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학 아트로드 내 전시물

‘오동나무 꽃으로 불 밝힌 이곳 첫 여름이 그립지 아니한가?’ 정지용, 「오월소식(五月消息)」 하고 당신이 노래했던 5월의 오후입니다. 선생님의 이름으로 치러지는 행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생가에서, 옥천의 거리에서, 회관에서, 공연장에서 분주하던 날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시가 화려한 무대에서 낭송되고, 선생님 이름으로 주어진 문학상 시상식이 있었고, 선생님의 이름으로 치러지는 백일장이 있었고, 선생님의 시를 좀 더 맛있게 나누어 먹기 위하여 교수와 평론가들이 모여 문학 포럼을 열고, 모인 사람들을 위하여 상인들이 천막을 치고 꼬치구이가 익고 막걸리가 엎질러지며, 북소리,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야시장에서 여장 남자의 과장된 몸짓이 끈적이던 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번다한 일들의 여운이 채 가시진 않은 시간
저는 어느 낯선 길에 서 있습니다. 옥천에 사는 저에게 이 길은 낯선 길은 아니지만, 거리의 식당들이 당신의 시어로 간판을 고쳐 달고, 정지용(鄭芝溶, 1902~1950)문학상 수상자들의 시와 선생님의 시가 새겨진 조형물들이 거기 놓이는 순간, 그곳은 또 다른 표정으로 저를 맞이합니다. 이름하여 ‘향수 30리’. 10km가 넘는 길이의 도로를 조형적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이 프로젝트는 또 다른 세계로 방문자를 안내합니다. 대전과 청주 사이에 흐르던 금강을 막아 강이자 호수가 되어버린 대청호, 그 잔잔한 물결을 아래로 두고 숲 사이에 길은 뻗어갑니다.

과수원 파크, 풍랑몽 짬뽕, 호수 식당 등등. 당신의 생가가 있는 구읍에서 대청비치랜드까지에 있는 몇몇 상가의 간판을 바꾸는 정도의 변화, 이것은 크게 새롭다 할 것이 없습니다. 새로운 것은 끝에 있었습니다.

 ‘향수 30리’ 프로젝트의 핵심인 대청비치랜드 주변. ‘멋진 신세계’로 명명된 이 공간에 ‘시문학 광장’과 ‘놀이 광장’, 그리고 1km 안팎의 호숫가에 시문학 아트로드(詩文學 Art Road)인 ‘일곱 걸음 산책로’가 있습니다. 두 개의 광장은 유리를 주 소재로 사용한 건축 조형물과 함께 있고, 산책로 주변엔 20여 개의 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박두진, 김광균, 오세영, 김지하, 정호승, 박정만, 유안진, 강은교, 김초혜 등 정지용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이 있습니다. 시가 돌과 유리와 철 그리고 조각 작품에 적혀있어, 시는 읽기 전에 이미 예술적 감상의 대상이 되어 거기 놓여 있습니다. 돌에 새긴 것도 이미 전통적인 시비 제작 방식에서는 벗어나 있습니다.

이 낯선 조형 언어 앞에 저는 잠시 해석의 실마리를 찾느라 두리번거립니다. 낯섦은 새로움입니다. 조형물의 새로움이자 조형언어의 새로움. 저는 새로운 언어의 길에 서 있습니다. 당신이 한 생애 동안 다듬어 나가고자 했던 언어는 이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언어로 다시 태어나길 요구하는 듯합니다. 해석 이전에 오는 느낌을 버릴 수 없지만 해석의 욕구 또한 버릴 수 없는 유혹입니다. 향수 30리의 설계자는 이 작업을 커뮤니티 디자인이라고 말합니다.

커뮤니티 디자이너 이상환!
그는 새로운 방식의 언어로 저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낯익은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어색하고 불편한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시인이 시로 사람들과 소통하였다면 디자이너는 조형으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시인이 시어의 설계자였다면 디자이너는 조형언어의 설계자인 셈입니다. 조형 또한 논리보다 감성으로 소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시인과 동반자입니다. 그가 가진 조형 언어는 흔히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시대에 유행하기 시작한 새로운 소통 형식의 한 갈래인 듯합니다. 30리에 가까운 자연 공간에 인공적 행위를 가하여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느끼게’하고 ‘생각하게’하고 ‘말하게’합니다. 자연과 교감하되 자연에 묻히는 것이 되지 않아야 할 것이고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디자이너는 이것을 고려하고 있었겠지요. 자연과 인공, 무위(無爲)와 유위(有爲), 예술은 항상 그 경계에 피는 꽃인 듯합니다. 시가 그렇고, 음악이 그렇고, 지금 제 앞에 펼쳐지는 공공예술이 그러합니다. 일곱 개의 다리를 거쳐 일주문 금강문을 지나 대웅전의 부처가 있는 수미산에 이르는 과정을 걷게 함으로써, 절(寺)의 설계자가 수행자를 자연스럽게 불교적 우주관과 불교적 가치에 젖게 하듯이 그는 그 공간을 ‘정지용 시’의 세계로 구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길을 따라갑니다
안내 간판부터 메타포(metaphor)를 가진 조형물입니다. 그것은 곡절 많은 당신의 삶처럼 휘어지고 꺾인 형상입니다. 입구에 세워진, 한 장의 종이를 펼친 것 같은 지붕 아래의 유리 카페는 방문자의 서정을 ‘파닥’이게 합니다. 3면을 몽땅 유리창으로 세우고 유리벽에 새겨진 하얀 글씨의 ‘유리창’은 짐짓 당신이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던 <유리창> 2연 <유리창>과는 다른 시정의 세계로 나를 이끕니다. 당신은 ‘모단’이라고 했고 지금 우리는 ‘모던’이라고 하는 그 어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호수를 따라 내려가니 몇 걸음 옮길만한 자리마다 마치 먼 길에 나선 수행자가 잠시 명상에라도 잠긴 듯 돌과, 나무와, 유리 그리고 철에 시를 새긴 조형물이 있습니다.

설계자는 아마도 많은 상념에 젖어 있었던 듯합니다
별의 이미지에서 빌려온 빨강색, 새로운 세계의 화합을 상징하는 노란색, 검은색과 흰색, 인공 재료와 자연 재료의 혼합, 수직과 수평, 생물과 무생물, 고정된 것과 움직이는 것, 평면과 입체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시는 새로운 옷을 입고 펼쳐집니다. 낡은 의자의 ‘낡음’을 활용하면서 거기에 슬며시 섞어놓은 ‘새것’, 딱딱한 것과 부드러움의 대비, 변화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병치. 문자 언어인 시를 시각적, 촉각적, 청각적 언어로 만들어내려는 설계자의 의도는 감추어진 듯 드러날 듯 거기 있습니다. 때로는 강한 의문을 던져 소통의 욕구를 자극합니다. 더구나 조형 언어가 야외 공간에 놓일 때 그 배경은 사계절과 밤낮과 하루하루가 다른 변화를 일으키는 곳이 아니던가요. 하물며 날씨에 따라 물안개의 변화가 잦은 호숫가임에랴. 그는 때로 평지를 언덕으로 만들고, 호수와 산이 보이는 구릉에 작은 공연장을 만들고, 나무 계단을 세우면서 거기 자라고 있던 나무를 자르지 않고 그냥 계단 사이, 발이 스치는 곳에 자라게 하였습니다. 유리창 틀을 호숫가에 세우고 유리에 시를 새긴 작품이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넘나들며 거기 서 있습니다. 언덕과 물, 나무, 가까이 다가와 있는 산, 무덤, 풀밭, 수몰된 마을의 지도. 옥천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모두 고려하여 그것을 녹이고 섞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내는 작업. ‘멋진 신세계’의 설계가 그리 녹록치 않은 작업이었음을 실감합니다.

처음 가졌던 불편함은 어쩌면 난해시(難解詩)를 처음 대한 독자의 당혹감과도 비슷한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형 언어도 오감으로 느껴지는 것 못지않게 해석을 위한 학습과 준비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1시간 30분이 넘는 시간을 서성이는 동안 그대로 자연 속에 던져지는 몸의 느낌이 좋았습니다. 예술적 감성이 아니더라도 마음 한 편에 잠들어 있던 시정을 자극하는 공간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어쩌면 선생님이 그렸던 농경사회의 풍경, 일본을 오가며 만났던 바다의 이미지, 일제 말기에 남기신 산을 소재로 한 시와 기행산문의 맛 그리고 삶의 이런저런 풍경들이 섞인 듯, 호숫가의 숲길을 거닐며 문득문득 나타나는 시를 읽는 순간의 상념과 사유는 유익하고 맛있습니다. 조형언어에 감추어진 메타포를 읽어내려는 전전긍긍 또한 낯선 방문자에게는 즐거운 고통입니다.

 처음 이 길에 산책을 나설 때 했던 ‘그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새로운 시적 영감에 젖을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떤 영감의 실마리라도 하나 잡아올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카페 프란츠’에서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시가 아니어도 좋겠고, 예술적 감흥이 아니어도 좋겠다’로 바꾸어 봅니다. 당신에게는 비극이었던 시 <카페 프란스> 1926년 정지용의 등단 작품, 이국의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지식인의 외로움과 슬픔을 노래한 시를 뒤로 하고 앉아 호수와 나무와 산과 풀밭이 고요히 펼쳐지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가슴에 젖어드는 감흥이 싫지 않습니다. 시인은 시인의 길을 가고 끝내 쓸쓸히 사라졌지만 시는 남아 이렇게 새로운 조형 언어와 만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신이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사라진 비극, 그리고 근 30년 동안 분단 시대의 미아가 되어 잊혔었던 사실과 지금 우리가 만드는 이 ‘멋진 신세계’가 아이러니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당신이 살다간 시대의 암울함을 생각하면 정말 이제 우리는 ‘멋진 신세계’를 꿈꾸어야 하지 않을는지요. 올더스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 1894~1963)가 말한 기계들의 ‘멋진 신세계’도 사실은 인간의 ‘멋진 신세계’를 꿈꾼 것이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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