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도 세상을 바꾸려고 하던 시간이 있지않았나. 독일 적군파(RAF) 1세대 ‘바더 마인호프 그룹’의 10여 년에 걸친 격렬한 투쟁과 처절한 붕괴의 기록인 영화 <바더 마인호프Der Baader Meinhof Komplex>를 보면서 절로 떠오른 생각이다. 그러니까 1980년대,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으리라. 4월혁명(1960)과 한일협정반대투쟁의 1960년대 학생운동, 그리고 전태일의 죽음(1970)과 반유신투쟁으로 점철된 1970년대. 그러나 1980년대 초대학에 들어가 사복형사들의 감시 속에 학교를 다니고, 눈앞에서 떨어져 내리는 죽음을 목도하고, 경찰의 군홧발에 가위눌리고, 골방에서 레닌의 「무엇을할 것인가?」를 읽고, 강제징집을 당하고, 구로, 부평, 안양 등지의 공장으로 ‘존재전이’를 감행해야 했던 세대에 속하는 나로서는 1980년대의 시간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편을 사로잡고 있는 걸 그저 내 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세대적 감상을 제하고 보면, 영화 <바더 마인호프>는 폭력으로 점철된 현대 서구의 역사를 새삼 돌아보게 만드는 냉정한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실상 민주주의는 한 번도 자명한 실체로 역사에 존재한 적이 없다. 그것은 늘 더 많은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힘과 그 힘을 억누르려는 국가권력 간의 투쟁의 산물로 잠정적이고 유동적으로그때그때 결정되어왔을 뿐이다. 가깝게는 숱한 희생을 동반하고 힘겹게 나아온 이 땅의 민주주의가 지금 겪고 있는 진퇴양난의 국면을 생각해볼 일이다. 파시즘과 제국주의의 폭력을 뿌리칠 수 없는 역사적 몸통과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서구제국의 경우 이 투쟁의 긴장과 열도가 만만했을 리 있겠는가. 그러나 참으로 어려운 일은 이 투쟁 과정에서 저항 폭력의한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닐 수없다. <바더 마인호프>는 이러한 생각의 다발을 불가피하게 요청한다.

1967년 이란의 전제군주 팔레비(MohammadReza Shah Pahlevi, 1919~1980) 국왕의 방독(訪獨)을 둘러싸고 벌어진 서독에서의 격렬한 시위와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을 보여주는 영화 초반의 화면은 너무도 생생하다. 압도적인 음향 사이로 경찰이 쏜 총성이 들리고 한 젊은이가 쓰러진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학생과 지식인들의 정부 비판이 잇따르고 여러 혁명그룹들은 반제국주의 반베트남전쟁의 기치아래 새로운 반체제투쟁을 준비한다. 우파언론 슈프링어 그룹에 대한 항의투쟁과 학생운동 지도자 루디두취케(Rudi Dutschke, 1940~1979)의 피격 등 영화 <바더 마인호프>의 초반부는 숨 돌릴 틈도 없이적군파 탄생의 전사(前史)를 써내려간다. 그것은 또한 미국과 유럽 전역을 ‘인간해방’의 격전장으로 만든 ‘68운동’의 전사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테러를 가장 효과적인 저항이라 믿는 열혈 행동파 지도자 안드레아스 바더Andreas Baader) 모리츠 블라이브트로이(Moritz Blei btreu) 분는 프랑크푸르트 백화점에 불을 지르며 도시게릴라식 무장혁명투쟁의 길로 들어서고,비판적 지식인이자 좌파 신문 <콩크레트>의 기자였던 울리케 마인호프(Ulike Meinhof) 마티나 게덱(MartinaGedeck) 분는 우연찮은 계기에 이들과 합류한다. 이른바 ‘바더 마인호프 그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후 영화가 전하는 이들의 투쟁은 기껏해야 돌과 화염병, 극단적으로는 자신의 몸뚱어리가 투쟁의 무기 전부였던 이 땅의 경우는 상상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무장 은행강도, 폭탄테러, 탈옥, 암살, 비행기 납치. 중동과 아프리카의 제3세계 혁명세력과 연계된 이들의 게릴라식 투쟁은 서독의 막강한 경찰력을 조롱하며 도시 곳곳을 피와 화염으로 물들인다. 베트남전 관련 영상이나 당시의 보도화면을 삽입하면서 극히 사실적으로 이들의 투쟁을 재현하고 있는 영화는 그러나 아쉽게도‘바더 마인호프 그룹’의 내부 깊숙이 카메라를 비추지는 않는다(하긴 사태의 표면 아래로 깊이 들어가는것은 애당초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던 것 같다). 행동파 바더와 지식인 여성 마인호프 사이의 갈등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임에도 영화는 단편적 암시에 그친다. 명배우 브루노 간츠(Bruno Ganz)가 열연한 독일연방경찰국장 캐릭터에 대한 균형 있는 접근에 비한다면, 바더를 비롯한 적군파 그룹의 인물들은 다소 평면적으로 묘사되면서 그렇게 해서라도 세상을 바꾸려 했던 젊은 열정들의 있을 수 있는 고뇌와 갈등은 가슴에 잘 닿아오지 않는다. 다만 체포 후 법정투쟁 과정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 공포와 회한, 혹은 알 수 없는 심연에 휩싸인 듯한 마인호프의 멍한 눈동자는 단연 이 영화의 백미라 할만하다. 죽음의 순간 그녀는 무엇을 보았을까. 영화의 첫 장면은 마인호프가 두 아이와 남편과 함께 보내는 해변의 단란한 시간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지식인 여성의 평온한 일상을 극단적 전사의 삶으로 내몰았을까. 극장을 나서는데, 정체를 알 길 없는 역사의 간지(奸智)에 대한 사념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