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영 감독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는 1990년대 중반 한국영화 안에서 미국문화(영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주인공인 윤명길 독고영재분과 임병석 최민수 분은 온갖 미국영화들이 상영되는 극장을 누비며 성장하여, 어느덧 한국 영화인으로 살아가는 두 초상을 대변한다. 영화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병석은 할리우드에 관한 정보와 소식으로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의 얼을 빼놓는다. 그는 신창고교의 아이들과 ‘황야의 7인’이라는 모임을 결성하여 영화 순례를 주도하기에 이른다. 영화 초반부에 병석은 영화에 대한 광적인 지식을 보여주지만 이로 인해 영화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병적인 인물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특히 젤소미나(Gelsomina) 영화 <길La Strada>(1954)의 여주인공라고 불리는 누이가 음란하게 춤추는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구경하는 장면은, 이 인물이 영화라는 거대한 환영에 사로잡혀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친구인 명길은 초반부에는 병석의 방대한 영화 지식에 매혹되는 인물이지만, 병석의 누나 젤소미나로부터 성에 눈뜨는 기이한 경험을 하면서 성장통을 겪게 된다.

충무로 이류 감독으로 살아가던 명길은 어느 날, 병석의 소식을 듣는다. 집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어린아이는 구하지 않고 영화 시나리오만 가지고 나왔다는 것이다. 명길은 실어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병석을 찾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한 권의 시나리오를 넘겨받는다. 그것은 병석이 평생을 고쳐 쓴 세련되고 치밀한 작품이었다. 영화는 세인의 주목 속에 제작되는데, 이를 진행하던 명길은 알 수 없는 의혹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보여주는 진실 게임은 명길이 <가면고>라는 영화를 완성해 가면서 서서히 드러난다. 편집실에서 명길은 병석이 써내려간 시나리오의 대사와 장면이 모두 할리우드 영화의 짜깁기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를 만나 따져묻는다. 그러나 병석으로부터 “나도 내 창작인 줄 알았어”라는 답변을 듣는다. 시나리오를 쓴 병석조차 모든 것이 순전한 모방의 산물임을 몰랐던 것이다. 영화는 다소 과장된 투로 영화(예술)의 진정성을 따져 물으며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요즘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오늘날은 할리우드 키드라는 것을 애써 감출 필요가 없는 ‘드러냄의 시대’이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결말처럼 병석의 죽음을 끌어내는 윤리적 차원의 질문은 너무 무거운 것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시대가 여전히 병석처럼 할리우드에 대한 함몰된 이해와 수용의 접근 방식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영화를 좋아하는 두 명의 인물로 구성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병석처럼 미국영화를 자신의 내면과 동일화 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있다면, 한 쪽에서는 끝없이 오리지널을 질문하는 명길과 같은 인물이 있는 것이다. 현실은 병석과 명길 사이의 길 찾기에 가깝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그 어느 시기보다 ‘장르 영화’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장르 영화의 중심인 젊은 감독들은 시네필의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본격적인 영화 세대이다. 액션 영화의 류승완, 스릴러와 코미디를 아우르는 봉준호, 코미디,호러, 느와르, 웨스턴 등 다양한 장르의 스타일을 접수해 가는 김지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감독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장르를 기반으로 삼거나 다양한 장르적 스타일을 취하면서 산업적인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또한, 이들의 독특한 영화광적 기질은 동시대 영화담론을 선취하면서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이러한 세대의 가장 앞자리에 놓인 것이 박찬욱 감
독이다.한국영화의 스펙트럼이 풍성해지는 시기가 장르에 대한 관심과 맞아 떨어지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영화장르에 산업적인 속성이 강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산업적인 관심이 장르영화를 선동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하자면 외국의 경우, 장르와 영화 중흥기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라고 질문해볼 수도 있다. 프랑스의 누벨 바그(Nouvelle Vague)나 독일의 뉴저먼 시네마(New German Cinema) 운동의 경우, 미국영화에 대한 관심과 새로운 세대의 구성이 맞아 떨어졌으며, 이들은 미국의 장르영화 자체에 주목한 것은 아니지만 장르성이 한 축을 이루고 있다. 20세기의 영화사적 흐름 안에서 장르가 한 국가의 영화적 흥망성쇠와 축을 함께 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는 것이다.
산업적인 요구와 작가로서의 역량 사이에서 미묘한 줄다리기를 벌여야 하는 동시대의 젊은 감독들에게 장르는 중요한 매개의 구실을 하였다.이 과정은 한국영화가 할리우드라는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에게 중요한 태도 중의 하나는 장르의 순수한 모방이 아니었다. 봉준호를 비롯한 일군의 감독들은 장르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규칙을 비틀어 버림으로써 관객에게 친숙함과 더불어 위반의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장면                   영화 <괴물>의 한장면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끌어와 말하자면,새로운 감독들은 병석뿐만 아니라 명길의 욕망도 충분히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봉준호다. 그는 스릴러와 SF처럼 기존의 한국영화 장르 안에서 드물게 시도되었던 영역을 과감하게 끌어당겨 충격을 안겨주었다. ‘농촌 스릴러’라는 홍보 문구를 앞세운 <살인의 추억>(2003)은 1980년대를 풍미한 화성군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회고적 고증이었다. <괴물>(2006) 을 통해 펼쳐 보인 SF의 감수성은 거대한 특수 효과없이도 장르의 주요한 요소를 어떻게 취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였다. 이것은 단순히 할리우드적인 장르영화의 지향이 아니라, 보편적인 장르의속성과 개별적인 한국사회의 지역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장르영화의 변형은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봉준호는 자신의 영화 만들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자신이 운전하는 한 대의 버스가 있다. 처음에 이 버스의 종착지는 청량리행이다. 그런데, 사람들을 태우고 출발한 버스는 청량리를 향해 곧바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라, 을지로나 왕십리 등을 거치기 시작한다. 사람들 사이에는 가벼운 항의가 일어나지만 새로운 볼거리와 기존의 여정을 이탈하는 즐거움도 만만치가 않다. 결국 버스는 엉뚱한 장소에 종착한다. 그곳은 애초의 목적지인 청량리에서 아주 먼 곳은 아니다. 일부 승객은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 동안의 여행이 즐거웠기 때문에 크게 화를 내지는 않는다. 이것이 바로 장르를 활용하는 방식이다.이것은 장르라는 관습을 이용하여 감독(혹은 작가)이 원하는 대로 텍스트를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할리우드를 통해 통용되는 장르는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한 하나의
코드이지만, 목적지에 충실하다고 해서 여행에 만족스러운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볼거리가 여행에 대한 기대감과 의외성을 주기도 한다. 장르의 활용은 이렇게 근래의 한국영화가 새로운 력을 부여받을 수 있는 ‘흥미로움의 원천’이었다.

실제로 한국영화(문화) 안에서 장르에 대한 관심은 다양한 하위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연결되고 있다. 장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새로운 영화세대의 출현은 한국문화의 담론을 향한 새로운 가능성을 드러내면서 기존에 한국영화가 지니고 있는 특성들에 대한 반성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중요한 것은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나 박찬욱의 <올드보이>(2003)가 보여주고 있듯이 장르의 틀은 그 자체로 완성되거나 견고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문화와 끊임없이 긴장하면서, 스스로 해체되고 새롭게 구축되는 과정을 겪는다. 장르는 동시대 문화의 간섭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영화의 역사안에서 내파(implosion)를 겪으며 새로운 에너지를 분출한다. 내파의 긴장이 밖으로 드러날 때, 관객들은 공포와 전율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며 친숙함과 새로움 사이의 동력을 확인한다.

오래 전부터 장르를 표방해 온 미국(할리우드) 영화는 내파를 가능케 하는 일종의 뇌관이되어 주었다. 미국영화에 대한 ‘수용과 성찰’이라는 두 가지 얼굴을 동시에 담아냄으로써(다시 말해병석과 명길의 모습을 하나의 몸으로 구현함으로
써)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했다는 것은 그래서 흥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할리우드 키드다. 비록 이류 감독인 명길의 양심은 병길의 병든 자화상을 폭로하였지만, 명길조차 병석의 시나리오로 만든 영화의 완성도와 세간의 반응
에 매혹될 수밖에 없었다. 그 긴장관계는 할리우드와 한국영화의 거리가 현존하는 한, 줄다리기를 펼칠 수밖에 없는 시간과 거리의 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