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잭슨

록과 포크, 팝, 재즈, 힙합 등 미국에서 탄생한 대중음악은 휴전 이후 60년 동안 한국 음악시장에 스며들었고, 국내의 뮤지션들은 여기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반응해왔다. 그 반응양식들은 때로 놀라운 성취로, 기묘하지만 절묘한 토착화로(특히 포크), 그리고 상당수는 모방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얼핏 모방으로 보이는 것들 조차도 ‘토착화’ 혹은 ‘로컬화’를 겪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1970년대 팝, 록발라드의 형식을 차용하며 정교화한 ‘고급가요’ 같은 것이 아마도 그런 경우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의 대중음악을 들여온 모든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다.

여기서는 미국 대중음악 수용과 변용의 그 길고 긴 역사를 개관하는 대신, 최근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좀 더 집중할까 한다. 오늘날 한국의 대중음악 시장에서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그 현상이란 ‘동시대적 반응’이라는 말로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국의 대중음악, 특히 이른바 주류 가요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 몇 달간 차트를 장악하고 있는 아이돌 그룹의 음악이 가장 손쉬운 사례들일 것이다. 태양, 카라, 브라운 아이드 걸스, 소녀시대, 2NE1,동방신기 등의 곡에서는 현재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팝 음악 스타일에 대한 동시적인 반응이 뚜렷이 드러난다.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스타일이 즉시 한국 시장에 적용된다. 그 시차는 미미하다. 더불어 그 질 또한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지적은 얼핏 이상하게 들린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990년대에도 미국에서 유행하는 각종 음악 스타일들은 계속해서 유입되었고, 국내 대중음악의 창작자들이 그
것을 적용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1990년대 대중음악의 특별한 성격 혹은 ‘정신적 전제’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1990년대의대중음악은 2000년대의 대중음악과 밀접한 연속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1980년대의 대중음악이나 1970년대의 대중음악과도 다른 특징이다. 1990년대의 대중음악은 ‘스타일의 폭발과 분
화’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고급가요, 랩과 힙합, 서태지와 아이들이 촉발시키고 SM 등의 대형 기획사를 통해 완성된 아이돌 그룹,홍대 앞을 중심으로 하여 등장한 인디음악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스타일의 폭발에는 일종의 전제가 있다. 그것은 해외(그러니까 주로 미국)의 최신 트렌드에 대한 ‘따라잡기’다. 1990년대의 가수들에 대한 홍보자료들을 살펴보면 유달리 특정한 장르와 스타일을 도입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 그룹은 R&B와 테크노와 록을 섞은 음악을 선보였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홍보전략에는 외국의 스타일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자체로 음악적인 신선함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고, 그러한 전략의 정점에 있었던 것이 바로 서태지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당시 넉 장, 지금까지 총 여덟 장의 음반을 내면서 음반마다 스타일의 변화를 꾀했다는 것은, 그 결과물의 완성도를 떠나 일종의 강박이라고 할 수 있
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바로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강박이 아니었을까?

상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 후반이었다. 무엇보다 이 변화는 힙합의 영역에서 두드러졌다. 가장 미국적인 음악 중 하나인 힙합이 한국 대중음악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현진영 등의 댄스음악과결합하면서부터였다. 이를 ‘진짜’ 힙합이라 하기는 어려웠는데, 그건 질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애초에 댄스음악에 랩을 섞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즉 ‘힙합적’으로 사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힙합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은 1990년대 중반 이후 PC통신이라는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힙합에 대한 활발한논의가 이루어지고, 또한 드렁큰타이거, 업타운, 지누션 등의 교포 출신 뮤지션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오늘날 돌이켜 봤을 때 이것은 중요한 변화다. 즉 수용의 과정에서 중심점이 바뀌기 시작한것이다. 예전의 장르 수용이 한국에서 미국의 음악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면, 교포 출신 힙합 뮤지션들은 한국에서 미국 스타일의 음악을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전자가 ‘한국’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면 후자는 ‘미국’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의 양현석이 설립한 YG 엔터테인먼트역시 음악 생산에서 그러한 방향 전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기획사 중 하나다.인디음악에서도 비슷한 관점에서의 창작이 이루어졌다. 초창기의 인디음악은 한국 주류 가요에서 만들지 않는 음악을 만들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지금 여기서 소비되는 음악’이 아니라 ‘지금 저기서 소비되는 음악’에 대한 즉각적인 수용으로 이루어졌다. 즉 창작에서 이들의 롤 모델은 국내음반과 TV가 아니라 수입 음반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류 가요의 ‘뽕끼’와 같은 타협은 필요하지않았다. 그에 대한 반발로서의 ‘조선 펑크’라는 외침은 그만큼 인디 씬이 갖고 있었던 해외 지향적인성격을 역설적으로 드러냈다고도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간단히 말하자면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했느냐’로 생산과 수용의 기준이 이동하는 양상을 보인다. 장르 수용에 있어서의 강박이 사라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특정 스타일의 동시대적 수용이 가능해지고, 더불어 그것을 한국적인 상황에 적용하려 애쓰는 과정이 줄어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장르 수용에 대한 강박을 벗어 던진 한국 대중음악은 본토의 진짜배기들에 대한 대체물적 성격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여기까지라면 이는 음악 생산과 경험의 ‘스타벅스화’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다른 것이 또 있다. 그것은 작금의 ‘복고 열풍’으로 칭해지는, 한국 대중음악의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적극적인 활용이다.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 같
은 노래가 끌어들이는 시기는 1980년대다. 그런데 1980년대라도 마돈나나 마이클 잭슨이 아니라 김완선이다. 인디음악 역시 1970년대의 음악을 불러내지만 이때 불러내는 것은 그 당시 미국의 어느 록밴드가 아니라 산울림과 송골매다. 이는 중요한 차이다. 미국 대중음악의 따라잡기라는 강박이 만연할 때, 국내의 대중음악은 아류에 지나지 않았다.
혹은 이용할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김완선은 마돈나의 아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더 나아가 인용할 수 있는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야말로 진짜 미국 대중음악을 정말로 수용할수 있는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너무 섣부른 결론인가? 그렇다 해도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 유의미한 결과물들이 나오기 시작한다면, 결론쯤은 조금 앞서가도 별로 상관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