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문화?
미국문화의 중심지라는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을 나와 버스를 타고 남동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여기저기 널려있는 거리벽화(graffiti)들이 눈에 들어온다. 링컨센터(Lincoln Center)나 메디슨스퀘어가든
(Madison Square Garden)에서 공연을 본 뒤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거리의 음악가들로 가득 차 있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기 위해 타임스퀘어(Times Square)의 멀티플렉스로 향하다보면 가는 길 이곳저곳에서 16㎜카메라를 이용한 저예산영화 촬영현장을 마주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뉴욕의 부분적인 풍경일 뿐, 이곳저곳 펼쳐져 있는 이민집단의 커뮤니티는 또 다른 문화적 경험을 준다. 폴란드계가 들어찬 브룩클린(Brooklyn)의 어느 동네나 라틴음악이 울려 퍼지는 맨해튼(Manhattan) 북쪽 커뮤
니티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뉴욕문화’가 도리어 이질적으로 보인다.
미국에서 가장 큰 소수자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흑인문화를 경험해보거나 대도시 를 벗어나 드넓은 대륙의 한가운데를 다니다보면 이점은 더 분명해진다.

이질적이다’라는 말은 상황을 충분히 대변하지 못할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이질적이다 못해 적대적이기까지 한 문화들 사이의 갈등이 오랫동안 진행되어왔기 때문이다. 작년 말 미 대선에서도 이는 명징하게 드러났다. 공화당, 특히 공화당 부통령 후보 새라 페일린(Sarah Louise Heath Palin)은 ‘아루굴라(arugula)이탈리아 요리에 많이 쓰이는 채소를 먹고, 라떼를 마시며,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를 읽고, 유럽차를 모는’ 대도시의 ‘엘리트 문화’에 대항해 낙태를 반대하고, 총기소유와 ‘작은 정부’를 지지하는 ‘평범하고 애국적인 미국인들’을 추켜세웠다. 1980년대 낙태 문제를 둘러싼 이견에서부터 시작된 이 ‘문화전쟁(culture war)’은 이렇듯 미국사회를 갈라놓고 있다. 음식, 음악, 문학, 영화, 소비상품을 둘러싼 취향에서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이르기까지,미국의 문화는 인종적, 계급적, 종교적, 정치적 맥
락에 따라 갈린다. 그리고 이런 이질성들이 총체적으로 엮여 만들어지는 삶의 방식, 이것이 미국문화이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문화는 대체로 우리가 아는 바의 ‘미국문화’, 즉 미국산 문화상품을 즐기기 위한 배경 정도로만 이해되고 있다. 한 나라의 풍부한 문화는 생산과 유통과정에 개입하는 거대한 자본의 이해에 따라 몇 가지 문화상품들로 환원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문화소비자들은 소외되고 그들의 취향은 조작되기 일쑤다. 우리가 아는 미국 문화는 아주 제한된 미국의 문화상품일 뿐이다.

판타지(fantasy)로서의 문화상품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1958~2009)의 죽음으로 미국의 모든 언론이 들썩이고 있던 7월 3일, <뉴욕타임즈>에는 색다른 칼럼 하나가실렸다.1 잭슨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인생을 호의적으로 재조명하던 많은 매체들과는 달리, 마이클 잭슨이라는 슈퍼스타가 만들어진 시대배경과 미국사회에서 그가 표상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성찰적으로 훑어간 이 칼럼의 메시지는 간결했다. 모두가 그의 소아도착증과 아이들과의 성관계를 둘러싼 법정공방 따위의 문제들에는 의도적으로 눈을 가린 채 공범이 되어 마이클 잭슨이라는 거대한 문화상품을 만들어 냈고, 그 결과 미국사회는 “현실의 책임과
결과에 대한 고민을 포기한 채 판타지랜드로 추락해버렸다”는 것이다.

급격히 악화된 경제상황을 맞은 미국의 1980년대 초반은 약화된 고용과 사회복지, 그리고 훨씬 심해진 가난과 범죄를 낳았다. 이는 흑인 커뮤니티들에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이런 상황속에서도 마이클 잭슨은 인종을 넘나드는 ‘팝의 황
제’로 등극했고, 당시 많은 흑인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좋은 것이 좋은 것,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많은 문제들은 그저 모르고 지나는 것이 낫다는 식의 풍토가 자리했다. 이런 의미에서 칼럼니스트의 눈에 비친 대중적인 문화상품들은 판타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마이클 잭슨은 “걷잡을
수 없이 맛이 간 판타지의 구현체(embodiment offantasy gone wild)”였던 것이다.

이는 비단 마이클 잭슨만의 문제도, 미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상품은 기본적으로 판타지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코카콜라와 맥도널드와 스타벅스에서부터 프로스포츠와 디즈니랜드, 무수한 영상과 무대상품, 팝 아이콘과 고급예술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 만들어진 많은 문화상품들은 그렇게 그 이면의 문화적 맥락과 불필요한 사실에 대한 기억을 거세시킨 채 우리의 환호를 받는다. 위안과 안식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판타지는 그 자체로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다. 힘들고 고단한 인생에서 약간의 판타지는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비판했던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도, 궁극적으로는 고통에 찬 인민의 삶이 그런 ‘아편’을
필요로 한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했다. 게다가 인간의 모든 예술적 창조행위도 기본적으로는 현실을 뛰어넘는 그 무엇에 의해 동기를 얻는다.

하여 어느 사회에서든지 저마다의 판타지를, 저마다의 문화상품을 만들어낸다. 한 사회에 대대로 내려오는 문화는 그 문화상품이 만들어지고 소화되는 토양과 맥락을 제공한다. 그런데 문제는 한 사회의 문화가 만들어낸 판타지가 다른 사회
로 넘어가는 경우에 발생한다. 그 문화적 전파과정에 비대칭적인 권력관계가 개입될 경우,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해진다. 여기서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라함은 단지 누가 힘이 더 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어느 한 문화가 더 우월한 것으로, 따라서 선망과 선호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문화교류는 상호성을 띄기 보다는 일방적인 전파 혹은 도입의 형태를 띄게 된다. 그것도 문화 없는 문화상품만의 전파. 그리고 한 나라에서 만들어진 문화상품이 마치그 나라의 문화와 동격인 양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렇게 전파된 문화상품의 내용이 일상으
로부터 동떨어져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 판타지의 추구가 목적이다. 그런데 더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사회로부터 건너온 문화상품은 소비에 새로운 효용을 더한다. 그 문화상품의 소비가 더 우월한 문화적 개인을 만들어낸다는 판타지가 그것이다. 이로 인해 ‘따라하기’의 문화가 형성되고 얼마나 잘 따라하느냐가 문화상품의 생산과 소비뿐만 아니라 문화연구와 비평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중층화된 판타지. 소위 명품에 대한 환상과 선호는 고급 백화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심화된 지적·문화적 식민주의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있다. 무엇이든 옮겨가면 새로운 풍토에 맞게 재구성된다는 뜻인데, 우리는 이 교훈조차 오늘날에 맞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왜 감이 아니라 귤이 회수를 건너는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누구인지, 그리고 회수를 건너는 과정에서 어떤 힘이 가해져 귤이 탱자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문화교류 없는 문화상품의 거래만 남을 뿐이다. 다행히 해외여행도 쉬워지고 인터넷을 통한 초국적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지면서 새로운 문화교류의 가능성은 커지고 있다.이렇듯 풀뿌리에서부터 시작되는 문화교류가 정착
될 수 있을 때만이 우리는 참된 문화교류를 말할 수있을 것이며, 현실에 힘이 되는 건강한 판타지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