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길종(河吉鐘, 1941~1979)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대표적인 수식어는 ‘요절한 천재 감독’이다. 그가 천재였는지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마흔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린 그의 죽음이 너무 일렀던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운한 예술가의 초상을 그리기 좋아하는 평론가들에게 그의 이른 죽음은 화룡점정(畵龍點睛) 같은 것이기도 했다. 친척집에 얹혀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의 역경을 딛고 서울대에 입학했고, 졸업 후 에어프랑스 항공사에 입사했지만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으며, UCLA 영화과에 입학해 영화악동(the moview brats) 세대1와 함께 영화를 익혔고, 졸업 작품이었던 <병사의 제전>(1969)은 미국 영화과 졸업생 가운데 4명을 선발하는 ‘메이어 그렌트(Meyer Grent) 상’을 수상할 만큼 영화적 재능을 인정받기도 했다. 예술가적 자의식이 넘쳐나는 것도 모자라 시대와 불화(不和)하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던 그의 삶은 영화계가 바라던 예술가의 초상 그 자체였다.

하길종의 드라마틱한 삶과 엘리트다운 예술가적 자의식, 그리고 그에 걸맞는 다채로운 경력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그는 ‘불운한 천재 예술가’로서 신화적 인물이 되었다. 그에 대한 평가 중 많은 부분이 작품 외적인 이력에 기인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지적한다 하더라도 그의 영화가 지닌 가치가 손상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영화의 암흑기라 해도 좋을 1970년대를 빛나게 한 순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길종 영화 덕분이니 말이다. 

아부하지 않는 자에게 가위질을 선물했던 시대

한국영화사에서 1970년대는 암흑기로 묘사되곤 한다. 한국영화의 부흥기로 불리는 1960년대를 뒤로 하면서 감독의 창조적 역량은 점차 희미해졌고 관객들은 한국영화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한국영화가 퇴보한 데 대한 일차적 책임은 영화인들에게 있겠지만, 당시 영화인들이 자신의 영화적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없도록 한 구조적 원인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른바 ‘제4차 개정영화법 시대’로 불리는 1970년대는 유신정권의 영화정책에 따라 영화제작사 허가제를 실시한다. 이 제도는 영화의 자유로운 제작을 통제하여 새로운 창작의욕과 아이디어를 가진 제작사들의 신규 진입을 막고 소수의 기득권 세력에 사실상 독과점을 허용함으로써, 영화계의 변화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막는 부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더구나 강력한 검열과 심의는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유신체제의 정치적 이념에 부합하는 ‘아부성 영화’를 제작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2

미국에서 귀국한 하길종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처럼 비겁함을 의무로 강요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하길종이 그 시대에 응답하며 연출한 첫 작품은 천민자본주의적인 욕망으로 파멸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화분>(1972)이었다. 현마 남궁원 분는 첩 최지희 분과 그녀의 여동생 미란 윤소라 분과 함께 살아간다. 이들 셋이 성적으로 얽히며 형성했던 그로테스크(grotesque)한 분위기는 현마의 비서인 단주하명중 분가 개입하면서 더욱 강렬해진다. 인물들의 욕망이 이성애와 동성애의 경계를 넘나들며 파멸의 길로 질주하는 <화분>은 그 소재만큼이나 강렬한 색채와 파격적이고 상징적인 영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현마가 단주와 미란을 뒤쫓는 장면에서 노을의 붉은 빛을 역광으로 받아내는 장면은 하길종의 과감한 영화미학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한네의 승천>(1977) 역시 하길종 특유의 영화미학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영상시대’ 3를 통해 새로운 영화미학의 추구를 선언했던 하길종은 <한네의 승천>에서 윤회사상(輪廻思想)을 바탕으로 무속신앙적인 메타포를 결합하고, 민속극과 여인의 한이라는 민족적 정서를 끌어들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설정을 영화적으로 옮겨놓는 방식이다. 하길종은 과거 장면을 모노크롬(monochrome)단색영화과 무성으로 구성해 형형색색의 소란스런 현재 장면과 병치시키면서 과거와 현재라는 시공간의 경계를 분명히 할 뿐만 아니라, 도입부와 종결부에 반복되는 영상(계곡을 떠내려가는 꽃신)과 더불어 동일한 테마 음악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즉, 하길종은 윤회라는 작품의 주제를 내러티브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이를 영화만의 시청각적 양식으로 구현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하길종의 미학적 시도는 쉽게 소통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더 치명적이었던 것은 이러한 미학적 시도 자체가 유신정권의 영화정책과 공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영화제작사 허가제 하에서는 새로운 영화미학을 추구하는 젊은 감독들의 실험을 그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 하길종이 <바보들의 행진>(1975), <병태와 영자>(1979) 등의 청춘영화를 연출했던 것 역시 생존을 위한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생존전략은 어디까지나 영화를 연출하기 위한 것이었지 시대의 어둠 속에 숨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실제로 하길종이라는 이름은 정권과 마찰을 빚는 문제아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이기도 했다.

<화분>의 주요 공간은 파란 기와집이다. 외설적 욕망과 부패로 만연한 파란집이 자신들에 대한 모욕이라 여겼던 정권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무려 20분이 넘는 분량을 가위질당해야 했던 <수절>(1973)은 보다 직접적으로 유신체제의 권력자를 극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가위질에 의해 문제가 되는 장면들 대부분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대와 불화했던 이유를 확인하기에 부족하지는 않다. 원귀(寃鬼)영화이자 복수담인 <수절>은 변괴가 끊이지 않는 마을을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이때 마을 주민 하나가 “나라가 망하려니까 별 변괴를 다 보는구만”이라고 이야기한다. 하길종은 그 변괴의 원인이 무력으로 마을을 지배하는 독재자 스승 윤일봉 분에게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무사들이 마을을 급습해서 마을 주민들을 유린하는 장면이다.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적 알레고리임이 분명한 이 장면에서 정권의 가위질은 절정에 달한다. 이로 인해 그가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유신체제의 사회상은 희미해졌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암시하려 했던 시대의 실체가 그 가위질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가위질은 시대의 의무에 순응하지 않은 자에게 정권이 하사한 선물이었던 셈이다.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물론 하길종이 1970년대 청춘들의 시대적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바보들의 행진> 덕분이었다. 당시 청춘들이 호흡했던 시대의 공기를 고스란히 담아낸 이 작품은 당시 영화에서 쉽게 느낄 수 없는 활기로 넘쳐난다. 이는 단지 청춘들이 주인공을 맡아서가 아니라, 카메라가 실제 거리에서 청춘들과 함께 걷고, 뛰고, 웃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길종이 실제 대학생을 캐스팅해 배역을 맡겼던 것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 대학가의 풍속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또한 영화의 주인공들이 과도할 정도로 웃어대는 데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는 좌절감과 무력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영화 속 청년들은 거리에서 머리를 잘렸고, 하길종은 어느 밀실에서 필름을 잘려야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과도하게 웃어대는 인물들의 모습에는 이러한 가위질의 시대를 못본 척, 못들은 척, 말 못하는 척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자들의 무력감이 배어 있다. 그것은 청춘의 이상과 욕망을 거세하려는 가위였고, 그 가위 앞에서 병태 윤문섭 분와 영철 하재영 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웃고, 웃고, 또 웃는 것이었다. 좌절감과 무력감의 이명(異名)으로서의 바보같은 웃음, 그들의 과도한 웃음 속에 쓰라린 슬픔이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병태가 입영열차에 몸을 싣는 순간, 바보같은 웃음의 무력함이 절정에 달한다. 현실원칙 앞에서 그들은 더 이상 웃음을 짓지 못한다. 웃음의 가면을 벗어던진 병태와 영자 이영옥 분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키스를 나눈다. 이 장면이 아름다운 것은 두 사람의 키스 때문이 아니라, 병태에게 입술을 포개려는 영자의 몸을 들어 올려주던 어느 군인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길종이 바라던 현실의 삶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서로 입술을 포갤 수 있을 만큼의 배려 정도면 충분했다.

  -영화<병태와 영자> 한 장면-  

<바보들의 행진>은 하길종의 대표작으로 남아있지만, 정작 하길종 자신은 이 작품을 영화로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냉혹한 평론가이기도 했던 그는 “최근 상당한 관객을 동원하여 화제가 되어온 <별들의 고향>(1974), <영자의 전성시대>(1975), <바보들의 행진>류가 영화란 말인가. 단연코 아니다. 단지 영화에 접근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라는 말로 자신의 영화에 불만을 표출했다. 하길종의 말마따나 그의 작품들이 영화라기보다는 영화에 접근하기 위한 시도에 불과했다면, <병태와 영자>의 흥행성공은 그가 원했던 진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선사했다. 하지만 하길종은 결국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1979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하길종이 떠나던 해에 그의 영화적 상상력을 옥죄던 유신체제의 우두머리 박정희 역시 총성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의 죽음은 너무 빨랐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너무 늦게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그의 진짜 영화는 세상에 빛으로 영사되지 못한 채 사라져야 했다.

1.
대표감독으로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있음.

2.
우수영화로 선정된 영화를 제작한 영화사에 외화 수입권을 부여하는 ‘우수영화 보상제도’ 역시 외화 수입권을 국가가 점유함으로써, 국내영화에 대한 통제 기능을 자연스럽게 수행하는 효과를 낳았음.

3.
영화평론가 변인식과, 영화감독 김호선, 이장호, 하길종, 홍파, 이원세 등이 연대하여 결성한 동인체의 명칭이자 1975년 7월부터 1978년 6월까지 발행한 계간지 <영상시대>를 중심으로 벌인 ‘청년영화 운동’을 지칭함.

안시환 필명 1974년 인천생. 영화평론가, 중앙대 강사. 최근 글로 「무협영화, 후 진취앤에서 장 이머우까지」, 「이면의 진실을 보라」 등. vadomor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