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과 런던의 거울 이미지

<금지된 브로드웨이>한장면

브로드웨이 뮤지컬사가들은 1980년대를 ‘영국의 침입(British Invasion)’ 시대로 규정짓는다. 1960년대부터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기성세대의 낡은 전유물로 퇴락하여 더 이상 신선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차였고, 이러한 시점에 들어온 영
국 뮤지컬은 미국의 대중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지금, 뉴욕과 런던은 세계적인 뮤지컬 본산지로 동등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이 지위는 ‘관광객들이 꼭 관람해야 하는’ 뉴욕과 런던의 유명 뮤지컬들을 패러디한 <금지된 브로드웨이 Forbidden Broadway>와 같은 작품에 의해 풍자되기도 한다. 비주류 감각의 이 작품이 비웃는 대상은 두 거대 ‘뮤지컬 랜드’에서 공연히 이루어지는 과장된 상업적 포즈들과, 그로 인해 과대평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주류 작품들의 아우라이다. 이 불경한 풍자는 거울과 같은 두 시장의 안정성과 대등함을 아이러니컬한 태도로 표상한다.

놀랍고 재미있고 세련된
한국 뮤지컬 장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언제나 ‘놀랍고, 재미있고, 세
련된’ 문화였다. 한국에서 공연된 1960년 초반의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에서 2009년의 <드림걸즈Dreamgirls>와 <스프링 어웨이크닝Spring Awakening>에 이르기까지, 브로드웨이 뮤지컬 수입의 맥락에는 상대적 열세에 놓인 한국 뮤지컬에 놀라움과 재미와 세련됨을 선사한다는 모토가 넘쳐났다. 1960년대의 유치진(柳致眞, 1905~1974)이 브로드웨이 시찰을 통해 얻은 것은 빠르고 화려한 ‘현대적 감각’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침체된 당시의 한국 연극에 미래적 대안이될 것이라는 관점이었다. <포기와 베스>는 이러한이유로 선택되었다. 그런가하면, 2009년의 <드림걸즈>는 한미 공동제작과 미국 순회공연이라는 작품외적 상황을 유독 강조하면서 화려하고 세련된 무대와 의상을 마케팅의 주요 포인트로 삼았다. 한국뮤지컬의 성장을 브로드웨이에 필적할 만한 것으로 내세운 이러한 마케팅 방향에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에 대한 오래된 열등감이 이면에 전제되어 있다. 또 <스프링 어웨이크닝>에 대한 사전 기대감은 ‘모던한 록으로 사춘기의 성(性)과 반항을 여과없이 노래한 새롭고 놀라운 뮤지컬이 출현했다’는 대중적 인식의 결과물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뮤지컬 문화에 민감한 인터넷과 잡지 등의 미디어들은 최신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향한 이러한 인식을 선두에서 이
끌었다.

정전은 곧 상품이 된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대한 한국 뮤지컬의 뿌리 깊은 애정은 사실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뮤지컬이 원래 유럽의 공연양식에서 비롯되었다 할지라도, 한국에서 뮤지컬은 처음부터 미국의 것이었다. 한국에서 뮤지컬이 시도될 즈음 이미 대중들은 할리우드에서 수입된 뮤지컬 영화와 한국전쟁(1950~1953) 이후 미8군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한 재즈와 맘보를 통해 미국문화의 정서와 감각을받아들이고 있었고, 뮤지컬은 이러한 맥락을 타고
들어왔다. 따라서 뮤지컬은 미국의 백인문화, 도시문화의 일종으로 개념화하면서 한국의 대중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대중의 정서에 민감한 단체들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공연에 적극적이었다. ‘현대극장’이 그 대표적인 단체였다. 1980년대 들어 <아가씨와 건달들>이 소위 대박을 터뜨리자,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대중적 소구력(訴求力)은
수위를 더욱 높여갔다. 이후 롯데월드예술극장과 삼성영상사업단 등 대기업들의 뮤지컬 개입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입지를 더 굳건하게 만들면서, 향후 뮤지컬의 산업화를 주도할 텍스트의 경계를 확실히 했다. 따라서 1990년대부터 한국의 뮤지컬 장안에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텍스트로 한 문화산업화에 대한 관심과 한국적 뮤지컬에 대한 고민이 평행선을 그리며 지속되었다.

뮤지컬<아가씨와 건달들>미국판 포스터(좌)

한국판 포스터(우)

사실 자기인식의 과정은 경계가 그려지고 타자가 구성되는 과정의 다른 이름이다. 한국 뮤지컬은 이러한 자기인식에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부터 창작 뮤지컬의 장은 역사와 설화를 소재로 한 뮤지컬을 선보이면서 ‘한국적’인 것의 정의와 내용에 집착해왔다. 화려한 도시적 감각의 무대와 갑작스런 해피엔딩, 그리고 이러한 세계와 부합하는 쇼튠(show tune)뮤지컬에서 불리는 노래은 타자들의 것으로 배제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도시를 중심으로 한 소비대중의 성장을 주목하며, 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뮤지컬의 개발이 한국 뮤지컬 시장의 확장을 위한 핵심 과 제임을 강조했다. 뮤지컬은 이미 문화가 아닌 상품이라는 논리가 이러한 관점을 지배했다. 그들에게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매혹적인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텍스트 생산능력이 부족한 한국 뮤지컬 시장의 약점은 이문화(異文化)와의 경계를 흐리고 적극적으로 수용할 때 보완될 수 있다는 환상적이며 낙관적인 전망이 그들을 견인했다. 따라서 이러한 이
중적인 자기인식의 태도는 수많은 경쟁관계와 배타적·독점적 욕망의 고리들을 낳았고, 이 자체가 한국 뮤지컬 장의 오래된 구도로 존재했다. 언제나 후자의 입장이 대중들의 실질적 애호를 받아왔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한국 뮤지컬의 퓨전화 현상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이러한 구도 안에서 착실히 정전화의 과정을 밟아 왔다. 대니(Danny)와 샌디(Sandy) 뮤지컬 <그리스Grease>의 남녀 주인공들이 쇼튠을 노래하다가 영어의 톤으로 한국어를 발음하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거의 매년 <지킬 앤 하이드Jekyll & Hyde>가 공연될 때마다 지킬·하이드에 캐스팅된 배우들이 스타의 반열에 들어서거나
스타급의 배우임을 재확인 받는 것도 역시 익숙하다. 2009년의 메가톤급 프로젝트인 <드림걸즈>가 한미 공동제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제공한 1981년의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대본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도 정전의 지위를 인정해야 하는 우리의 입장을 또 다시 각인시킨다. 그러나 상황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대중들
에게 정전처럼 인식되고, 이러한 인식은 시장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티켓파워를 지닌 상품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정전화는 1990년대부터 단초를 보였던 뮤지컬의 산업화를 현실화시킨 핵심기제였던 셈이다.

‘한국적’인 것을 주장하던 창작 뮤지컬들의 색깔이 ‘퓨전화’하고 있는 양상은 따라서 브로드웨이 뮤지컬과의 영향관계 아래서 주목해야 할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기대에 비해 주목할 만한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던 2007년의 <대장금>이 2009년
에 의상과 음악적인 면에서 완전히 퓨전화되어 재탄생한 이후, 시상제도에 의해 그 가치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한국적 로컬리티(locality)의 순수한 주장이 우리의 뮤지컬 장에서 그다지 매혹적이지 않음을 확인시킨다. 로컬의 문화는 결국 이주하는 사람들, 미디어에 의해 지배받는 사람들에 의해 새롭게 구성되는 역동적인 ‘과정’인 것이다. 앞으로도 한국의 뮤지컬 장은 이러한 문화적 현상을 지속적으로 보여줄 흥미로운 공간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