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뒤 한국 근현대 미술의 전개과정에서 당대 미술인들의 가장 큰 열망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미술을 직접 체험하고 느끼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뒤 미 군정의 통치와 한국전쟁(1950~1953) 이후 경제, 문화 분야의 원조가 본격화하면서 많은 미술인들에게 미국은 세계 현대미술의 조류를 직접 체험하고 해외미술계로 진출하기 위한 가장 유력한 출구이자, 통로로 인식되었다. 1950년대부터1980년대 말까지 한국 현대미술의 틀거지를 형성해온 주요 미술운동과 사조들의 형성, 전개 과정에서 미국 현대미술은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을 뿐 아니라 미술교육, 미술시장 등의 인프라 측면에서도 유력한 역할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1950년대 초창기 미국 현지 미술 교류전에 작품을 보내기 위한 작가들 사이의 이전투구식 경쟁부터 1960, 1970년대의 적극적인 수용기를 거쳐, 2000년대 국내에 뿌리 내린 해외 경매, 마케팅 등 미술시장의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미국 현대미술과 미술시장의 그림자는 곳곳에 드리워져 있다.

미국미술에 대한 실체는 1950년대 중반까지 국내 화단에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일제시대부터 뿌리 깊은 프랑스풍의 인상파 선호 풍토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미술은 실체를 모르거나 2류라는 인식이 적지 않
았고, 이런 인식은 1960년대 초까지 화단에 상당 부분 남아있었다. 여타 문화 장르들과 구분되는, 이런 특이한 양상은 나름의 자주의식이나, 독창적인 미술 방법론에 기인했다기 보다는 국내에 근대미술의 뿌리를 놓은 일본의 근대미술 취향이 철저히 프랑스 등 유럽의 인상파 중심으로 쏠려 있었고, 국내 화단 또한 이런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시대 서구로 유학을 결행한 작가들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경우는 임용련(任用璉), 백남순(白南舜, 1904~1994), 장발(張勃, 1901~2001)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인간가족展> 포스터

해방 이후 미 군정 실시로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직접 이식되면서, 한국미술도 그 지향점을 일본과 유럽 쪽에서 미국 쪽으로 급격히 바꾼다. 미술사가혜곡 최순우(兮谷崔淳雨, 1916~1984)의 말대로 “일본을 거치지 않고 서구에의 문이 열렸다”는 것은획기적 변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또한 서구 각국의 미술 관련 서적과 잡지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왔고, 미국식 교육시스템 정착은 우리 현대미술의 격변을 자의든 타의든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 구체적인 첫 계기는 해방 직후 미술교육과정의 개편이었다. 1946년 군정의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에 따라 서울대 예술대학 미술부(현 서울대 미대)가 탄생한다. 미국에서 유학했고, 철저한 반공 친미미술인이었던 장발은 서울대 미대의 초대 학장을 맡아 유럽식 전문 미술학교가 아닌 미국식 종합대학 단과대 편제를 고안했고, 그것이 이후 한국 대학미술교육의 뼈대가 된다. 아울러 미 군정 쪽이 해방공간에서 군정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미국문화연구소, 미국공보원(USIS) 등의 문화공간들은 당시 혼란스런 문화판에서 많은 작가들의 전시 마당을 만들어주었다. 이처럼 대외협력기구를 중심으로 한 전시와 교육인프라 지원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뒤 소련과의 냉전구도에서 미국 중심의 반공 전선 결집과 제3세계에 대한 영향력 확대라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있었지만, 초창기 국내 현대미술 형성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사실을 부정할수는 없다.

본격적인 미국과의 미술교류가 시작되는 기점을 흔히 1956~1958년으로 꼽는다. 전후 재건에 여념이 없던 유럽과는 전시교류가 미미했던 반면, 미국 쪽과는 활발한 작품교류를 펼친다. 1956년 11월 서울대에서 열린 <전미국미술대학생展>
을 필두로, 이듬해 미국공보원 후원으로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미국현대작가8인展>, 무려 30만명 이상의 인파가 몰린 경복궁국립미술관의 세계순회사진전 <인간가족展>(1957), 벤 샨(Ben Shahn,1898~1969),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1912~1956) 같은 미국작가들의 복제 작품들을 전시한 <20세기 미국미술의 하이라이트展>, <서울대-미네소타대학교류展> 등이 열려 화단에 자극을주었다. 또 각 신문들도 경쟁적으로 미국의 주요 미술 흐름이나 현지 평론가들의 글들을 번역, 소개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주한미국공보원뿐 아니라 국제협력처(ICA), 록펠러재단, 아시아재단 등의 민간 기관들을 움직여 미국의 시각문화를 알리는 데 주력했고, 최초의 한국문화재 해외순회전인 <한국미술걸작-미국展>(1957), 뉴욕 월드하우스갤러리의 <한국현대회화展>(1958) 등도 주선했다. 특히 해방이후 최초로 한국작가들 작품을 해외에 소개한 <한국현대회화展>의 경우 작품 수준의 편차가 커서 현지에서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출품작을 내
기 위해 중견, 소장 작가들 사이에 신경전이 빚어지기도 했다. 아직 화단의 주요 작가들은 유럽의 모더니즘에 대한 동경이 강해 파리로 도불해 작업하는것이 가장 큰 로망이었지만, 본격적으로 물꼬를 튼 미국과의 전시교류는 국제화를 절실한 화두로 부각시키면서 당시 한국현대미술의 창작 지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구상 위주의 화단 풍토와 국전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의 약어의 보수주의에 반기를 든 창작미술가협회, 현대미술가협회, 모던아트협회, 60년미술가협회 같은 소장 미술인들의 뜨거운 추상, 곧 앵포르멜(informel)1 운동은 그 단적인 양상이었다.1950년대 말부터 상당한 호응 속에 부각된 앵포르멜 신드롬의 배경에는 화폭에 안료를 마구 들이붓고 긁고 휘젓는 등 파격적 기법을 썼던 미국 추상
표현주의의 자유분방한 표현이 전후 암울한 상황을 뛰쳐나오려는 국내 젊은 미술인들의 실존적 욕구와 맞아떨어진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61년군사쿠데타 이후 이들 추상주의 소장 세력들은 군부의 사회개혁 분위기에 발맞추며 미술계의 실권을쥐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이 설립한 반공문화연대기구인 세계문화자유회의의 한국지부 춘추회의 지원을 얻어 김영주(金永周, 1920~1995), 박서보(朴栖甫), 유영국(劉永國, 1916∼2002) 등 앵포르멜 미술작가들 상당수가 엘리트 미술세력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이런 사실은 미국이 초창기 화단정치의 양상까지도 막후에서 움직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1950년대가 압도적인 정치, 경제적 파워를 중심으로 한 미국 현대미술의 일방적인 수용 단계였다면, 1960년대 이후부터는 재미유학생의 증가를 바탕으로 한 민간 미술교류가 활성화한다. 유럽 대신 미국을 명실상부한 세계미술의 핵심으로
받아들이게 됐고, 추상주의에 경도됐던 젊은 세대들은 미국 뉴욕의 미술 동향에 시선을 집중했다.
1960년대 중반 앵포르멜의 열기는 식었지만, 미국유학생의 급증과 전시 교류의 정례화 등으로 미국의 현대미술 경향은 국내 화단의 유행을 주도하는 핵심 모티브로 자리잡게 된다. 중견 작가들의 프랑스 선호현상이 남아있었지만, 한국미술의 현대성을 의식한 젊은 소장 작가군에게 세계 현대미술의 메카로 뜨고 있던 뉴욕의 신조류들은 작업의 나침반 구실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추상표현주의 이후 미국미술계에 새롭게 일어난 옵아트(op art)기하학적 형태나 색채의 장력(張力)을 이용하여 시각적 착각을 다룬 추상미술, 팝아트, 네오다다이즘(neodadaism) 등의 반미술 트렌드가 1967년 전위작가 그룹인 신전(新展)무(無), 오리진(origin) 등의 <청년작가연립展>을 비롯한 일련의 전시에 반영되어 유행한다. 기하추
상, 흙, 천, 물, 나무 등의 물질 오브제를 이용한 환원적, 개념적 작업 등으로 특징 지워지는 이런 흐름은 1970년대 초반까지 미술계를 주도하던 흐름이다. 뒤이어 1960년대 말 대두한 미국 미니멀리즘(minimalism)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과 문화적인 흐름의 영향과 당시 군사정권이 내세웠던 유사 민족주의 등의 영향으로 한국성, 동양성에 대한 고민이 결부되면서 1970년대 중반 단색조 회화인 모노크롬(monochrome)이 탄생해 1980년대 초까지 화단을 좌우하게 된다. 회화의 평면화를 들고 나온 모노크롬은 백의민족, 선 같은 한국 고유의 정서나 전통적 정체성을 표출한다는 모토를 내걸었으나, 그배후에는 미국 미니멀리즘이 모티브 구실을 했다는 것을 간과하기 어렵다. 1970년대 말부터는 미국의 극사실주의와 신구상주의 유행이 불어 ‘사실과현실’ 등의 여러 동인 그룹을 양산한다. 그러나 이런 신조형 트렌드들은 기실 미술평론가 이일(李逸,1932~1997)의 지적대로 “사상적 원천은 물론, 표현 형태까지를 그것도 매우 헐값으로 빌려”오는 수준이었다는 혹평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80년대 비판적 리얼리즘을 바탕으로한국미술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은 현실 참여미술(민중미술)의 경우도 극사실주의와 더불어 미국풍 팝아트가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오윤(吳倫, 1946~1986), 민정기(閔晶基), 김정헌(金正憲) 등 참여작가들의 초기 작품들을 보면, 군사독재 아래 이제 막 대량소비사회로 진입하던 한국의부정적 현실을 대중매체나 상품광고 이미지 등을 활용한 팝아트 스타일을 빌어 묘사한 것들이 적지않다. 일례로 1980년 참여미술작가들의 모임인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 창립전에 냈던 오윤의 마케팅 연작들은 조선시대 불화와 목판화에 화장품, 속옷 광고나 코카콜라 간판 등의 이미지를 결합시켜 암울한 현실을 더욱 극명히 부각시킨다. 박불똥, 안창홍(安昌鴻), 신학철(申鶴澈) 등 민중미술계열 작가들이 1980년대 초중반 대중문화의 여러 이미지들을 짜깁기한 콜라주 작업들을 선보였던 것도 이런 맥락이다. 애초 도시적 정서에 바탕한 작업을 했던 ‘현발’ 동인을 비롯한 참여미술작가들이 본고장팝아트의 미술사적인 맥락이나 정체성을 충분히 소화해 응용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이들은 다만 소재를 고급 또는 저급으로 나누지 않은 자유분방한 팝아트의 표현 방식에 자극을 받고, 현실 비판적 맥락 아래 전용했다는 차이가 있다. 어쨌든 미국 현대미술은 1970~1980년대 국내 미술계를 양분했던 획일적인 모노크롬류의 유사 모더니즘과 그 대척점에선 참여미술 양자에 모두 자양분을 제공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민정기<세수>(1981)

동구권 몰락으로 이념의 시대가 와해된 1980년대 후반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밀려오면서 피상적 모방과 수용에 급급했던 미국 현대미술의 다기한 속내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처음으로 싹텄다.1984년 위성방송쇼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Orwell>로 단박에 국민적 스타로 떠오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白南準, 1932~2006)이 국내 미술계에 본격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영상 작품과 포스트모더니즘적 성향을 띤여러 매체미술들이 미술인들의 감수성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서구와의 미술품 교류가 사실상 개방되고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 중심의 트렌드 독점은 사라지고, 유럽을 포함한 서구 현대미술과의 전방위적인 교류가 두드러지게 된다. 그 결과 젊은 유학파 청년작가들을 중심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자각과 세계화 인식의 장이 열리게 된다. 독점적 영향을 미쳤다고는 볼 수 없으나 미국 현대미술은 이 과정에서도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백남준의 노력으로 성사된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서울展>은 생소한미국 문제작가들의 비디오, 설치, 매체미술 작품들을 다수 선보이며 국내 미술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출품한 미국미술계 주변부의 문제적 작가들은 일상 삶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동안 예술 바깥의 문제로 치부했던 소수자, 인종차별, 폭력, 젠더등의 문제를 예술로 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러주었다. 그 여파로 국내 미술계의 지형도는 크게변했다. 생소했던 설치미술과 비디오아트가 주류의 장르를 넘볼 정도로 활발하게 제작되기 시작했고, 의미를 파괴해 의미를 만드는, 모든 조형적 회화적 가치를 어그러트리고 회의하는 포스트모던의 바람이 밀어닥쳤다. 1990년대 중반부터 박이소(朴異素, 1957~2004) 등 재미 작가들이 들여온 포스트모던 담론을 놓고 평단은 논쟁이 펼쳐졌고, 과거 제도권 화단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상을 새롭게 직조하며 한국적 현대미술을 창출한 최정화(崔正化),김수자(金守子), 이불 등의 문제적 작가들이 등장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유학파 청년 작가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 생겨난 대안공간 붐은 근본적으로 한국미술과 미국 현대미술의 연결망이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이들 대안공간과 아트선재센터, 쌈지스페이스 등의아트센터에서의 전시, 레지던시에서 배출된 신예작가군들에 의해 2000년대 현대미술의 지형이 형의 자본주의 아트 마케팅 시스템이 대거 들어와 구조를 재편했다. 전적으로 미국만의 영향이라고 볼수 없지만, 2004년 이래 본격화한 미술시장의 급팽창과 젊은 작가군의 약진 이면에는 어김없이 서구미술의 플랫폼인 미국 미술시장의 입김이 서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2000년대 이후 상황은 미국 현대미술만의 영향력을 논의하는 것은 별다른의미가 없는 양상으로 변하고 있다. 인터넷 등의 디지털 매체와 비엔날레 특수로 한국을 비롯한 비서구 미술계도 세계 현대미술의 본류 속에서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미국 현대미술의 지난 잔영들은 몰역사, 몰취향적인 국내 미술판에 유령처럼 기묘한 양상으로 변주되어 나타나곤 한다.

200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이른바 ‘케이(K)팝’이라는 유사 팝아트 작품들이 유행하고, 때 아닌 앤디 워홀AndyWarhol, 1928~1987) 붐이 일고, 해묵은 극사실주의풍 그림들이 국내 소장 컬렉터들 사이에서 뜻밖의 인기를 모았던 것이 그렇다. 미술계 곳곳에 포진한 미국유학생 출신 작가, 기획자들은 보이지 않는 인맥망을 형성하면서 작업에 대한 태도나 취향 등을 놓고 미술판의 권력장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복잡다단한 한국근현대미술사에서 미국미술이 지닌 의미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이 공존한다. 미국 현대미술은 1960년대 이후 화단에 절박한 과제로 대두됐던 서구화의 욕망을 해결하는 통로 구실을 하면서 한국현대미술사의 주요 흐름마다 주요 계기로 작용하면서 국내 작가들의 세대교체와 미술시장의 성장을 추동하는 끌차로 기능했다. 서구미술에 크게 뒤처졌다는 콤플렉스에 강박당한 채 미흡한 수준이나마 정체성을 고민하면서숱한 시행착오 속에 미국미술의 자양분을 흡수해 소화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뉴욕의 화려한 미술시장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현대미술이 여전히 서구 현대미술의 플랫폼 구실을 하는 이상, 우리 미술판은 앞으로도 당분간 그 자장 속에서 미래를 모색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미지 제공_ 한국근현대미술연구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