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길. 수줍은 듯 나무들이 연둣빛 싹을 빼꼼히 내밀 무렵이나 흐드러진 노란색으로 작은 거리의 하늘마저 가려버리는 은행잎 날리는 가을이면 유독 예뻐지는 길이다. 그러나 봄, 가을은 어찌나 짧은지 자칫 이 멋진 풍경을 놓치기 십상이다. 다행히 5월이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기획하는 ‘미술관 봄나들이’ 전시가 있어 봄날의 정동길을 만끽할 수 있게 한다.
올 5월에도 어김없이 ‘미술관 봄나들이’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왠지 ‘봄나들이’라는 편안한 제목과는 달리, 올해의 표제는 좀 과격(?)하다. 미술관 습격사건, 사실 요즘 많은 미술관에서 수입형 블록버스터 전시 유치를 통해 수익창출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미술관들이 이래도 되는 것이냐, 한번 습격해야 하는 것은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미술관이 자체 습격에 들어갔다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어 걸음을 재촉했다.

예상은 했었지만, 미술관 습격은 상당히 유머러스했다. 정동길과 자연스레 이어지는 미술관정원 여기저기 알록달록한 캐릭터형 조각들이 배치되었다. 미술관 입구 위에는 귀여운 유령도 있는 것 같고, 언뜻언뜻 팬더도, 곰돌이 푸우도 있다. 거대한 스피커와 로봇이 있는가 했더니 저 입구 쪽에는 탱크도 보인다. 본격적인 ‘습격’을 떠나볼까.

제일 먼저 관객을 맞는 것은 김영의 <수트맨Suit Man>이다. 검정색 양복에 검정테 안경, 언뜻 경호원들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수트맨들은 작가 김영의 모습을 본떠 만든 피겨(figure)캐릭터들을 축소해 재현한 인형란다. 작가는 관람객이 직접 수트맨을 만지고, 사진 찍으면서 수트맨과 관객이 소통하는 것이 작품의 컨셉이라고 했지만 예술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미술관 앞에 도열해 있거나 정원 곳곳에 드러내 놓고 숨어있는(?) 수트맨들의 모습-게다가 돌도 강철도 아닌 한낱 PVC비닐로 만들어진-은 미술관이라는 맥락과 상충하면서 유머러스한 비판적 메시지를 은연중에 담아내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미술관 입구 바로 앞에는 탱크도 있다. <바나나맛 우유 탱크>(김과현)는 미술관을 지키겠다는 것인지 미술관에 쳐들어가겠다는 것인지 약간 모호하지만 탱크 위의 인물이 미술관을 등지고 있는 것을 보면 지키는 쪽에 더 가까운 것도 같다. 그런데 바나나맛 우유통을 모티브로 만든 저 허술한 탱크가 과연 ‘고매한’ 예술작품을 지켜낼 수 있을까. 이외에도 구름 같아 보이기는 한데 다리가 나와 있는 모호한 형상의 <클라우드 맨Cloud Man>(임수진), 물고기 같기도 하고 귀여운 도깨비 같기도 한 <돛단배Sharpie>(황은진)가 있는가 하면 로봇 <프로파간다>(이기일)도 있다. 하지만 이번 습격의 주역은 아무래도 팬더 분장을 하거나 샴 쌍동이로 등장하는 푸우<애꾸눈은 딸기잼이 달다라고 말했다>, <샴 푸우- 동상이몽>(변대용), 여유롭게 커피를 즐기고 있는 수달<티타임Tea Time>(김예솔), 엄마 팬더와 함께 습격에 동참한 아기 팬더곰<필 더 판다Feel the panda>(이미연)을 비롯한 동물군단인 것 같다. 

변대용,<에꾸눈은 딸기잼이 달다라고 말했다>

ⓒ서울시립미술관 │2009

 관객과의 소통이나 적극적인 참여를 의도했던 것이라면 이번 습격은 분명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앞에서 작품의 동작을 따라하며 사진도 찍고 만지고 올라타고 하면서 자유롭게 작품과 접촉하는 현장을 목격하기란 어렵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명색이 습격인데 이렇게 유(柔)하고 재미있기만 해도 될까? 작품 앞에서 깔깔거리며 사진도 찍고 즐거운 봄날의 한때를 보냈던 관객들이 집에 돌아간 다음, 이 ‘습격사건’은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기억은 할까. 그저 까만 옷을 입은 비닐 남자들과 커피잔을 든 수달, 샴쌍둥이 푸우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영, <수트맨> ⓒ서울시립미술관 │ 2009

6월 미술관 본관에서는 <르느와르展>이 열렸다. 많은 관객들은 수트맨과 푸우, 바나나맛 우유통 형태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탱크의 도열을 받으며 미술관에 들어갈 것이다. 성격이 다른 두 전시가 만나면서 이번 습격은 또 다른 의미 층을 만들어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었겠지만, 미술관 습격은 절반의 성공을 자축해도 좋을까?
유쾌하게 출발했던 습격사건은 이렇게 많은 물음표를 남기고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