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보(大韓民報)> 창간호1909년 6월 2일에 실린 이도영(李道榮, 1884~1933)의 한 칸 카툰(cartoon)정치적인 내용을 풍자적으로 표현하는 만화 「삽화(揷畵)」를 한국만화의 시작으로 볼 때, 올해는 한국만화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글에서는 한국만화가 걸어온 길을 훑어보고자 한다.

한국만화의 여명기와 전후의 짧은 황금기

한국에서 현대만화는 개화기 및 일제시대에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인 서구 저널리즘의 풍자만화 기법들을 따르며 탄생했다. 현재의 신문만평과 그리 다르지 않은 이도영의 한 칸 풍자만화, 만평과 만화가 합쳐진 안석주(安碩柱, 1901~1949)의 「만문만화(漫文漫畵)」1927년 6월부터 <신문춘추>에 연재 등은 영미 대중신문의 만화양식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코믹스트립스(comic strips) 4칸 이상을 연결하여 이야기를 만드는 만화를 한국에 최초로 도입한 노수현(盧壽鉉, 1899~1978)의 「멍텅구리 헛물켜기」1924년 10월부터 1927년 3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 역시 현재의 4칸 만화 같이 시사성을 강조하기보다는 미국의 경우처럼 슬랩스틱 코미디(slapstick comedy)액션을 과장한 희극에 가까웠던 것이 특징이다.

해방 직후 한국어 출판물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한국만화 역시 부흥하게 되었다. 일제시대 축적한 시사만화가 기반이 되어 1948년 <만화행진> 같은 만화전문 잡지가 탄생하고, 싼 가격으로 펄프적 대중오락 수요를 채워주는 떼기만화 수십 쪽 내외의 조잡한 인쇄의 만화로, 딱지만화라고도 함들이 좌판에서 인기를 끌었다. 『헨델박사』(1952) 등의 히트작을 낳은 떼기만화는 공상과학물, 판타지물, 모험물 등이 많았고 그림체 등은 미국의 극화체 모험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와 동시에 200여 페이지 분량의 양장본 『눈물의 수평선』(1957) 등이 출간되어 1950년대에는 고급 단행본, 보급형 오락물, 시사만화잡지 등 다양한 층위로 만화의 기반이 갖추어졌다.

대본소와 장르폭발, 사회적 암흑기와 오락성

경제사정이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시장의 사정은 밝아지지 않아서 양장본 등은 사라졌지만 만화에 대한 수요는 증가했기에, 1958년 만화책을 빌려보는 방식인 대본소(貸本所)가 도입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간 쌓아올린 내적 동력과 ‘일본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蟲, 1928~1989)의 활약으로 새롭게 발전한 일본만화, 미국 골든에이지 슈퍼히어로 만화의 영향을 받아 한국만화는 이야기만화 장르가 다양해졌다. 산호(珊瑚)의 『라이파이』(1959~1962) 등 슈퍼히어로물, 박기당의 사극물, 엄희자의 순정물, 박기정의 『도전자』(1964) 등 스포츠물, 임창의 땡이 시리즈 같은 명랑모험물 등 각종 장르들이 형태를 잡았다.

하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며 정부에 의한 사전심의가 도입되고 대본소 시스템이 독점화하면서 대본소 만화는 장르의 다양함보다는 공장제적 물량 맞추기의 나락에 빠졌고 창작자들도 세대단절이 이루어졌다. 한편, 1970년대 신문과 잡지가 서서히 기지개를 펴며 만화 공간도 만들어졌다. 1972년 <일간스포츠> 창간과 함께 고우영(高羽榮, 1938~2005)의 『임꺽정』을 필두로 신문에 연재하는 장편 성인극화가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고, <새소년> 등 청소년 교양잡지를 통해서 명랑만화가 꽃피었다. 성인극화의 경우 정치권력에 의한 자의적 가위질을 피하면서도 대중들에게 시대적 재미를 선사하는 독특한 우회적 기법들을 이야기 속에 녹여내었고, 명랑만화는 슬랩스틱 코미디 형식 속에 웅장한 모험담 등 다양한 장르들을 소화해냈다. 이외에도 클로버문고 등의 도서시리즈는 다시 소장용 단행본, 그것도 세트로 구비하는 문화를 낳았다. 독재체제라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도 한국만화는 꾸준히 지평을 넓혀온 셈이다.

-안석주의 「만문만화」_상,하-   최상권「헨델박사」표지 이상 이미지 제공_한국만화 100주년위원회

80년대의 만화 붐

1980년대는 만화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이 급격하게 발전한 시기다. 군부 독재의 기조는 이어가되 대중오락문화에 대한 압박은 좀 더 느슨하게 풀어준 전두환 정권 하에 만화의 장르적 완성도와 매체 플랫폼은 더욱 진일보했다. 대본소 시스템이 독점체제의 마수에서 좀 더 자유로워졌고, 만화가 실리는 잡지들의 시장이 더욱 확대하였으며, 스포츠신문들은 만화지면을 늘렸다. 나아가 일각에서는 민중문화론의 부흥 속에 저항적 만화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졌다. 여기에 성공에 대한 각종 욕망이 들끓고 사회적 그늘이 표면화하기 시작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한국만화는 새로이 성장했다.

대본소에서는 한국사회에서의 성장과 좌절을 그려내는 비정한 극화들이 때로는『공포의 외인구단』(1982) 같은 스포츠물로, 때로는 추공시리즈같은 무협사극으로, 때로는 『신의 아들』(1983~1987)같은 기업극화의 모습으로 큰 히트를 쳤다. 잡지계에서는 소년소녀 교양잡지 간의 경쟁 강화는 물론 만화전문잡지 월간 <보물섬> 창간(1982) 등으로 만화지면이 크게 늘어, 성인들의 공간으로 변모하던 대본소와 달리 주류 청소년 만화의 안정적 공간이 확대되었다. 당대 대중문화의 경향을 반영하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양산되었다. 스포츠신문들 역시 대본소 만화의 ‘쌓아놓고 읽는’ 방식과는 달리 하루하루 읽는 재미를 극대화하는 여러 작품들을 경쟁적으로 유치했다.

1980년대 말엽에 이르러 한국만화는 최고의 꽃을 피웠다. 1987년 창간한 잡지 <만화광장>은 대본소 성인극화 진영의 이야기성에 민중문화 진영의 사회비판적 코드를

섞어 높은 작품성과 대중적 호소력을 겸비했다. 이와 함께 1988년 순정만화 전문지 <르네상스>와 소년만화 전문지 <아이큐점프>의 창간으로, 세분화한 독자층을 공략하는 만화잡지 시장이 만들어졌다. 여전히 정부의 심의필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1980년대 말은 여러 측면에서 한국만화의 다양성과 대중적 호응이 확실하게 갖추어진 시기였다.

급성장과 급전환

1990년대 한국만화의 발전은 일본만화의 개방과 함께 시작했다. 일본만화는 실제로 해방 후 내내 한국만화에 큰 영향을 끼쳐왔지만, 일본만화 그 자체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드래곤볼(ドラゴンボ-ル)>1986년 제작한 일본의 애니매이션을 필두로 도작이나 국적세탁을 거치지 않은 일본만화로서의 일본만화를 독자들은 만나기 시작했고, 이런 개방은 한국만화에 있어서 새로운 도전이었다. 일본의 <소년점프(少年ジャンプ)> 등이 그간 발전시킨 장르 코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대히트를 기록하는 한국만화들이 탄생했고, 독자 규모 확대와 단행본 판매 등으로 만화시장은 산업적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산업적 성공 공식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장르적으로는 오히려 다양성을 잃는 모습을 보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인디/언더로 지칭되는 대안만화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기도 했다.

주류가 된 웹만화

2000년대엔 출판시장의 급속한 침체와 초고속 인터넷의 보편화 등에 힘입어, 웹만화가 화두로 떠올랐다. 기존 페이지 만화를 웹에서 구현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점차 웹 특유의 문법을 실험하게 되었는데, 일기체의 에피소드식 일상 만화와 스포츠신문 연재작 중심의 개그물이 먼저 두각을 나타내어 웹툰(webtoon)의 고정이미지를 선점했다. 특히 감상적 단상을 파스텔톤 색조의 부드러운 그림에 담아내는 소위 에세이툰(essaytoon) 장르가 웹 연재뿐만 아니라 단행본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다. 2003년 포털사이트 다음(daum)에 연재된 강풀의 <순정만화>의 히트를 필두로, 각 회를 세로 스크롤 방식으로 연출하는 장편 연재만화 스타일이 인기를 얻으며 현재는 가벼운 연애물부터 스릴러까지 다양한 내용을 소화하는 명실상부한 주류 장르가 되었다.

간단히 살펴보았듯, 한국만화는 다양한 외부 영향을 받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특유의 사회적 현실과 매체 조건에 적응해나가며 특유의 형식과 장르들을 탄생시켜왔다. 급격한 변화 속에 작가와 작품의 흐름이 단절되고 중요한 가능성들이 제대로 발전되지 못한 경우도 여러 번 있지만, 매번 역동적으로 새로운 판을 만들어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변화가 기다릴지라도, 그런 역동성의 기조만큼은 계속되지 않을까.

金樂昊 1976년 서울생. 만화연구가. 최근 저서로 『고우영 이야기: 만화, 미술, 역사로 읽는 고우영』(공저), 『조선을 그린 이두호』(공저) 등. capcold@capcol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