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무엇 때문에 펜을 드는가? 미지의 것, 즉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집요한 추구를 위해서일까?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알려진 세상에서 무언가를 알리고자 하는 억제할 수 없는 맹목적 충동 때문일까? 삶을 영위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살림하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는 나에게 글쓰기는 나의 오래된 자아가 존재하는 공간, 즉 다른 누구와도 공유할 필요가 없는 나만의 공간을 제공했다. 그것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 제니스 리(Janice Y. K. Lee)

『피아노 티처The Piano Teacher』

제니스 리의 처녀작 『피아노 티처The Piano Teacher』는 올해 1월에 출간되어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40년대와 1950년대 영국령 홍콩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오랫동안 공항 구내서점의 선반들을 차지해왔던 식민지 시절 홍콩을 다룬 수많은 소설과는 매우 다른 작품이다. 『피아노 티처』는 외지에서 발생한 극적 사건들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는 한 디아스포라(diaspora) 여성의 이야기로 식민지 시절 홍콩의 에토스(ethos)기풍, 관습 또는 특질가 많이 나타나있어 매우 참신하다.

이 소설은 여주인공 클레어Clare(결혼 전의 성(姓)은 드러나지 않는다)를 소개하는 3인칭 서술자의 설명으로 시작한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영국의 시골 여성인 클레어는 1952년 기술 관료인 남편 마틴 펜들턴(Martin Pandleton)과 함께 홍콩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부유한 사교계 명사인 중국인 부부 빅터 첸(Victor Chen)과 멜로디 첸(Melody Chen)의 딸 로커트 첸(Lockert Chen)의 피아노 교사로 부업을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는 두 개의 이야기가 번갈아 전개된다. 하나는 195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중심인물 클레어와 윌(Will)첸가에서 만났던 사람의 사랑을 다룬 것이다. 다른 하나는 194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여 중심인물 윌과 트루디(Trudy)의 로맨스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고통스럽게 꼬여버린 운명을 그리고 있다. 제니스 리는 자신의 첫번째 소설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매끄럽게 엮어 2차 세계대전 당시 홍콩에서의 삶과 죽음, 일본 점령 10년 후 사람들의 삶에 남은 고통스러운 상처에 대해 일관성 있고 개연성 높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피아노 티처』를 읽고 소설 속 홍콩인들 대부분이 캐리커처처럼 보인다거나 호의적으로 묘사된 인물이 아무도 없다고 불평하는 홍콩-중국인 독자가 있더라도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피아노 티처』는 영어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 홍콩-중국인 독자가 아니라 좀 더 넓은 세계의 영어권 독서시장을 겨냥하여 쓰였기 때문이다. 윌과 클레어라는 영국인 디아스포라 남녀를 중심으로 한 3인칭 서술방식 덕분에 독자는 이들 두 식민지 주민의 생각과 감정을 좀 더 실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디아스포라적 시각을 통해 홍콩의 풍물(예를 들면, 음식, 냄새, 덥고 진득진득한 날씨, 매춘부와 노점상으로 가득 차 붐비는 거리 등)을 이국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제니스 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홍콩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제니스 리는 외부자의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시각뿐만 아니라 홍콩에 대한 내부자적 애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재(在) 홍콩 디아스포라 한인이라는 독특한 신분(영국인이나 중국인이 아닌) 덕분에 그녀는 내부자이자 외부자로, 말하자면 홍콩사회, 홍콩 기질, 경제적 생존에 대한 비유적 상징인 ‘음식’에 대한 홍콩인의 집착에 공감하는 일원이자 냉정한 비판자로서 그들을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었고 조소를 보낼 수 있었다. 그녀는 홍콩인들이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상징하는 ‘음식’에 필사적으로 집착하는 성향을 포착했는데, 여기서 홍콩사회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이 드러난다.

이 소설을 좀 더 많은 홍콩-중국인 독자들이 읽게 된다면 작가의 빼어난 식견에 충격을 받고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역사적 진실’은 이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이 소설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된 요인은 ‘심리적 진실’이다. 말하자면 홍콩인의 경제적 생존에 대한 집착을 그녀가 객관적이고 예리하게 평가했기 때문에 세계적인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윌과 트루디가 일본의 집단수용소에서 당일여행을 허락받은 뒤 나누는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녀는 토아(Toa)에 도착하자 말했다. “다 왔네요. 배고프시죠?”
그러자 그는 생각했다. ‘중국인들의 머릿속엔 언제나 빌어먹을 음식밖엔 들어있질 않군.’ 그는 차에서 내리면서 답했다. “아니. 당신은?”

Janice Y. K. Lee ⓒAmy K. Boyd

트루디와 그녀의 사촌 도미니크(Dominique)의 비극은 이러한 홍콩적 에토스, 즉 필사적으로 실리에 집착하는 습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 욕심을 채우는 빅터 첸의 모든 이기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변명거리도 아마 이 에토스 안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멜로디 첸이 클레어에게 한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수난에 익숙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우리 민족은 실리를 매우 중시하죠.”

그렇다면 여성적 시각에서는 어떨까. 제니스 리를 두고 ‘역사적 작가’ 운운하는 일부 평론가들의 상찬은 듣기에 거북하지만 그녀가 전도유망한 여성작가라는 지적들에는 동의할 만하다. 그녀가 영리하게 선택한 제목 ‘피아노 티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독일의 여성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Elfriede Jelinek)의 작품 『피아노 치는 여자The Piano Teacher』와 동일하여 이 작품의 주인공인 에리카(Ericka)의 억압된 여성성과 상호텍스트적(inter textual) 이미지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제니스 리는 ‘순진하고 촌스러운’ 한 여성이 이성에 눈을 떠 전통사회의 한계를 초월하는 과정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에서 우리는 클레어가 이국의 타자들을 두려워하는 식민지의 아내에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완전히 융화해가는 변화와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도입부와 결말에 나타난 그녀의 사고방식을 비교해볼 때 분명히 드러난다.

클레어는 낯선 관습과 사람들에 부딪히기보다는 배 안에 남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이런 광경을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4면)

1940년대 홍콩

이 모든 것들 속에서 그녀를 버티게 한 작은 깨달음이 있었다. 저 거리로 걸어 나가는 일이야말로 그녀에게 필요한 전부라는 깨달음. 그녀는 그 안에 녹아들 것이고 거리의 리듬에 잠겨 자연스럽게 세상의 일부가 될 것이다.(331면)

세상으로 나가 그 일부가 되라! 이것은 헌터 칼리지(Hunter College) 예술학 석사인 제니스 리가 첫 소설을 쓰고 세계의 독자들에게 성공적으로 내보이면서 행한 일이기도 하다. 그 덕에 전 세계의 독자들은 훌륭한 줄거리나 세련된 형식의 매력뿐만 아니라, 한 여성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의 진솔한 감정과 자아를 발견하는 내면여행의 생생한 묘사, 지나치게 실용주의적인 사회에 대한 그녀의 통찰력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통찰력은 한국계 홍콩인 디아스포라 작가라는 독특한 신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니스 리의 처녀작은 이 보기 드문 참신함 덕분에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끝으로 그녀의 이러한 메시지가 머지않아 홍콩과 ‘본거지’ 한국에서도 반향을 일으키길 바란다.

※ 저자 제니스 리(Janice Y. K. Lee)는 홍콩에서 태어난 한인 2세로 홍콩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재미소설가 이창래 교수가 있는 헌트대 대학원에서 소설 창작을 공부한 뒤, 2009년 1월 첫 소설 『피아노 티처』를 발표했다.

※ 이 소설은 홍콩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사랑이야기로, 2차 대전 때 영국인 윌과 상류층 혼혈 홍콩인 트루디의 사랑과 1950년, 결혼 후 홍콩으로 건너 온 영국인 클레어와 윌의 사랑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2차 세계대전의 기억을 괴로워하면서도 밝히지 않는 윌의 미스터리함이 클레어를 괴롭히는데, 작가는 전쟁의 상흔이 이들의 사랑은 물론 홍콩사회를 흔들고 있음을 그리고 있다.


번역_ 柳美成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