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태영

｢무정｣ 8판(1938년), 한국근대문학관 소장

춘원 이광수의 ｢무정｣은 가장 유명한 근대소설의 하나로 우리 소설 문학의 고전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문학에 관심이 없거나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광수란 사람과 ｢무정｣이란 소설 자체는 대개들 알고 있다. ｢무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창작 장편소설로 1917년 1월부터 약 반년 간 신문에 연재된 작품이다. 현대 한국인 대부분이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 작품은 100년 전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사실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와 여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무정｣이 발표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한 세기 전이다. 이때는 일제에 의해 식민지로 강제 편입된 지 7년이 지난 해로 일제는 식민지 지배의 기초가 자리 잡혔다고 나름 ‘자부’하고 있던 시기였다. 1910년대 중후반, 작가 춘원 이광수는 당시 청년층에게 현재의 아이돌 연예인 못지않은 대스타였다. 이광수가 청년들의 인기를 독점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이광수 소설의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이 모두 청년들이라는 점이다.

｢무정｣의 첫 장면을 보자. 소설 속 시간과 장소는 1916년 6월 오후 3시 이후, 서울 안국동 사거리이다. 수줍음이 많고 우유부단하지만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경성학교’ 영어교사 이형식은 평양감사 출신으로 기독교 장로이자 이름난 부자인 김장로의 딸 김선형에게 ‘영어과외 알바’를 위해 김장로 집으로 가는 중이다. 형식에게 영어 과외를 받는 김선형은 양반 출신 아버지와 평양 기생 출신 어머니를 둔 ‘정신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미녀로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다. 잠시 뒤 가르칠 여제자와 다소 ‘야한’ 상상을 하며 길을 걷고 있는 형식에게 신문기자이자 친구인 신우선이 ‘대팻밥모자’를 쓰고 나타나 말을 건다. 신우선은 한학을 공부했지만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말하는 것을 즐기며 근무 중인 대낮에도 술을 마시는 경박한 한량 청년이다. 신우선은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의 친형인 심대섭을 모델로 한 인물이다. 심대섭이 휘문학교 1회 졸업생이자 ｢무정｣이 연재되던 당시 『매일신보』의 실제 기자였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주인공 형식이 재직 중인 경성학교는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휘문학교(현 휘문고등학교)임이 밝혀진 바 있다. 이 외에 기생이긴 하지만 청년들과 같은 또래이자 나중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영채와 당시로선 매우 진보적인 여성관을 가진 동경유학생 병욱 등 ｢무정｣의 핵심 등장인물들은 모두 청년들이다. 이렇듯 ｢무정｣은 1910년대 현실에 대한 풍부한 당대성과 이 속에서 매우 사실적으로 활동하는 청년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실제 청년 독자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여 커다란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무정｣ 1회 연재분

또 한 가지 ｢무정｣의 성공 요인은 이 작품이 당대 청년들의 고민과 절박한 문제들을 그들의 입장에서 속 시원하게 대변했다는 점이다. 고등학교 국어나 문학 시간에 지겹게 외웠던 대로 ｢무정｣은 남녀차별 반대나 여자교육을 비롯한 교육에 대한 강조 등 여러 근대적 가치를 주장하는 강한 계몽성이 담긴 작품이다. ｢무정｣의 계몽성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옛(舊) 인습을 타파하고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새(新) 가치를 추구하자는 것이 된다. 이때 후자의 문제는 곧 당대 청년들의 입장이기도 했다. 100년 전 청년들의 가장 심각한 고민과 문제는 집안 어른들의 강제 조혼에서 벗어나는 것과 서당이나 한학 교육이 아닌 새로운 학교에서 근대적 학문을 배우고 싶다는 향학열이었다. ｢무정｣은 이러한 청년들의 고민과 문제를 그들의 입장에서 강력하게 피력한 작품이다. 선형의 아버지 김장로와 병욱과 병국의 아버지로 대표되는 구세대 및 옛 가치관에 대한 작가 이광수와 ｢무정｣의 입장은 명확하다. 여자교육과 아들의 회사 경영, 자식의 자유연애에 반대하고 자녀들을 철저한 자신의 부속물로 취급하는 옛 세대나 가치관에 대해 ｢무정｣은 철저하게 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무정｣은 오히려 반대를 넘어 불쌍한 대상, 즉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기까지 한다. 시대가 변하고 있는데도 옛 것만 고수하는 구세대는 ‘불쌍한 인종’이라는 것이 이광수와 ｢무정｣의 논리이다. 이 같은 입장과 논리는 ｢무정｣의 후속작 ｢개척자｣에서 한층 직설적이고 과격하게 나타난다. 새로운 가치관, 즉 청년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에서 구세대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격렬히 저항할 것을 촉구하게 된다.

입시와 취업 등의 문제로 인해 현재 젊은이들의 연애와 결혼전선이 결코 밝지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10대와 20대 청년들에게 있어 연애와 결혼은 정말 중요하고 또 때로는 절박한 문제인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청년남녀가 서로 좋은 감정을 갖고 만나 사귀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럽고 평범한 이 ‘풍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젊은 남녀가 부모의 뜻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이성을 만나 연애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무정｣은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작품이다.

｢무정｣은 어떻게 보면 연애소설이다. 이형식의 가장 큰 고민은 부와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선형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과거 은인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영채를 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박영채가 괴로워하는 것도 마음속으로 정해둔 남자가 있는데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정조를 잃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갖춘 김선형도 한 인간이나 한 여자로서의 고민 또는 자각은 남편 형식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질투에서 비롯된다.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의 고민이 모두 연애와 사랑으로 수렴되는 꼴인데, 이에 대한 이광수와 ｢무정｣의 입장은 이미 정해져 있다. 과거와 같이 자식은 더 이상 부모의 종속물이 아니라는 것과 남녀의 결혼은 당사자의 의사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광수는 이를 전기의 음극과 양극이 접촉했을 때의 반응과 같이 하늘이 만물을 만들 때 이미 정해놓은 일이라고 하여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고 있다.

이광수(1919년)

더구나 ｢무정｣에는 당시 문학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성적 묘사와 관련된 장면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형식이 여학생과 마주앉아 영어를 가르치면서 입김이 마주치며 책상 아래에서 무릎이 서로 닿는 상상을 하는 것이나 더운 여름날 선형의 땀에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장면에 대한 묘사와 이로부터 향기와 쾌감을 느낀다는 진술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영채와 월화 사이에서 벌어지는 동성애에 대한 파격적인 묘사 등 ｢무정｣에는 당시의 상식을 뛰어넘는 성애 장면이 등장한다. 당시 고등학교를 다닌 어느 문인의 회고에 의하면, ‘사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울렁거렸으며, ｢무정｣을 읽으며 여러 번 얼굴이 홧홧하게 뜨거워졌다고 한다.

지금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이러한 점이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이라는 데 이 작품이 가진 문제점이 있다. ｢무정｣뿐만 아니라 1910년대 이광수를 관통하는 주제는 사실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 본인이 옛 결혼 방식의 당사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시기 이광수는 자유연애결혼이 근본적으로 봉쇄되는 당사자의 의사를 무시한 어른들에 의한 강제적 조혼에 격렬하게 저항한다. 부모에 의한 강제적 조혼은 ‘야합(野合)’이며,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한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것이 이광수의 핵심 생각이다. 연애와 사랑에 대한 이러한 이광수의 논지와 앞에서 본 당시 고교생의 반응은 당시가 지금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시대였음을 말해준다. 일제에 의한 왜곡된 형태이긴 하지만 여러 방면에서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귀족․양반’에 대한 신문의 질타가 연일 이어졌던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년들이 이광수의 ｢무정｣을 비롯한 그의 작품에 열광적 지지를 보낸 것은 이광수가 청년들의 심경을 그대로 대변했기 때문이다. 당시 청년들에게 있어 ｢무정｣을 비롯한 이광수의 작품을 대여섯 번 읽는 일은 결코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이는 ｢무정｣이 일제강점기 내내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게 되는 결정적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이광수와 ｢무정｣이 사회 전 계층에서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100년 전 ｢무정｣이 일으킨 반향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청년들의 대대적 환영을 받는 한편, ｢무정｣에서 ‘불쌍한 인종’이라 명명된 이른바 옛 세대들로부터는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문필활동을 하는 동안 어려 차례 필화(筆禍) 사건을 겪었는데, 그 첫 번째가 ｢무정｣과 ｢개척자｣ 등 이 시기 집필한 글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친일 귀족이나 사회유력자들로 이루어진 중추원에서는 조선총독부와 경무총감부(현 경찰청) 등에 이광수의 글을 금지해달라는 공식 항의문을 보냈고, 경학원(현 성균관)에서는 이광수를 공격하는 연설회가 개최되었다. 또한 당시 서울에 하나밖에 없었던 국공립 고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이광수의 글을 읽지 말라는 훈시가 내려지기도 했다.

이광수와 ｢무정｣이 일으킨 사회적 파문은 뚜렷한 대조를 이루긴 하지만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청년들로부터는 ‘목마른 끝에 마시는 청량음료’, 기성세대로부터는 ‘아비 없는 후레자식’․‘불상놈’이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기 때문이다. ｢무정｣은 연애와 결혼 등 자신의 인생이 걸린 문제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결정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청년들 사이에 확산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작품이다. 이는 부모세대, 즉 기성세대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일종의 ‘반역’이기도 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 당연시되던 100년 전 현실에서 기존 가치에 대한 반역의 기치를 높이 든 이광수는 김동인의 말한 그대로 ‘용감한 돈키호테’였던 것이다. 따라서 ｢무정｣은 오늘날 연애와 사랑, 결혼, 행복한 가정의 기원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회사적 의미를 가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