각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긴다. 제일 멋있다는 주상절리(柱狀節理) 용암이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면서 굳을 때 육각 기둥모양으로 굳어져 생긴 지형나 용머리 해안절벽이 아니더라도 제주의 많은 해안 절벽들이 자기 나름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도보여행은 자연이 갖는 다양한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다. 자연의 다양한 모습을 인정하듯, 마을은 마을마다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사람은 사람마다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다른 자연의 모습에서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듯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긍정적으로 보게 된다. 때문에 획일적인 잣대를 가지고 성공 또는 실패, 주류와 비주류로 평가받고, 올라가기 위해 혹은 내려가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제주올레를 통해서 위안 받을 수 있다.

제주올레가 보여주고 있는 가장 중요한 정신은 조화로운 공존이다. 제주올레는 자연과 사람, 보존과 개발, 과거와 미래, 관광객과 현지인, 빠름과 느림, 개성과 획일성의 경계에서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한다. 그것은 근대화, 획일적인 사회, 개발 지상주의가 만들어낸 병폐를 치유하는 자기 치유 과정이다. 조화로운 공존만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을 제주올레를 통해 자연스럽게 체감할 수 있다. 제주올레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이 시대가 요청하는 시대정신의 한 가운데 제주올레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金鐘炫 1973년 제주생. (사)제주올레 이사, (주)넥슨홀딩스 사업기획실장. lifelover@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