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

1995년 지방자치제도를 시행한 이래, 각 지역은 ‘우리 고장’, ‘우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 등과 같은 내치기 어려운 문구들로 지역 사랑을 고취시키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별로 특화한 역사, 문화 콘텐츠 개발이 활기를 띠고 있다. 인천 역시 많은 투자를 통해 국내를 넘어 동북아 허브도시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동북아 최대의 물동량을 자랑하는 바닷길 관문인 인천항을 비롯하여, 서해 도서(島嶼) 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은 인천국제공항, 그리고 이를 잇는 수많은 도로들까지, 인천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교통 인프라를 갖춘 세계적인 도시로 거듭나는 중이다.

하지만 인천이 하드웨어적 인프라만을 가지고 동북아 허브도시, 미래형 도시창조의 선두가 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문화와 문화를 잇는 허브, 미래지향적 도시창조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인천을 찾고, 즐기고, 떠나고, 그리고 다시 찾는 발길을 반복하면서 인천의 역사, 문화 콘텐츠가 완성되고 세계도시로 향하는 그 시작이 될 것이다. 인천관광공사는 『인천으로 通(통)하였느냐』를 2권 1책으로 펴냈는데, 인천도심권(1권)과 강화·옹진권(2권)으로 구분하였다.
인천에서 나고 자랐으며, 역사, 문화를 수학하고, 또한 그 부문에서 밥벌이를 해오는 사람으로서 편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그중 강화가 가진 많은 이야기 앞에서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곳이다. 책은 강화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강화만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문화 체험장, 무수한 유적들, 강화가 낳은 인물, 그밖의 다채로운 소재들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 많은 콘텐츠들을  관광에 초점을 맞춰 편집한 것이 부담스러웠다.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제작한 책은 통상적인 문어체보다는 구어체로 서술하고 있어 친숙한 느낌을 주었지만, 전체적으로 가벼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며, 관광을 유도하기 위한 책이라고 하기에도 무언가 부족하였다. 각각의 이야기 거리에 치중한 나머지, 책의 제목처럼 그 곳을 通(통)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다양한 소재를 묶어 편집한 방향에도 더 좋은 범주는 없었는지 의문스러웠다. 전체적으로 관광 안내책자와 문화유산 답사기를 섞어 놓은 듯한 어정쩡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매우 아쉬웠다.

번잡한 마음을 누르고 다시 책을 펼쳤다. 인위적으로 편집한 방법이 좋지 않을 뿐이지, 책은 강화의 아름다운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었다. 수차례 다녀온 강화도였지만, 무언가 정리된 기분으로 떠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시선이 멈춘 곳은 강화의 사찰이었다. 개인적인 신앙을 떠나서 사찰의 여유로움과 선(禪)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 여기에 그 사찰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까지 더한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이겠다고 생각하며 길을 나섰다.

먼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 491) 때 천축조사(天竺祖師)가 세웠다는 고려산(高麗山)의 절들을 가보기로 하였다. 이곳의 절들은 천축조사가 산의 정상에 올라 오색(五色) 황색, 청색, 백색, 적색, 흑색의 연꽃을 발견하고는 각각의 연잎을 바람에 날려 연잎이 내려앉은 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설화의 내용처럼 다섯 절들이 모두 전해지지는 않고, 백련사(白蓮寺)와 청련사(靑蓮寺) 그리고 적석사(積石寺) 본래 이름은 적련사(赤蓮寺)가 남아있다. 대부분의 절들이 산수(山水)와 이웃하여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는 것과 같이, 이 세 절들도 모두 고려산 기슭에 자리하여 고즈넉한 산사(山寺)의 향기로움을 더해가고 있었다.

완만한 등산로를 따라 1,600년 전 백련(白蓮)이 내려앉은 인연의 땅 백련사에 다다랐다. 조용한 산사(山寺)를 기대했지만, 마침 봄의 문턱에서 사찰은 고려산을 찾은 등산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의 흔적을 말없이 설명해주는 노목(老木)들과 친근한 풍경(風磬) 소리가 맞아 주었다. 근래 중창한 절답게 옛 흔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절에서 바라본 고려산 북록(北麓)북쪽 기슭은 사찰의 차분한 이미지를 담기에 충분했다.

백련사를 뒤로하고 찾은 다음 절은 청련(靑蓮)의 인연이 닿은 청련사(靑蓮寺)였다. 고려산 남쪽에 자리한 청련사는 강화에서 유일한 여스님들의 수행 도량(道場)이었다. 절을 찾았을 때는 비구니(比丘尼)라고 부르는 여스님들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이런 내력을 알고 나서 찾아가 본 것 때문이었을까, 다른 절에서는 받지 못한 느낌을 받았다. 백련사 보다 높지 않은 곳에 자리한 청련사는 백련사와 마찬가지로 고려산을 찾은 등산객들로 외로움을 떨쳐내고 있었다. 청련사 큰법당의 현액(懸額) 문 위에 달아놓은 새긴 글자판과 주련(柱聯) 기둥이나 바람벽에 장식으로 쓴 글씨은 특이하게 한글로 쓰여 있었는데, 한자와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또한 청련사에서는 잘 정돈한 잔디 마당이 인상 깊었는데, 사찰이라기보다는 한적한 고택의 정원 같은 친근함이 있었다.

고려산 마지막 코스는 강화팔경(江華八景)강화의 풍광 좋은 여덟 곳으로 전등사, 마니산 등이 속함 과도 관련 있는 적석사(積石寺)였다. 천축조사의 적련(赤蓮)은 고려산 남서록(南西麓)에 위치한 낙조봉(落照峯)과 인연을 맺었다. 적련사에서 언제 적석사로 바뀌었지는 모르겠지만, 돌을 쌓아 올린 듯한 분위기는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서부터 중압감을 주었다. 급경사 위에 지은 적석사를 찾아가면서 체력의 한계를 경험하니, 평소의 게으름을 반성하게 되었다. 힘든 산행 뒤에 펼쳐진 절경은 가히 강화팔경 중의 으뜸이라고 할 만하였다. 적석사에서는 저절로 손을 치켜 올리게 하는 탁 트인 경치가 인상 깊었다. 적석사 대웅전(大雄殿)과 낙조대(落照臺) 보타전(寶陀展) 앞에서 조망하는 승경(勝景)은 글로 형용할 수 없는 감흥 그 자체였다. 힘들게 사찰을 찾은 중생들에게 부처님이 베푼 자비와 같은 느낌이었다.

고려산 사찰 기행을 급히 마무리하고 보문사(普門寺)로 발길을 옮기기 위해 외포리에서 석모도(席毛島)행 배에 몸을 실었다. 석모도에 들어가 낙가산(洛迦山)으로 향하니 머지않아 서해의 관음성지(觀音聖地)인 보문사에 다다를 수 있었다.

 1,000개의 눈과 손으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도량인 보문사는 옛날과 마찬가지로 저마다 원하는 바를 가슴에 품고 절을 찾는 중생들로 붐볐다. 보문사는 일주문(一柱門) 기둥을 한 줄로 배치한 문을 통과한 이후부터는 완만함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른 기슭에 조성한 산사(山寺)였다. 소원하는 자의 이름을 남기지도 못하는 돌무더기 기원처를 뒤로 하며, 힘겹게 오른 사찰은 그 소문대로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가람(伽藍)사찰의 건축물과 구조물들은 근래 지어진 듯한 느낌이었지만, 서해 어부가 바다에서 돌부처를 건져 올려 봉안했다는 보문사석실(普門寺石室)시도유형문화재 제27호에서는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참배객들의 끊임없는 방문에 말라버린 석실 옆 약수 앞에는 보문사 맷돌 시도민속자료 제1호과 700년 된 향나무 시도기념물 제17호가 있었다. 여느 사찰과는 다르게 사찰 경내에 있는 석실, 맷돌, 향나무 등을 문화재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였다.

역사는 짧지만, 보문사의 유명세를 더해주는 것이 바로 낙가산 중턱의 미암좌불(眉巖坐佛)인데, 눈썹바위라고 불리는 암석 밑에 관세음보살상을 양각한 마애불(磨崖佛)을 일컫는다. 석실에 봉안한 부처님, 보문사 극락보전(極樂寶殿)보다도 더 유명한 미암좌불은 100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만든 이의 숨은 의미를 알게 되면 더욱 흥미롭다. 마애불의 규모와 마애불로 오르는 계단수는 모두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숫자와 관련한다고 한다. 하지만, 선(禪)적인 분위기에서 한없이 시간을 보내기에는 마음 속 도량이 넓지 못한 까닭에, 미암좌불의 수많은 계단을 바라만 보고 오르는 것을 다음으로 미룬 채 서둘러 석모도를 나와야만 했다.

본래 강화 사찰 답사를 시작하면서 오랜 사찰들을 찾아보는 여유로운 시간을 생각했는데, 주말 하루 답사 코스로는 무리였다. 원래 고려산의 세 사찰과 석모도의 보문사를 지나, 강화도 남단 정족산(鼎足山)의 전등사(傳燈寺)와 마니산(摩尼山) 자락의 정수사(精修寺)까지 답사하려고 계획했으나, 절반의 성공만을 거둔 셈이었다. 나중에 강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지금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마음먹었다. 이번 강화 방문은 간혹 있어왔던 의무적인 강화도 답사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주제를 정해 떠나는 답사길이 얼마나 유익하고 즐거운지를 알 수 있었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절로 와 닿았다.
인천은 격변(激變)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는 것 같다. 인천의 지형도를 새로 그릴 대규모 토목공사가 한창이고, 인천의 스카이라인(sky line)을 바꿀 신도시의 초고층 빌딩들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지내온 강화의 고찰(古刹)들을 찾았던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강화의 산자락에 사뿐히 내려앉은 사찰들, 그 인연을 잇는 여정에 함께 동행하는 것은 어떨까.

이미지 제공_ 필자

金正勳 1979년 인천생. 부평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최근 저서로 『부평사』(공저) 등. hoon149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