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된 헌책들

‘참여연대’에서 가지를 뻗은 아름다운재단이 ‘아름다운가게’를 만들면서 산하의 헌책방도 문을 열었다. 기왕의 아름다운가게에서도 헌책을 다루긴 했지만, 헌책만 다루는 곳을 서울 군데군데 별도로 만든 것이다. 대형서점 중에는 영풍문고가 매장 한 쪽에 헌책방을 차리려다 만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인터넷서점 알라딘과 인터파크, 리브로가 헌책 일에 뛰어들었다. 그전에도 수십만 권 목록을 올려놓고 있던 인터넷헌책방들이 있었다. 이들은 매장에서만 헌책을 다루다가 인터넷에까지 뛰어든 경우로, 아직도 꾸준히 한 길을 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헌책방’을 알고 ‘헌책’을 알며 ‘책’을 안다.

헌책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처음 헌책방 마실을 나오면 으레 “참고서가 너무 많다”고 하는데, 잘 모르고 하는 말씀이다. 교보문고와 영풍문고에도 참고서가 얼마나 많은가? 중간 크기 새책방이나 동네 새책방도 매한가지다. 대한민국에선 어느 책방이든 자습서와 참고서가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문학이나 예술, 학문을 하는 사람들도 고등학교를 마치는 날까지는 ‘자습서 아닌 책’을 들여다볼 겨를이 없을뿐더러 스스로 찾을모를 느끼지 못한다. 대학생이 되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날에는 문학하는 사람이나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집에 책 몇 만 권쯤은 마땅히 갖추어 놓기 마련이었다. 못해도 몇 천 권쯤은 갖추어 놓았다. 책을 몇 천 권 갖추어 놓은 이라면 몇 만 권이나 몇 십만 권쯤은 읽은 손길이었다. 꼭 책을 많이 읽어야만 똑똑하거나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지만, 내 목소리만 앞세우기보다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매무새요, 아무리 나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에게서라도 배울 때는 고개 숙여 차근차근 배운다는 마음결이었다.

<2009 헌책축제>풍경

지난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는 <2009 헌책축제>가 펼쳐졌다. ‘헌책, 이야기를 나누다’와 ‘헌책, 향기를 나누다’ 둘로 나뉜 이 책잔치는 “상품으로 인식되는 책의 본질적인 가치를 들여다보고 오래된 것, 지나간 것, 없어져 가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새롭게 회복시키는 계기를 만들고자” 마련된 것이다. 더없이 좋은 생각이다. 왜 이만한 생각을 이제까지 안 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헌책, 향기를 나누다’에서는 ‘헌책방 나들이’, ‘책 나눔 장터’, ‘명사(名士)들의 헌책방’, ‘마임퍼포먼스―책 읽는 사람’, 이렇게 네 가지 행사를 마련했다. ‘헌책방 나들이’에서는 헌책방 소개와 함께 마음에 드는 헌책들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운이 좋으면 헌책방 주인에게 헌책에 얽힌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책 나눔 장터’는 헌책을 나누고자 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헌책을 자유롭게 판매하고 교환할 수 있는 난장마당으로, ‘명사들의 헌책방’은 명사와 문인, 저자들이 직접 자신의 소장 헌책을 기증하고 판매하는 행사로 꾸며졌으며 “수익금은 소외계층을 위해 쓴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마지막은 책 읽는 사람을 주제로 한 스테츄 마임(statue mime)조각상처럼 연기하는 마임이 장식했다.

그런데 이 네 가지가 제대로 펼쳐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임하는 사람이 늦게 와 나만 못 보지 않았을까 싶지만, 마임도 못 보았고, ‘헌책방 나들이’에서는 헌책방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나중에 단골 헌책방 일꾼들한테 물었더니, 한결같이 “주최 측에서 책만 보내 달라고 해서 보냈다”며 그렇게 먼 곳까지 갈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운이 좋으면 헌책방 주인과 만나서 헌책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없었던 것이었다. ‘책 나눔 장터’ 또한 열렸는지 안 열렸는지 알 길이 없었고 ‘명사들의 헌책방’은 몇 군데의 낡은 책 매대에 지나지 않았다.

‘헌책, 이야기를 나누다’에서는 <2009 헌책 회고展>을 마로니에공원 아르코미술관 2층에서 연다 하여 갔는데, 전시관 관계자 모두 한 목소리로 “그런 전시회가 있는 줄 모른다”고 하면서 “들어가려면 표를 끊고” 들어가라며 붙잡았다. 더구나 전시장 안내 글이나 화살표가 없어 한참 헤맨 끝에 전시장에 들어가 보니(전시회는 무료였다), 자원봉사자는 누가 들어오거나 말거나 먼산바라기일 뿐이었다. 어느 헌책방에 가 보아도 흔히 쌓여 있는 책을 대충 늘어놓고 전시회 이름을 붙여도 되는가, 하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 │www.bosubook.com


이만한 행사를 열기 위해서라면 여러 곳에서 지원을 받았을 테고, 여러 사람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또 여러 헌책방이 이름을 내걸었다. 그런데 정작 ‘서울에서 맨 처음으로 펼쳐진 헌책방 잔치’라고 홍보를 하면서도 ‘헌책방 잔치’라 할 만한 무슨 볼거리나 이야깃거리를 찾기는 어려웠다. 또 서울에서 열리는 헌책방 잔치인데 인천 배다리에 있는 헌책방 아벨서점은 왜 함께 해야 했을까? 서울 혜화동에 있는 헌책방은 왜 부르지 않았을까? 혜화동에서 걸어서 10분이면 닿는 청계천 헌책방은 왜 ‘모시지’ 않았을까? 아니, 참다운 뜻으로 헌책방 잔치를 서울에서 열겠다면 맨 먼저 청계천에서 판을 벌였어야 옳지 않았는지. 더욱이 이 행사에 함께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헌책방이 아니라 청소년 문화쉼터였다. 주최 측에서 건물을 지어주기도 한 이음아트는 혜화동에 자리하고 있는 인문예술 전문 새책방이다. 헌책방 잔치라고 이름을 내걸었지만 정작 서울에 있는 헌책방은 공씨책방, 문화당서점, 숨어있는 책 세 곳뿐이었는데, 주최 측에서는 세 군데 헌책방을 찾아가는 꼼꼼한 길 그림이나 발자취 혹은 이야기 하나도 행사마당에 마련해 놓지 않았다. 결국 <서울국제도서전>이나 <북쇼>, <와우북페스티벌>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했을 뿐더러, 서울 골목 구석구석 깃들어 있는 크고 작은 헌책방을 비롯해, 인터넷으로도 크게 꾸린 헌책방들을 널리 맞아들이지 못한 것은 <2009 헌책축제>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모습이었다.

<2009 헌책축제>를 둘러보며 헌책방 문화를 조용히 일구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 사람들은 힘과 슬기를 모아 지난 2004년부터 <보수동 헌책방골목 잔치>를 매년 9월 마지막 주에 펼치고 있다. 여느 때에도 사람들이 쏠쏠하지만, 책잔치를 벌일 때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사람들로 붐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신나고 재미나는 행사가 끊이지 않으며, 헌책방 일꾼과 책손이 모두 흐뭇하고 즐겁게 어울린다.

<2009 헌책축제> 풍경

2010년의 <헌책축제>가 궁금하다. 내년에도 올해와 똑같을지, 아니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헌책은 값싸게 팔기만 하면 되는 책이 아니다. 헌책에는 세월이 녹아 있고 사람들의 손때가 배어 있다. 사고파는 사람들 손때뿐 아니라 글쓴이들 손때까지 배어들어 먼 뒷날까지 우리에게 빛을 선사한다. 헌책방과 헌책과 책을 꾸밈없이 들여다보는 ‘헌책잔치’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이미지 제공_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