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박스 │2008

우리는 언제부터 반듯하다는 평가보다 매력있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 했을까? 워런 써스만(Warren Susman)은 미국사회에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이 성격에서 개성으로 전환되는 단서를 1920년대에서 찾는다. 미국문학사에서 1920년대는 F.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 1896~1940)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로 대표되는 시대이다. 1925년에 발표된 이 작품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미국사회가 물적 화려함에 도취되면서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깨달음, 즉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환멸의 경험이다. 작년 출간되자마자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이민진(Lee Min-Jin)의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Free Food for Millionaires』(이옥용 역, 이미지박스)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능력은 저주가 될 수 있다.
케이시 한은 젊고 유능한 재원인데, 품위와 성공을 선택하라고 강요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갈망한 것은 오히려 매력과 통찰이었다.(3면)

 Lee Min-ⓒ Richard Corman

혹시 어딘가 낯익은 문맥이라고 느꼈다면 이미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독자일 것이고, 그러면서도 첫 부분부터 작품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독자라면 도덕이나 품위는 어딘가 무겁고 케케묵고 꽉 막힌 것이라 여겼거나, 평소 육체적 매력과 산뜻한 개성에 더 끌렸기 때문일 것이다.

뉴욕의 세탁소에서 일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케이시(Casey)는 장학금을 받아 간신히 프린스턴대학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법학대학원 입학허가서를 받았지만 변호사가 되는 길을 포기한다. 그것은 미국 주류사회의 자식들이 어차피 가게 되어 있는 길이며, 영혼 없는 인간들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적당히 살아가기 위한 길이자 가난한 한국인 부모가 원하는 길이다. 그런데 명문대학을 나오기는 했지만 케이시 같은 주변부 출신이 뉴욕에서 자존심을 내세워 남의 도움을 거절하면서까지 크든 작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은 오만을 넘어 위태롭다. 주류사회를 향한 계급상승의 문은 케이시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지 않고는 결코 열리지 않는다. 케이시는 늘 카드빚에 시달리며 이 사람 저 사람의 집을 떠돈다.
그런데 품위와 성공보다 매력과 통찰을 지향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하나는 주류 미국사회에 맞서고 싶기 때문이지만 다른 하나는 자존심, 겉멋, 경박함과 시기심이 섞여있는 좀 복잡한 감정이고,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주변인이 주류에 대해 느끼는 반감의 일종이기도 하다. ‘아메리칸 드림’이 불가능한 꿈이라는 각성은 이미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가 보여준 것이다. 케이시가 선의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 주류 백인들을 경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심지어 같은 한국인으로 변형된 형태로나마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써바인(Sabine) 아줌마(한국이름은 숙자)의 도움까지 거부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다. 구김살 없이 반듯하게 살아갈 수 있는 행운을 가진 자들을 질시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기 마련인데, 어떤 의미에서 독자가 이 작품에 쉬 빠져드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작가가 주변인 케이시 한을 통해 이러한 질시를 은근히 변호하기 때문이다.

케이시의 반항에는 질시가 포함되어 있지만 그녀에게는 고급 속물에 떨어지지는 않는 강단이 느껴진다. 그것은 케이시가 이런 질시까지 포함해서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털어놓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결코 케이시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 욕망에 충실했다고 해서 작가가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법은 작품 내에서 거의 없다. 욕망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욕망에 충실한 것이 자신의 삶에 대한 정직한 태도이며 물질적 풍요나 안락한 삶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는 것은 위선이고 부자연스러운 행위이다. 작가의 이런 태도, 즉 ‘도덕=자기 욕망의 숨김 또는 억제=무의식적 자기기만’이라는 견해가 잘 나타나는 부분은 역시 엘라(Ella)를 묘사하는 대목이다. 이민 간 한국인 의사의 딸인 엘라는 얼굴이 예쁘고 선량한 데다 베풀 줄 알고 신앙심이 투철하지만, 그녀가 야심 있고 세속적이며 안정된 직장을 가진 한국인 테드(Ted)와 결혼하는 것을 작가는 행복으로 묘사하기보다 오히려 자아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하고 외부의 도덕률에 매인 타율적 삶으로 묘사한다. 마침내 엘라가 자신에 대한 긍정을 통해 테드를 거부하고 미국인 그린(Green)과 결합하는 ‘비도덕적’ 선택을 할 때부터 작가는 엘라를 훨씬 우호적으로 묘사한다.

작가들은 이따금 자신이 만든 인물 가운데 누군가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이기도 하는데, 케이시 한을 제외한다면 이 작품에서는 아마 미국여자 델리아(Delia)에 대해서일 것이다. 육감적 몸매를 가진 델리아는 직장에서 소위 ‘필’이 꽂히는 남자라면 유부남이든 아니든 유혹을 했고 더구나 이런 일로 직장에서 호가 난 여자이다. 그녀는 테드를 유혹했고 그로 인해 선량하고 상냥한 엘라 가정의 행복을 파괴한 인물이다. 테드는 마침내 엘라 대신 델리아와 결혼하려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 평소에 테드에 비판적이었던 작가도 이때만은 테드를 옹호한다.

델리아에 대한 테드의 감정은 과거 어느 누구를 행해 느꼈던 것보다 훨씬 강렬했다. 테드에게 델리아는 고향이었다. 엘라는 그가 무척 사고 싶었던 언덕 위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는 엘라와 같이 있을 때는 편안함을 느낄 수 없었다. 또한, 엘라는 샹냥하고 착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끌려본 적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431면)

작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델리아는 통상적 도덕이나 사회적 규범에 비추어 볼 때 필시 부정적 인물이 되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작품 내에서 가장 생동감 있는 인물로 만들어졌고 나아가 다른 인물에서 보기 힘든 가치까지 부여한다.

테드는 한기를 느끼고 외투를 걸쳤다. 어머니는 언제나 억센 여자였고 늘 자신이 옳다고 확신했다. 어린 시절 그는 엄마를 미워한 적이 가끔 있었다. 그리고 보니 델리아는 자기만 옳다고 주장한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테드는 깨달았다. 아마 델리아는 자신이 여러 번 실수를 했고 남으로부터 심판을 당해보았기 때문이 아닐까.(434면)

이 인용은 테드가 여전히 엘라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의 어머니와 델리아를 상호비교하는 장면이다. 델리아는 자신을 속이지 않았고, 더 나아가 남에게 열려있었다. 그런데 욕망에 충실한 것이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주지 않으며 저항은 성장과정 동안의 덕목이다. 케이시, 테드, 제이, 버지니아 등 20대의 젊은 인물들은 언젠가는 성장을 끝내고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욕망을 중시하지만 그 과정에서 종종 상대방에 대해 배려가 부족한 모습을 보이며 결정적으로는 사회와 대결국면에 도달하면 스스로 꼬리를 내린다. 그러므로 저항은 종종 저항의 제스처가 되고 인물들이 겪는 숱한 고생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19세 소설의 경우처럼 숭고한 진정성을 지닌 각성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진짜로 저항하기에는 미국사회의 벽이 너무 견고하기 때문일 것이고 숭고나 진정성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케이시가 은우를 좋아하면서도 휴와 성관계를 갖는 장면은 이런 진정성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정직하지만 혼란스럽고 난잡하게까지 보이는 관계의 원인을 작가는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위안을 받고자 하는 상실감에서 찾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에서 깨달음을 향한 성장과정은 은우와 케이시의 만남으로 끝을 맺는다. 케이시는 힘든 인턴 과정을 마치는 날 마침내 연봉이 많은 증권회사 분석가 자리를 제의받는데, 이 순간 자신이 소망했던 이 자리를 거부한다. 대신, 역시 증권회사 투자분석가였지만 투기가 아니라 투자에 충실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쫓겨났던 은우와 다시 만나 새로운 삶을 기획한다. 있을 수 있는 선택이지만, 나로서는 이러한 결말이 진정한 거부보다는 치기에 가까워 보인다.

마지막으로 한국인 가정 묘사에 대해 한 마디. 앞서 말한 바대로 작가가 가장 우호적으로 그린 인물이 케이시와 델리아라면, 냉혹하게 다룬 경우가 케이시의 어머니 리아(Leah)와 교회 성가대 지휘자 홍(Hong)이다. 전자는 유교적 전통과 결합한 기독교적 교리에 억압당했기 때문에 결국 자신을 상실하게 되며, 후자는 리아와 관계를 갖자마자 바로 버리는 무책임한 인간으로 나온다. 묘사에서도 톡톡 튀는 힘을 느낄 수 없는데 한국문화가 너무 단순하게 형해화되어 그려졌다는 느낌이다. 자신에 충실하려면 남의 것도 제대로 대접해야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