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라는 친숙하고 환상적인 매체에 대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멋진 쿠페coupe)를 타고 고속도로에 올랐다. 신나게 드라이브를 하다 안내판을 보니 4차선 도로에 만화, 만화책, 만화콘텐츠, 인터넷만화 등 여러 이정표가 등장한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전통적으로 만화를 창작, 소비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출판이었다. 적어도 20세기엔 ‘만화=만화책’이라는 등식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만화에 대한 논의를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확장할 때 이 등식이 거추장스러울 뿐이었지 일반적 논의에서 만화는 만화책이었다. 그러나 2009년 오늘의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만화가 인터넷 파일을 통해 유통되고 소비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온라인 만화사이트에서 만화를 구매해 보거나, 포털사이트의 게시판에서 스크롤만화를 보거나 그도 아니면 불법 스캔파일을 받아 보기도 한다.

어디 그뿐일까. 어제 봤던 만화가 영화, TV드라마, 뮤지컬 등이 된다. 일본에서는 미디어믹스(media mix)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원소스멀티유스(one source multi-use)라 부르는 만화콘텐츠의 프랜차이즈는 국경도 가뿐하게 뛰어넘는다. 1992년 연재를 시작한 일본의 인기 만화 <꽃보다 남자(花より男子)>는 일본에서 영화로 제작한 후 TV용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이후 타이완으로 건너가 TV드라마가 되었다. 2005년, 2007년 일본에서 TV드라마로 제작했고, 2008년 극장판 <꽃보다 남자 파이널>은 흥행 2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2009년 한국산 TV드라마로 거듭나 숱한 여성팬들의 마음을 훔쳤다. 1984년 연재를 시작한 일본의 인기만화 <드래곤볼(ドラゴンボ-ル)>은 슈퍼히어로 만화를 탐식하는 할리우드로 건너갔고, 한국만화가 형민우의 『프리스트』(1998~)도 할리우드에 영화 판권이 팔렸다. 만화가 오로지 책이었던 시절과 달리 그것은 프랜차이즈의 중심에 서 있다.

만화가 제작되고 나서 영화나 게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는 경우는 물론, 다른 콘텐츠의 만화화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만 예를 들어도 만화원작을 구매해 게임으로 제작하던 패턴은 물론,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의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만화기획을 진행하기도 한다. 게임 메이플스토리를 만화화한 『코믹 메이플스토리』의 성공 스토리는 온라인 게임의 만화화, 특히 어린이용 만화화로 확산했다.

여기에 하나 더, 아마추어들의 만화창작도 디지털 기술 발전, 인터넷 확산, 이미지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확대라는 세 박자가 맞아 떨어지며 급속히 확산했다. 디씨인사이드(http://www.dcinside.com)나 루리웹(http://ruliweb.nate.com) 등의 게시판을 보면 개인들이 그린 만화가 가득하다. 상업만화처럼 완벽한 구성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벌어지는 가벼운 이야기나 우스개, 때론 전문적인 이야기들도 다룬다. ‘만화=만화책’이라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공식 매체에 데뷔하지 않고 게시판에 취미로 올린 만화를 만화라 부르기 어렵지만, 2009년 대한민국에서는 만화를 창작하고 소비하는 또 다른 갈래다. 2008년 디씨인사이드에서 인기를 얻어 단행본을 출간한 굽시니스트(본명 김선웅)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만화』처럼 프로 데뷔로 이어진 경우도 있을 정도이다.

그림이 주가 아닌 만화도 있다. ‘만화는 그림으로 그려진…’이런 류의 정의가 무색하게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사진을 흥미롭게 편집한 사진만화도 일반화했다. 1990년대 정필용 같은 작가들의 선구적 시도 이후 사진만화는 인터넷에 패러디 도구로 일반화했다. 그러던 것이 <커피프린스 1호점>(MBC, 2007), <주몽>(MBC, 2006~2007), <거침없이 하이킥>(MBC, 2006~2007)과 같은 드라마나 영화의 장면을 캡처해 편집하는 사진만화로 결실을 맺었다.

많은 이들이 만화의 쇠락을 이야기한다. 1990년대 좋았던 시절과 비교해 만화잡지의 수도 줄고 판매부수도 줄었다고 말한다. 당연히 인기작도 줄었다. 그러나 만화가 만화책에서 다양한 만화콘텐츠로 확장하고 그에 맞춰 시장이 커진 것을 생각하면, 체감적 불황론은 냉정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체감적 불황론의 핵심은 좋았던 시대인 1990년대와 비교해 오늘의 불황을 판단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1990년대엔 만화가 가장 저렴하고 대중적인 엔터테인먼트였는데, 게임이나 인터넷 등의 확산으로 만화시장이 불황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1990년대 장르만화가 ‘저렴한’ 콘텐츠였을까? 만화방에서 빌려보건, 잡지나 책을 사서 보건 간에 만화는 비용을 지불하는 콘텐츠였다. 무료인 TV와 비교하면 전혀 저렴하지 않은 콘텐츠였다. 영화는 오가는 시간을 빼고라도 적어도 편당 2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만화는 2시간 정도면 여러 권을 읽을 수 있다. 빌려보건, 사서보건 영화 한 편의 비용과 많은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본과 비교해 두드러지는 한국의 장르만화 시장 침체는 1990년대 후반 여러 요인으로 인해 변화한 소비자의 소비 패턴에서 시작한다. 만화와 같은 엔터테인먼트는 소비 패턴의 변화가 장르의 흥망성쇠를 판가름한다. 예컨대, 영화대여시장은 불법동영상을 다운받아 보는 소비 패턴이 일반화하면서 일거에 붕괴했다.

  ⓒ서울문화사│2004       ⓒ애니북스│2008           ⓒ대원씨아이│2002       

한국의 장르만화는 1990년대 후반 대여점의 등장, 청소년 보호법으로 인한 판매망의 붕괴, 인터넷 서점의 등장에 따른 동네 서점의 몰락 등 사회적 요인이 맞물리며 구매시장에서 대여시장으로 급격히 전환했다. 대여시장의 일반화는 독자들에게 잡지에 연재한 만화를 읽고, 좋아하는 작품을 기다려 구매하는 소비 패턴 대신 많은 수의 만화를 빌려서 몰아 읽게 했다. 재미있는 만화를 한꺼번에 빌려 읽는 독자들은 정상적인 도서 구매 소비에서 이탈했고, 잡지시장의 불황을 가져왔다. 여기에 포털사이트의 무료 만화 연재가 기름을 부었다. 포털사이트 중심의 인터넷 환경은 유료 온라인만화의 설자리를 빼앗아 버렸다. 포털사이트는 무료 만화를 연재하며 일상의 만화독자를 끌어 모았다.

21세기 들어 본격화한 다매체 환경이 만화 소비를 위축시킨다는 주장도 있지만 긍정적 역할도 하고 있다. 다매체 환경은 지상파 중심의 영상 미디어 환경에 비해 콘텐츠의 수요를 폭발시켰다. 콘텐츠 수요에 맞추기 위해 다양한 영상물이 제작되는데, 치열한 경쟁시대에 시청자의 눈을 먼저 사로잡기 위해 지명도 있는 만화원작에 손을 뻗는다. 공중파 채널 몇 개가 영상매체 채널의 전부였던 시대였다면 만화원작의 드라마나 영화를 쉽게 볼 수 있었을까? 2009년 한국만화는 잡지만화, 포털사이트의 무료 연재만화, 학습만화, 인터넷만화 등 다양한 윈도우로 확산되었지만 집중도는 낮아졌다. 그러니까 대형 히트작이 나오지 못한다. 엔터테인먼트의 힘은 집중도이기 때문이다.

한국만화산업에 가장 필요한 것은 장르만화의 창작과 유통, 소비의 구조를 회복하는 것이다. 시장을 다시 작동시키기 위해 어느 것 하나만을 고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시장 전체를 뒤흔들 폭발이 필요하다. 빅뱅은 장르만화에서 일어나야 한다. 시장의 중심에서 빅뱅이 일어나면 다양한 윈도우에도 연쇄적으로 효과를 미칠 것이다. 특히 잡지만화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들이 많다. 인터넷시대인데 잡지만화는 끝났다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10년간의 불황이 회의론을 확산시켰기 때문이다. 여전히 거대한 만화시장을 갖고 있는 일본과 비교하면 더 회의에 빠진다. 그러나 장르만화가 가장 안정적으로 창작, 유통, 소비될 수 있는 힘은 아직까지 잡지에 있다.

朴仁河 1970년 서울생.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교수. 최근 저서로 『장르만화의 세계』, 『꿈과 환상을 만들어 파는 사업가 월트 디즈니 vs 인간가치를 꿈꾸게 하는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등. enterani@c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