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문나미(Nami Mun)는 인생의 진리가 더 없이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소설의 화자인 십대 소녀 준(Joon)이 겪는 고난과 그 속에서 그녀가 느끼는 복잡다단한 감정들은 놀라우리만치 깔끔한 문장들로 전달된다. 절망적인 상황을 다루는 문장이 이리 담담해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문나미의 문장들은 짧고 간결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전달하는 어린 소녀의 갖가지 감정들은 일일이 설명되지 않음에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탁월한 문장들 때문에, 책장이 막힘없이 넘어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것은 오히려 쉽지 않다. 문학작품을 읽는 매력 중 하나는 나와 전혀 다른 인물들을 간접 경험하고 그 속에서 보편성을 찾아내는 것일 텐데 어린 준이 겪는 역경은 버겁고 거칠어서 읽는 내내 아프기만 했다. 세상은 그녀가 바라는 한 조각 지붕 아래 몸을 누일 수 있는 “모텔에서의 하룻밤”(42면)조차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소리 질러 울지도, 하소연하거나 분해하지도 않는다. 마치 당연한 일을 겪고 있다는 듯 담담하다. 심지어 몇 차례의 자살시도조차도.

ⓒRiverhead Hardcover │ 2008

어려서 뉴욕으로 이민 간 한국인 작가의 작품이라기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민 2세대들의 정체성 혼란과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 완전한 한국인도 완전한 미국인도 아닌 데서 비롯하는 방황 등 외국인 입장에서 보면 신선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겠지만, 성공한 한국계 이민자라면 덮어놓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왔던 한국사회에서는 진부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이 진부한 소재를 얼마나 신선하게 써나갈지가 관건이라는 생각으로 펼쳐든 『마일즈 프롬 노웨어Miles from Nowhere』는 나의 오만한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담백하고 신선했으며, 독창적이었다. 그리고 주인공 준은 상처를 껴안고 성장하면서 태연하게도 희망까지 곁들여 보여주고 있었다.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 그렇게 유난 떨 일은 아니라는 듯이.

미국이 개방적이라지만, 미국에 이민 와서 사는 한국인들이 본토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보다 보수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사회는 빠르게 변하며 가치관도 함께 변하는데, 이민자들은 이민 올 당시의 가치관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은 준이 아니라 오히려 준의 부모이다. 특히 준의 아버지가 그렇다. 준에게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특별히 강조할 것도, 애써 부정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준에겐 그 사실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급한 독자가 작가의 출신성분만 보고 지레짐작할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준은 자신을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좁은 틀에 가두지 않는다. 그녀는 누구나 보편적으로 겪는 사랑과 믿음의 문제로 고민한다. 그녀는 비록 부모에게 버림받고 집을 나와 약물중독과 노숙생활을 거치며 ‘평범치 않은’ 삶을 살아가지만, 외로움과 고독, 집착과 아픔을 통한 그녀의 성숙에 독자들은 공감한다. 반면 준의 아버지는 이민자들이 미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엇나가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한국에서부터 짊어지고 온 가부장적인 권위를 벗어버리지 못한다. 준은 그 피해자다. 어린 시절 준은 아버지가 말하는데 웃었다는 이유로 놀이터 철봉에 매달린 채 친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허리띠로 맞기도 했다. “아내와 딸은 아버지를 비웃어서는 안 되기 때문”(200면)이다. 준은 반항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다른 곳만 보고 있었다. 이후 집을 떠나 길 위에 선 준이 무수한 모욕과 수치심에 격하게 반응하지 않은 것은 어렸을 때부터 느낀 수치심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무관심, 즉 “모두들 똑바로 앞만 바라볼 뿐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는 모습들”(201면)이 더욱 무서웠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한국인 이민자들의 고통과 혼란을 보여주지만 아이가 겪는 상처와 수치심에 초점을 맞추어 더 큰 보편성을 추구한다.
어린 준이 집을 나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볼 수 있다. 상처를 보듬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자를 갉아먹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준의 충실하지 못한 동거인 블루(Blue)나 베니(Benny)처럼 서로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사이도 있다. 준이 거리에서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은 모두 준과 같이 버림받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미성년자인 어린 준을 호스티스 바에 두말없이 들이는 고용주가 있는가 하면 지하철에서 신문 파는 준에게 모멸감을 주는 여자도 있고 동정심은 표하되 샤워하는 그녀에게 목욕타월 대신 부엌에서 쓰는 수세미를 내미는 아이 엄마도 있다. 그녀는 나이보다 훨씬 성숙하게 느껴지지만 작품 막바지에서도 그녀는 겨우 열여덟 살이 되었을 뿐이다. 열세 살에 집을 나와 5년이라는 시간을 거리에서 떠돌며 그녀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모두 보아 버린 듯하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혼재한 뉴욕이라는 배경 역시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의 이기적인 측면을 한층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어린 준이 겪는 고난 앞에 사람들은 애정과 관심보다는 푼돈을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얄팍한 양심만을 달래려 한다. 하지만 모두 안다. 뉴욕이 아니라 다른 어느 곳이었어도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준은 그만한 상처를 똑같이 받았을 것이다. 그녀의 시련에 읽는 사람의 마음은 불편해진다. 왜냐하면 독자 자신이 준이 되는 동시에 준을 착취하는 가해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Nami Mun ⓒBrigitte Sire

이런 세상에 대항하기에는 그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연약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마냥 절망적이지만은 않은 까닭은 연약한 준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당한 사회에 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싼 방값을 요구하는 모텔 주인에게 그나마 가진 푼돈마저 부당하게 빼앗긴 준은 안온한 잠자리를 찾는 대신 모두에게 학대받는 트랜스젠더 라나(Lana)와 함께 길거리에서 자는 것을 택한다. 모두가 혼자인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가 혼자서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준은 놀랍다. 그녀는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도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 집과 엄마를 떠나서 가게의 처마 아래 홈리스(homeless) 소녀가 마치 아무라도 손을 댈 수 있는 따뜻한 난로라도 되는 듯 여기는 사람들 옆에서 잤어. 보호소에서도, 버려진 빌딩에서도 잤어. 두들겨 맞기도 했어. 그리고 매일 새로운 날이 시작될 때면 난 여전히 나만의 시작을 선택할 수 있다고, 과거를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어.”(40면)

준의 이야기는 미국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겪는 어려움을 다루는 동시에 어느 사회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혼란과 갈등, 용서, 그리고 성장을 그린 이야기다. 그녀는 삶의 나락에서 모든 불행의 시초가 된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동시에 그의 행동과 감정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준은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가면서 성숙해간다. 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소설의 큰 축이다. 그들은 자주 언급되진 않지만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않지만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무수한 사람을 만나 많은 사건을 겪으면서 준의 생각은 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로 돌아간다. “여기에서 내 아버지가 겪었던 분투가 나에게 분명해졌다. 나라는 새롭고 낯설었다. 그것이 아버지를 정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술은 같았고, 아버지의 버릇도 같았다. 그는 단지 익숙한 것들을 향해 나아갔을 뿐이다. 아버지에게 그가 누구이고 그가 왜 거기 있는지 질문하지 않는 음주와 속임수 같은 것들 말이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를 심판할 수 있을까.”(202면) 아버지를 증오해야할 셀 수 없이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점점 낯선 땅에 적응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조금씩 이해한다.

준이 ‘새로운 시작’을 진정으로 선택하는 계기는 나중에 찾아온다. 그 계기는 어머니의 부음을 접한 뒤 우연히 지하철에서 만난 아버지가 연락처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나버린 것도 아니고, 직업소개소의 냉정한 플루킨저(Flukinjer)의 마음을 움직여 점심 배달원으로 취직하게 된 것도 아니다. 계기는 어머니를 버린 자신에 대한 용서였다. 준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어머니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고 집을 나왔지만 어머니를 조금씩 이해하며 그런 어머니를 자기가 버렸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준이 자신의 죄책감을 직시하게 된 것은 어렸을 적의 이웃 맥커먼(McCommon)을 만나고 나서다. 그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아내를 헌신적으로 간호했지만 아내로부터 이혼을 요구받고 헤어진다. 결혼한 상태로 죽기 싫다는 이유였다. 그는 여전히 아내를 잊지 못해 슬퍼하는데, 준에게는 그 슬픔조차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어머니를 위해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가장 필요로 할 때 그녀를 떠났어. 나는 어머니를 위해 슬퍼할 수도 없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자격이 없어서야. 내가 가진 것은 죄책감뿐이야. 그 죄책감은 자기만의 형체와 냄새를 가지고 내 몸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나와 함께 자고, 놀고, 걷겠지.”(285면) 하지만 맥커먼의 슬픔은 준이 스스로를 용서하기 위해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를 제시해준다. “심지어 그녀의 아팠던 모습까지도 그립다고 그가 말했고, 그것이 나에게는 내가 나의 어머니에 대해서 끝까지 매달릴 수 있는 진실, 시작할 수 있는 지점으로 여겨졌다.”(286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증오와 섭섭함으로 시작되었던 준의 역경은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 성숙하고, 종국에는 스스로를 용서하는 길을 찾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몇 년 동안 준은 다른 이들이 일생 동안 배울 많은 것들을 배우며 훌쩍 자라난다. 소설은 마무리되었지만 준은 다시 시작할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끝은 오지 않는다. 살아있는 한은 끝없이 새로운 시작일 따름이다. 그 시작을 어떻게 찾고 어떻게 선택하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어린 준이 선택한 시작은 용서였다. 용서하기에 앞서 이해하는 길고 긴 과정이 있었다. 책을 덮은 지금도 놀라울 뿐이다. 그것은 용서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자신 안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