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일을 도와주고 있는 학생 하나가 기타를 배우고 싶단다. 음악을 좋아하는 후배이긴 했지만 평소 악기 연주에 대한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이유를 물어 보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영화 <라스트 왈츠 The Last Waltz>(1978)를 본 후 뭔

가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7월 서울아트시네마와 낙원악기상가가 낙원상가의 문화적 가치

를 기리는 뜻으로 기획한 제1회 낙원음악영화 축제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상영되었다. 프로그램을 살펴보니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더 월The Wall>(1982), 알란 파커(Alan William Parker) 감독의 <커미트먼트Commitment>(1990),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이야기>(2009) 등 국내외 록음악 영화들과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러시아 뮤지컬 영화
들, 그리고 여러 라이브 공연도 있었다.

영화 <라스트 왈츠>는 미국의 록그룹 더밴드(The Band)의 1979년 은퇴 공연실황으로, 밥딜런(Bob Dylan), 닐 영(Neil Young),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1913~1983), 조니 미첼(JoniMitchell), 밴 모리슨(Van Morrison), 에릭 클랩튼
(Eric Clapton) 등 1960년대와 1970년대 로큰롤(rock’n’roll)이 있게 한 위대한 가수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으로 유명하다. 더 밴드는 밥 딜런과 음악적유대를 같이한 사람들로 미국의 음악 전통을 잇는그룹이다.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일부 음악 애호가들만 그 이름을 알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내가 단골로 기타수리를 맡기는 곳은 낙원상가를 오르는 계단 밑에 한 평 남짓한 현대악기라는 가게다. 때마침 일이 바쁘지 않은 주인장께서 기타를 받아 들고는 이리저리 살펴보다 한마디를 건넨다. “이 기타 너무 오래 그냥 뒀는데?” 현대
악기의 배기수 사장은 KBS 다큐멘터리에도 소개된바 있는 유명한 기타 장인이다. 기타 제작 수리와 함께 50년 가까이 인생을 보냈고, 이제는 칠순이 넘은 분인데 회색 정장바지에 갈색 체크무늬 셔츠와 검은 조끼를 걸친 모습이 얼핏 50대 후반으로 보인다. 그 복장은 멋을 내기 위한 것으로 볼 수는 없었으나 더운 날씨인데도 넥타이를 맨 모습은 수십 년일을 해온 장인으로서의 품위를 느끼게 했다. 여기저기 선반을 뒤져서 부품을 찾아 끼우고 기타 넥을살피더니 이내 수리를 마치고 말을 덧붙인다. “기타는 본래 여섯 줄인데 서양 사람들은 화음을 덧붙이는 줄을 하나씩 더해 열두 줄을 만들어 쓰기도 하지. 좋은 기타야. 갖고 가서 잘 쳐봐. 수리비는 이천원이야.”

기타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12현 기타를 만든 이유를 모르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장인의 입을 통해 들으면 ‘과연 옳은 말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기타 수리를 마치고 나오다가 몇 년 전 청계8가 황학동에서 중고 LP 레코드 전문점 승인레코드를 운영하던 김 사장님이 황학동 일대 벼룩시장철거를 앞둔 소감을 이야기를 했을 때가 생각났다.음반들과 그 곳에서 청춘을 다 보냈다며 많은 사람들이 추억을 가지고 주말마다 거리를 가득 메우는 명소인데,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 정말 아쉽다고 했다. 낙원상가는 앞으로 어찌 될까. 황학동 벼룩시장, 세운상가, 피맛골이 철거되었고 낙원상가도 머지않아 철거된다고 한다. 서울시는 새로운 도시 문화를 재구성한다며 도심전체에 많은 변화를 실행에 옮기고 있다. 남대문에서 동대문까지 도심의 남북을 4개축으로 구분해 재개발하는 것인데, 이른바‘도심 재창조 프로젝트’라는 것이다.

낙원상가는 40년 전 도심 재개발 차원에서 만들어진 건물이다. 1960년대 후반, 서울시 계획으로 여러 현대식 주상복합건물이 건설되었는데, 종로부터 청계천, 을지로, 퇴계로에 이르는 세운 상가현대세운, 신성상가, 청계상가, 풍전상가의 총칭를 건설하고, 1층에는 4차선 도로가 지나가며 지하와 상층에는 상가와 아파트가 입주하는 낙원상가를 건설했다. 당시 낙원상가에는 극장, 캬바레, 당구장, 볼링장, 다방 등이 몰려있었고 연예협회 산하 단체들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명소로 자리잡았다. 강남이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았던 터라, 1970년대에는 종로와 명동, 광화문 일대가 문화의 중심지였고, 특히 낙원상가 2층은 음악인들이 연주자 일자리를 구하러 모이는 곳이었기에 최대의 악기 전문상가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강남에 투자가 시작된 1980년대와 대학로, 신촌, 홍대, 신도시가 개발되는 1990년대를 거치며 낙원상가 주변은 낙후되어갔다. 건물주들은 새로운 부가가치가 생기는 강남으로 눈을돌렸고, 사업자들도 종로보다 낮은 비용으로 여유

있는 환경과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외곽지역으로 발길을 돌림에 따라 문화활동의 무대가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낙원상가에는 낙원동 일대의 쇠락과 함께 볼링장과 당구장, 다방 등이 사라져갔다.이후 낙원동은 후진성을 면치 못했지만 악기상가만큼은 독보적인 곳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아마도 1970~1980년대의 종로처럼 음악인이 집중된 지역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200여 개가 넘는 악기점이 모여 있어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는 낙원상가는 전국의 악기 수요를 해결해주는 곳으로, 현재는 전통의 거리 인사동과 노인문화가 주를 이루는 낙원동, 서울시네마테크와 낙원악기상가를 찾는 예술인들이 공존하는 특이한 문화 이합집산을 이루고 있다. 많은 이들에게 의견을 물어 보았지만 도심을 재개발한다는 소식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척아쉬워했다. 자신의 삶과 추억이 있는 장소들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편 세운상가에 있던 대부분의 업소들은 종로4가의 옛 전매청 건물로 옮겨갔다. 젊은 시절 부터 오디오의 매력에 반해 세운상가에 자리를 잡은 이화전기의 조덕건 사장은 상가 이주 후의 소감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운상가에서 오디오들과 30년을 보냈다구. 단골 손님들도 20년이 넘은 사람들이 많아. 손님들이나 나나 오디오와 함께 늙어온거지. 그런데 이리로 온 후엔 절간에 앉아있는 기분이라네.”

서울시는 조망권을 확보하기 위해 낙원상가를 철거한다고 한다. 그러나 낙원상가 근처의 대형 주상복합건물을 보고 있으면 조망권을 저해한다는 구실이 보잘 것 없게 느껴진다. 철거를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낙원상가의 안전상의 문제가 발

견되었다면 얼마나 반가웠을까. 하지만 어느 보도자료에서도 낙원상가의 안전상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지금의 낙원상가를 포함한 낙원동 일대는 1960년대 이전에는 도로가 없는 주택가였고, 탑골공원 뒤로 피맛골이 이어져 동서로 뻗어있었다고 한다. 서울의 전통이 담긴 거리를 가꾸어 발전시키지 않고, 다시 한 번 개발의 논리로 피맛골 전체와 함께 한국 음악문화의 산실을 철거하여 없애고 있는 것이다.

과연 낙원상가는 세월의 흐름에 밀려 사라져야하는 공간일까. 십여 년 전 백마역 근처의 옛주점들이 일산 신도시 개발 이후에 거의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추억의 장소가 없어졌음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얼마나 그곳에 자주 들렀는지 물으면 대부분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1년에 한 번도 채 들르지 않았다고 답할 것이다.사람의 발길이 끊기고 낙후되어 더 이상 찾지 않으면 실제 장소는 사라지고 기억에만 남는 것이 당연한 흐름이다. 그러나 지금의 낙원상가는 사정이 다르다. 단지 추억의 장소만은 아닌 것이다. 찾지 않으면서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한다면 결국 아쉬움에
그칠 것이지만 낙원상가는 현대화 과정의 소중한역사가 담겨있는 장소이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수요와 공급을 연결하고 있다.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주 과거로 고개를 돌린다. 더욱이 낙원상가는 수많은 예술인과 연주자의 꿈을 간직하고 있다. 누군들자신의 꿈을 간직한 장소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으랴.

도심 재창조 프로젝트를 보며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 파리, 런던, 프라하, 비엔나 등지의 유서 깊은 건물들과 거리를

떠올리지 않을까.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들이 그 도시들을 찾는 이유는 구시가지의 모습 때문이다. 서울은 수도가 된지

600여 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도시다. 서울의 전통과 문화가 살아있는 곳은 어디인가. 세운상가는 녹지로

바뀌고, 피맛골에는 100m짜리 대형 주상복합건물들이 들어서고, 그 지하에는 종로와 광화문을 잇는 코엑스 같은 지하

거리가 형성이 된다고 한다. 또 새로운 대규모 악기상가를 만들어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지난

용산과 청계천의 재개발 과정을 돌이켜보면, 도심 재창조 프로젝트로 오래된 빌딩들을 헐어 대형 주상복합건물을 세우

거나 땅 밑에 새로운 장소를 만드는 일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그 일로 누가 이익을 보게 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 이다. 과연 누구에게 좋은 일일까. 그 곳에서 수십년간 일해온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일반인들은 추억을 잃는다.

1990년대 후반부터 국내의 시네 클럽들의 필름상영회를 진행하며 형성된 한국시네마테크 협의회는 2002년 전용관인 서울아트시네마를 종로 소격동에서 개관하고 영화문화의 다양성을 위한 활동을 해왔다. 서울아트시네마의 영화 상영은 비

영리 활동이었기 때문에 자금 문제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일부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열악한 자금 문제로 종로구 평창동의 아트선재센터를 거쳐 낙원상가로 장소를 옮겼다. 더구나 올해 들어서는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지원이 끊길지 모르는 위협에 놓였으며, 몇 년째 계속되는 낙원상가의 철거 소식은 그들을 또 다른 위기로

몰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영리 예술영화 상영극장이 제도권에 영입되지 않은 채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우여곡절로 낙원상가와 한 배를 타게 된 서울아트시네마는 지난 7월 제1회 낙원음악영화축제를 마련했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이 축제를 “현대화의 그늘로 인식되기 쉬운 오래된 도심 공간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애정을 촉구하고, 오래된 건물이 지니는 역사적이고 도시 문화적인 측면을 조명하는 작지만 소중한시도”라고 말한다.

올해의 주제는 ‘공간의 발견, 행복의 시네마테크’이다. 낙원상가라는 공간을 재발견하고, 영화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자는 뜻으로 내건 이 주제는 문화를 향유하는 우리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전용관을 필요로 하는 서울아트시네마가 자칫 현재에 만족하겠다는 뜻만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정말 중요한 점은 낙원상가에 위치해 있는 지금 그들이 할 수 있

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사회의 잘못된 점을 발견할 때 거리에 나가 집회를 벌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 조금이라도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일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사회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번 행사는 낙원상가가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임을 재확인 시켜준다. 낙원음악축제가 계속 되어 음악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호응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이곳에서 록과 재즈, 클래식 등 여러 분야의 영화상영과 축제가 이어져,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타나 첼로 혹은 색소폰을 들고 자신의 삶과 꿈을 가꾸어 나가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