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ador USA │ 2002

한국계 아버지, 스코틀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의 작가 알렉산더 지 (Alexander Chee)의 처녀 장편 『에딘버러Edinburgh』(2002). 이 소설은 동일한 가족적 배경을 가진 주인공 애피어스 지(Aphias Zhe: 그는 작중에서 주로 ‘피’Fee라는 애칭으로 불린다)의 사춘기에서 20대 후반에 이르는 기간의 경험을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문체로 다룬다. 동성애자이면서 성추행의 피해자였던 주인공을 내세운 이 ‘성장소설’은 시적 문체와 대담한 구상, 동성애와 트라우마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돋보였다. 주류 평단과 아시아계 문단, 그리고 동성애자들의 공동체 등에서 주는 상들을 고루 수상하면서 인정과 찬사를 받았고, 미국의 저명한 출판계 전문잡지인 <퍼블리셔즈 위클리Publishers Weekly>지가 뽑은 올해 최고의 책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글은 그 같은 호평과 더불어, 작가와 주인공이 한국계라는 사실로 우리에게 더욱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된 작품 『에딘버러』에 대한 비평적 단상이다.

먼저 작품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해 보자. 미국 메인주 포틀랜드 근교의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주인공 피는 온유한 성격의 해양학자인 아버지와 역시 이해심 많고 상냥한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장남으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하나씩 있다. 아버지의 부모인 한국계 조부모도 바깥채이지만 한 집에서 살고 있다. 책벌레로 공부도 잘하고 음악, 미술, 운동 등에 두루 조예가 있는 피는 사춘기 동안에는 합창단, 수영반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미국 동부의 명문대학인 웨슬리언 대학에서 도자기학을 전공한다. 그 뒤 도자기 공예가 활동을 거쳐 메인 주의 사립고등학교에서 수영 코치 및 미술교사로 자리 잡는다. 이렇듯 피의 삶은 순탄하고 행복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는 소아성애자인 합창단 지휘자 ‘빅 에릭(Big Eric)’에게 성추행을 당했으며 그 자신이 동성애자이기도 하다. 빅 에릭은 결국 법의 처벌을 받지만, 피가 짝사랑했던 단짝 친구 피터(Peter)나, 피를 짝사랑하며 사춘기 내내 성관계를 맺어 왔던 자크는 자살로 사춘기를 마감한다. 피 또한 그들에 대한 부채의식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살 기도와 그 충동으로 점철된 청소년기를 보낸다.

교사로 부임한 뒤 오랜 동성애 파트너인 브라이디와 언약식(법적으로 결혼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결혼 대신 동성애자들이 선택하는 식)까지 치르고 안정된 삶으로 접어들지만, 자신을 짝사랑하던 고등학생 워든(Warden)과 성관계를 맺는다. 작품은 워든이 다름 아닌 빅 에릭의 아들이라는 것을 피가 알게 되고, 또한 피가 빅 에릭의 성추행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발견한 워든이 빅 에릭을 살해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 『에딘버러』는 ‘한국계 미국인의 작품’이라는 수식어에서 독자가 기대할지도 모르는 인종차별이라든가 문화적 격차 같은 문제를 포괄하는 ‘정체의 정치학(identity politics)’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주인공이 한국계라는 사실은 작품에서 물론 자주 언급된다. 피가 아시아인과 유럽인의 특징이 섞인 생김새 때문에 그는 어디를 가나 부모의 혈통을 묻는 사람들을 만난다. 할아버지는 한국의 풍습과 전설을 피에게 연결하는 고리다. 할아버지에 따르면, 언젠가 조상 중 한 사람이 다마모 부인(Lady Tamao)이라는 이름의, 둔갑한 여우와 결혼을 한 일이 있으며, 그 여우가 남편이 죽었을 때 스스로 불길에 목숨을 던짐으로써 여우의 전통을 끊었다고 한다. 또 할아버지는 일본말을 강요하고 소녀들을 위안부로 끌어간 일본 제국주의와 그 피해자였던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가르쳐준다. 하지만 이 같은 한국적 요소들은 그 자체보다는 주인공의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작중(作中)에서 정체의 정치학과 관련된 부분도 언급되지만 그것은 부정을 위한 것이다. 가령 대학시절 피가 금발의 백인 청년들과 자주 사랑에 빠지자 친구들은 “백인의 힘과 사랑에 빠져있다 (107면)”고 말하는데 이러한 언급은 그 해석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 문장에 이어 피는 “이런 이유 때문만으로도 나는 캠퍼스의 정치적인 생활과 조심스럽게 거리를 유지했다(107면)”고 말한다. 피의 이처럼 탈정치적인 면모는 단순히 인종문제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성과 계급 등 다른 차이의 지표들도 아우른다. 그는 동성애자들의 권익운동의 중심지인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동안에도 “가끔씩 정치적 시위에 참여하는 것 외에는 조용하게, 비교적 고립적으로 살았다 (172면)”고 말하고 있다. 인종이든 계급이든 성이든 정치적인 면은 이 작품에서는 주변적인 요소에 머무른다. 

Alexander Chee

그렇다면 이 작품의 중심 요소는 무엇인가? 줄거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주인공의 성적인 성장과 긴밀하게 엇물려 있는 성추행의 경험이다. 가해자인 빅 에릭은 단순한 무력이 아니라, 아동의 권리니 나체주의 같은 이론을 설파해 어린 소년들의 자발적 동의나 순응을 이끌어낸다. 그랬기 때문에 희생자가 열두 명이 되도록 성추행이 계속될 수 있었고, 이로 인한 피해자들의 상처와 후유증이 더욱 깊다. 스스로 동성애자가 아니면서 피보다 나중에 희생되었던 피터의 경우 성추행의 고통 외에도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한 피를 원망한다. 스스로 동성애자이면서 최초의 희생자 그룹에 속했던 피는 자신이 빅 에릭에 협력하거나 방조함으로써 피터나 다른 소년들의 희생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너도 거기 있었다”고 비난하기도 하고 “사실을 (남들에게) 말하겠다”고 협박하던 피터에게 “제발 말하지 말아 달라”고 피는 부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피는 자신 또한 빅 에릭과 같은 소아성애자였기 때문에 무의식중에라도 그에게 협조하거나 성추행을 방조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피가 피터를 동성애적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았고, 사춘기 내내 또 다른 성추행 피해자인 자크와 동성애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이 피에게는 자신도 빅 에릭처럼 소아성애자라는 확실한 증거다. 그리고 스물아홉 살의 피가 열일곱 살 소년이자 제자인 워든에게 매혹되고 급기야는 성적 관계까지 맺는 결말은 “그는 이제 우리 안에 숨어있다”라는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해준다. 

저자인 알렉산더 지는 “충분히 한국적인”이라는 제목으로 <게르니카Guernica Magazine> 2008년 6월호에 발표한 글에서 작가로서 자신의 “유일한 미학적 이상”은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실제 모습만큼 복합적인 이야기를 쓰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에딘버러』는 많은 면에서 작가의 그 같은 미학적 이상에 충실한 작품이다. 때로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작품의 곳곳에서 피는 한국인이면서도 한국말보다 일어를 먼저 배워야 했고, 일어로 사고하는 것이 더 편한 할아버지를 보며 “적의 흔적을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사고하는 방식 그 자체 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게 생각하는데, 작품은 바로 그처럼 피해자의 내부에 깊숙이 자리잡고 그의 일부가 되어버린 가해자의 흔적에 주목한다.

또한 피를 비롯한 열두 소년들의 성장기를 말 못할 고통 속에 몰아넣은 당사자인 빅 에릭조차도 피의 관점을 빌어 일시적이나마 중립적인 이해의 대상이 된다. “그(빅 에릭) 안의 어딘가 깊은 곳에 불꼬챙이처럼 그를 가로질러 뚫고 지나가던 빛의 기억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크고 우리는 작다는 사실을 볼 수 없었다 (199면).” 피가 법적으로 미성년인 워든과 성관계를 맺은 것은 사실이지만, 둘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워든이다. 그 외에도 작품은 쉽게 답할수 없는 여러 질문을 던지면서 독자들에게 복합적인 사고를 요구한다. 피가 처음 성추행를 당했을 때 충격을 받기보다 비교적 담담했던 이유는 너무 큰 트라우마에 압도당해서인가, 아니면 그 경험이 피의 내면 깊은 욕망에 조응했기 때문인가? 피가 피터에게 제발 성추행 사실을 폭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것은 빅 에릭이 무서웠기 때문인가, 아니면 자신의 소아성애적 행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는가? 워든과 피 사이 성적 관계는 일시적 실수인가, 아니면 필연적 관계인가?

문학작품의 성패는 소재의 복합성을 제대로 감당하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그 점에서 필자는 저자 알렉산더 지와 의견이 같다.  그리고 이 작품의 성과를 귀하게 여기는 관점에서, 바로 그 복합성이라는 측면에서 다소 아쉽다고 여겨지는 한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에세이 <충분히 한국적인>에서 볼 수 있듯이 알렉산더 지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인종에 대해 쓰라고” 주문하는 작가, 즉 성의 문제를 제시한다고 해서 인종의 문제를 간과하지는 않는, 자신의 소재에 존재하는 복합성을 존중하는 작가다. 『에딘버러』에서도 주인공의 인종적, 민족적 배경은 작품의 전개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작품을 다 읽고 나서 주인공이 과거 식민지였던 어떤 나라의 출신이었다 해도 그 내용이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에 관한 언급에 작가도 인정한 “사실적 오류”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피와 그의 가족이 아무리 미국문화에 동화되어 있다 할지라도 문화적 갈등의 요소가 더러 피의 일상적인 삶에 끼어들 법도 한데, 작품에는 그런 요소가 지나칠 정도로 결여되어 있다. 또한 피의 삶은 그 수많은 위기와 곡절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미국 중상류층의 편안한 삶의 궤적을 벗어나지 않는데, 작중에서 그런 계급적인 요소에 대한 자의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알렉산더 지는 한 인터뷰에서 글을 쓸 때 자신은 논리를 소재에 강요하기보다 소재 자체의 논리를 받아들이고자 할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작가가 소재에 내재한 복합성을 이 아름다운 작품에서 이미 이룩한 것보다도 더 깊게, 더 넓게 천착했더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이미지 제공_ 알렉산더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