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영교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버스가 안동시내에 접어들면 커다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몇 해 전부터 각 지자체마다 홍보문구가 붙기 시작하더니만 안동은 ‘정신문화’로 자리를 굳힌 모양이다. 안동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명절연휴를 빼고 올해 딱 두 번 있다는 황금연휴를 맞아 떠난 길이었다. 코앞에 닥친 연휴에 마음이 급해 여행상품을 뒤지는데, 2만원도 안 되는 안동코스가 눈에 띠었다. 이게 웬 떡이야. 이른 아침부터 부랴부랴 서둘러 서울시청 앞에서 일곱 시 버스를 탔다. 정오쯤에나 도착한다니 멀기도 했다.

안동천을 따라 안동포박물관으로 향하던 중 한 여인상이 눈에 들어왔다. 여인상은 한복 차림에 머리를 쪽지고 미투리를 소중하게 가슴에 안고 있었다. 그 표정이 너무 애틋해 눈길이 더 머문다. 바로 그녀가 400년 전 애절한 사부곡(思夫曲)의 주인공 원이 엄마다. 1998년 안동 정상동 택지조성을 위해 분묘를 이장하던 중 고성(固城) 이씨 집안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는 이응태(李應台, 1556~1586)의 부인이 남편에게 쓴 마지막 편지 <원이 아버지에게>와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투리

400년 전 편지원문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로 시작되는 편지는 가족을 남겨둔 채 병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원이 엄마의 애절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죽은 남편의 시신 옆에는 이 편지와 함께 원이 엄마가 자신의 머리칼을 잘라 삼은 짚신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원이 엄마는 남편의 병이 날로 깊어가자 자기 머리카락과 삼 줄기로 미투리를 삼는 등 정성을 다해 쾌유를 기원했지만 끝내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안타까운 마음과 사모하는 정을 편지에 적어 관 속에 넣었던 것이다.

안동시는 이 애틋한 일화를 기려 미투리모양을 본뜬 월영교(月映橋)를 만들고, 원이 엄마를 모델로 한 ‘안동 아가페(agapé)상’도 세웠다. 또한 2007년에는 <내셔널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11월호에, 올해 3월에는 고고학 저널 <앤티쿼티Antiquity>에 실려 해외에 소개되기도 했다. 안동 한옥마을에는 지금도 여러 집성촌이 남아있고 병산서원이 병풍 같은 산자락 아래 유유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서 있다. 그곳 어딘가에 원이 엄마가 살아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면서 문득 요코하마(橫浜)의 ‘빨간 구두를 신은 소녀상(赤い靴はいてた女の子)’이 생각났다. “빨간 구두를 신고 있는 소녀, 외국인을 따라 가버렸네. 요코하마 부두에서 배를 타고 외국인을 따라 가버렸네. 지금은 파란 눈이 되어 외국인의 나라에 살고 있겠지. 빨간 구두 볼 때마다 생각나고 외국인 볼 때마다 생각나네.” 이 <빨간 구두(赤い靴)>는 일본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동요다. 1921년 노구치 우죠오(野口雨情, 1882~1945)가 작사했고 이듬해 모토오리 나가요(本居長世, 1885~1945)가 작곡했다. 이 동요에 실제 모델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1973년이 되어서였다. 당시 홋카이도오텔레비전(北海道テレビ) 기자였던 키쿠치 칸(菊池 寛, 1888~1948)소설가, 저널리스트이 5년여의 시간을 들여 시즈오카(静岡), 아오모리(青森), 이바라키(茨城), 홋카이도오, 요코하마, 도쿄(東京), 미국 등을 돌아다니며 이 주인공 소녀의 사연을 추적해 세상에 알렸다.

빨간구두 기념 초콜렛

빨간 구두 소녀로 알려져 있는 이와자키 키미(岩崎キミ)는 1902년 니혼다이라(日本平) 기슭의 한 마을, 지금의 시즈오카시 키요미즈(淸水)구에서 태어났다. 아기였을 때, 어머니를 따라 홋카이도오로 이사하지만, 재혼을 하게 된 어머니가 남편을 따라 험난한 개척농장으로 이주하게 되자 미국인 선교사 부부에게 입양된다. 세 살 때의 일이다. 그 후 그녀의 엄마는 노구치 우죠오를 만나 키미의 이야기를 전하게 되고, 노구치는 그 아기를 생각하며 시를 지었다. 선교사 부모를 따라 외국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거라는 어머니의 마음을 담아서. 하지만 키미는 미국행 배를 타지 못했다. 배를 타야할 때쯤 결핵에 걸려 머나먼 항해를 나설 만큼 건강이 좋지 못했다. 미국 선교사 부부는 결국 키미를 도쿄의 고아원으로 보내고 만다. 키미는 친어머니와도, 길러준 양부모와도 헤어져 아홉 살 나이에 홀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키미의 이야기는 키쿠치 칸에 의해 세상에 알려져 많은 일본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키미를 기억하고 있다. 요코하마 야마시타(山下)공원에는 1979년 야마모토 마사미치(山本正道)가 만든 ‘빨간 구두를 신은 소녀상’이 있다. 동요에 나오는 ‘요코하마 부두에서 배를 타고’를 계기로 일본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키미상이 아스라이 요코하마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지금도 키미를 기억하는 많은 일본인이 요코하마의 이 동상을 찾아간다. 그밖에도 거리 구석구석 보도에도, 지하철역 벽면에도 키미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올해 요코하마 개항 150주년을 기념해 빨간 구두를 신은 인형을 한정판매하고 있기도 하다.

야마시다 공원의 빨간구두 상

도시가 이야기를 입고 있다. 이야기는 차별화된 도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어필한다. 진도하면 충직한 진돗개 백구를 기억하듯이, 나가사키(長崎)하면 나비부인의 가슴 아픈 사랑을 기억하듯이. 그 만큼 이야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안동은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삭막하고 어색한 문구가 아니라 애절한 사부곡의 주인공 원이 엄마의 도시로 남을 것이다. 인천은 어떨까. 인천은 많은 콘텐츠를 가지고 있는 도시다. 자장면, 개항, 차이나타운과 같은 ‘팩트(fact)’들 속에 도시 이미지를 살리고 사람들의 가슴을 두드릴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 언젠가 인천도 이야기의 도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보았다.

월영교 관련 이미지 제공_ 안동축제관광조직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