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창 ［선인장］                    장욱진 ［바다의 이미지］

나는 한자를 공부한 문자학도다. 사실 지금의 한자는 그림이었던 초기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글과 섞여 있어도 불편하지 않을 만큼 획과 점이 방정해졌지만 내 눈에는 이것들이 ‘단정한 척’할 뿐 꼬물꼬물 그림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이렇다.

南山崔崔 雄狐綏綏. 뾰족뾰족 남산 서성대는 수여우
魯道有蕩 齊子由歸. 평평한 길 시집가는 길
旣曰歸 曷又怀    이미 갔는데 왜 자꾸 생각나나

葛?五兩 冠緌双 짚신 다섯 켤레 끈 달린 관결혼예물
魯道有蕩 齊子庸      평평한 길 시집가는 길
旣曰庸曷又從  이미 갔는데 왜 자꾸 뒤따라가나
_『시경(詩經)』의「남산(南山)」 중에서

사랑하는 여자(齊子)가 다른 곳으로 시집 가고, 수여우로 비유된 남자 주인공이 여자가 시집가는 길을 서성이고 있다. 발자국을 찍은 자리에는 원래 ‘지(止)’자가 있었다. ‘止’는 발을 그린 글자이고 이 시에서는 아무 뜻도 없는 어조사로 쓰였다.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내며 서성이는 남자의 발자국 때문에 시를 읽는 내 마음이 어수선하다.

글을 읽는 사람에게 그림이 보이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글이 보이는 건 나뿐만이 아닐테다. 달리는 말을 그린 뒤 글을 쓴 김점선(金點善, 1946~2009) 화백이 그랬고, 그림에다가 천연덕스럽게 ‘멜랑꼴리아(Melencolia)’라고 적어놓은 화가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가 그렇다. 나혜석(羅蕙錫, 1896~1948)과 이중섭(李仲燮, 1916~1956)도 글을 썼다기에 <미술인의 운문과 산문展>을 찾았다. 조선시대 화가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의 글부터 박인경(朴仁景) 등 생존한 화가들의 시까지, 미술자료박물관답게 많이도 모아 놓았다. 전시된 책은 미술인이 썼다는 공통 키워드 아래 크게 3가지로 나뉜다. 미술인이 시·산문을 쓴 것, 미술인이 미술에 대해 쓴 것, 미술인이 그리고 쓴 것. 앞의 두 가지는 그림이 없거나 참고 그림 형식으로 그림이 들어가 있지만 마지막 부류는 그림이 먼저인지 글이 먼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림과 글이 밀착되어 있다. 김기창(金基昶, 1913~2001)의 「선인장」은 그의 글처럼 심장을 찌를 것만 같고,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의 「바다의 이미지」는 글도 그림도 아스라하다. 글을 쓰듯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듯 글을 쓴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의 시화첩에서 눈을 못 떼다가 낙서 같은 박래현(朴崍賢, 1920~1976)의 작품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조각하는 마음을 쓰고 그린 최종태(崔鍾泰)의 작품, 플라타너스의 정서를 쓱쓱 그려낸 박고석(朴古石, 1917~2002)의 작품, 여백을 그림 삼은 김환기(金煥基,  1913~1974)의 작품 등. 최욱경(崔郁卿, 1940~1985)이 쓴 한 줄-‘사랑한다는 것은’-은 글이지만 그림이 되어버렸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비뚤배뚤 경쾌한 글로 보이고 사랑을 끝낸 사람에게는 얼룩덜룩 슬픈 그림으로 보이는.

구본웅 시화첩                                       최종태 작품

보면 볼수록 그림과 글이 자유자재로 되는 이들이 부럽다. 사람이 사람과 살아 소통이 가장 큰 문제이고, 소통하는 데는 말보다 글, 글보다 그림이 더 힘이 있는데, 이들은 가장 힘 있는 두 가지에 불편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능했던 우리네 선조들에게 그림쟁이와 글쟁이는 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또 생각해 보면 그림쟁이가 글을 썼다고 놀랄 일도 아니다. 부러운 일이다.

이미지 제공_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