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고살길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었을 때, 서울이라 답하는 사람들은 다들 어디에서 살았을까? 교남동, 가회동, 부암동, 필운동, 창신동, 청운동, 사직동, 무악동, 삼청동, 이화동, 혜화동, 명륜동, 숭인동 등 40여 년 전까지 서울 사람들의 대표적인 주거지는 종로였고, 600여 년이라는 서울의 역사만큼 시간의 층을 켜켜이 가지고 있는 곳도 종로의 구석구석이다. 서울의 옛 도시 종로에 대해서 지금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지.

종로구는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보유한 골목길을 선정해 옛 서울을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알리고자 고샅길 20코스를 개발 중이다. 좁은 골목길을 의미하는 순 우리말인 고샅길을 관광 상품의 이름으로 하고, 제주의 올레1길처럼 걸으면서 체험할 수 있는 내용을 담으려 하고 있다. 고샅길 20코스는 동의 각 특색을 넣어서 코스의 이름을 정하고, 쉽게 걸을 수 있게 2시간 정도로 구성되었다. 종로구는 코스 지도와 이야기 등이 실린 안내판과 안내책자, 그리고 해설사를 이용하여 활력을 불어넣고, 시범운영을 통해 발견된 문제점을 보완한 뒤 전문가의 조언을 구해서 2010년에 확정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는 평창동, 가회동, 삼청동, 인사동, 청계천, 대학로, 혜화동 등 사람들에게 뚜렷한 문화적 정체성을 인식시킨 지역들을 제외하면, 낡고 오래되고 불편하다는 인식에 인기가 별로 없는 오늘날의 종로가 그 가치를 인정받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기회이다. 도대체 우리는 종로의 구석구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종로 고샅길 20코스를 살펴보면, 주말에 ‘놀러’가는 곳들도 포함되어 있다. 가회동의 북촌 한옥길 코스에는 최근 몇 년 안에 인기를 얻어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삼청동길과 낙고재(樂古齋)2, 청원산방(淸圓山房)3 등이 포함되어 있고, 부암동 생태·문화 탐방코스에는 석파정(石坡亭) 조선말기의 별장, 서울유형문화재 제26호, 청운공원의 <커피프린스 1호점> 2007.7.2~8.27 방송된 MBC드라마 촬영지 등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종로 1,4가 문화적 갯벌, 다양성 코스에는 조계사 견지동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의 직할교구의 총본사, 인사동, 탑골공원, 피맛골4에서 종묘까지 서울의 랜드마크가 되는 곳들도 당연히 들어가 있다. 그런데 리스트를 살펴보니 생소한 것들이 눈에 많이 띈다. 먼저 고샅길의 첫번째 코스인 교남동의 역사·문화 기행코스를 살펴보면, 돈의문(敦義門)5 터와 홍난파(洪蘭坡, 1898~1941) 가옥, 권율장군(權慄將軍, 1537~1599) 집터, 단군성전은 이름만 봐도 어떤 곳인지 알겠는데, 경교장(京橋莊)6과 황학정(黃鶴亭) 서울유형문화재 제25호, 대한제국 때의 누정부터는 헷갈리기 시작하고, 딜쿠샤(Dilkusha)는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교남동 코스를 살펴보자. 시작은 돈의문 터이다. 돈의문은 흔히 서대문이라 부르는 곳으로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서대문역 강북삼성병원 정문 앞에 ‘돈의문 터’라는 표지만 있을 뿐이다. 기행코스의 첫 번째가 일제에 의해 계획적으로 소실된 문화재라니 서글픔이 앞선다. 다음엔 뭔가 생생한 것을 볼 수 있으려나 기대하면서 몇 발자국만 옮기면 경교장이 나타난다.

청운공원

경교장은 백범 김구 선생이 해방 후부터 저격 사건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시던 곳으로 이화장, 삼청장과 함께 대한민국 건국활동의 3대 명소이자, 1930년대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이렇게 역사적 가치는 충분하지만 막상 앞에 서면 병원의 부속 건물인 것 같은 아쉬움이 느껴진다. 그에 비해서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홍난파 가옥은 보존 상태가 나은 편이다. 가옥 앞에는 소공원이 있고, 건물 외·내관도 잘 정비되어 있으며, 서울시교육청과 평생학습을 연계하는 등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소통하는 일도 하고 있다. 그러나 교남동 골목의 집들을 지나서 만나게 되는 딜쿠샤는 사정이 다르다. 행복한 마음, 기쁨, 이상향을 의미하는 힌두어인 딜쿠샤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이 집은 3·1독립선언문을 신생아 아들의 침대 밑에 숨겨 3·1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미국인 특파원 알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 1975∼1948)의 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으로 상황이 나빠져 테일러 가족이 이 집을 떠난 후 집은 점차 낡게 되었다고 한다. 헌데 현재 사람이 살고 있어서 들여다보기가 불편한 곳이었다.

돈의문 터

집이 없어지지도, 크게 손상되지도 않은 채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 남아있는 딜쿠샤를 비롯해서 경교장과 홍난파 가옥이 있는 교남동 골목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면 좋을지 생각해 본다. 유럽 풍의 마을을 상업시설로 예쁘게 만들어 놓은 프로방스 마을이나, 개화기 이후의 모습으로 꾸며놓은 영화세트장 같은 곳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 진짜는 아니지만 뭔가 이국적이고, 향수를 자아내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주변 환경의 정비라는 과제가 있기는 하지만, 경교장과 홍난파 가옥, 딜쿠샤는 누군가의 생활공간으로서 실제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이고 서울의 근대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흥미로운 건축물이기도 하다. 규모는 차이가 나지만 요쿄하마의 야마테(山手)외국인 마을7처럼 잘 보존되고 정비된 문화유산에 사람들은 더 많은 애착을 가질 것이다.

달쿠사                                                                                                    경교장

그리고 이곳이 고샅길 20코스를 통해서 잘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상상해본다. 왜 이곳에 집을 지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주변의 집들에 포위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테일러 가족이 이 집에서 보았던 서울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고. 마찬가지로 경교장에 김구 선생이 계시고, 홍난파 가옥에 홍난파 선생이 계셨을 때의 모습을 생각해본다. 복원 작업을 통해 건물의 제 모습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샅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도록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김구 선생과 동료들의 일상적인 생활 동선 안에서의 경교장의 역할과 위치, 홍난파 선생이 그 당시 독일인 거주지역에 살게 되신 계기와 주민들과의 교류, 테일러 가족 이후에 딜쿠샤에 살았던 사람들의 사연과 같은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점점이 하나하나 떨어져 있는 문화유산을 길의 형태로 잇기 위해 앞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에 상상력이라는 줄을 이용한다면 재미있는 고샅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교남동 코스에는 근처의 서울성곽과 사직공원 옆의 단군성전 그리고 조선시대의 궁술연습장이었던 황학정을 연결해 놓았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앞의 돈의문, 경교장, 홍난파 가옥 그리고 딜쿠샤와는 거리는 가깝지만 주제 상으로는 단절된 느낌이 있다. 아마 2시간 정도의 거리와 어느 정도 균등한 볼거리 소재들을 연결시키려고 근처에 있는 단군성전과 황학정을 코스 안에 넣은 것 같다. 그러나 고샅길 20코스는 겹치고 연결되는 것이 많으니, 돈의문 터에서 딜쿠샤까지는 일제 시대와 해방 전후의 역사를 주제로 하여 사직동 성지코스에 이미 들어가 있는 단군성전, 황학정과는 나누었으면 한다. 그리고 딜쿠샤에서 어느 방향 어느 정도면 접근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면 충분할 것이다.

고살길 코스 안내표지판

주제별로 코스를 나눈 것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정순왕후(定順王后,1440~1521) 추모 답사코스이다. 창신동과 숭인동에 걸쳐 있는 이 코스는 단종을 유배지로 보낸 후 단종 비(妃) 정순왕후가 어떻게 살았는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현재 여성문화유산연구회의 정기적인 답사가 있는 코스로, 단종이 영월로 유배 갈 때 마지막으로 이별을 했던 영도교(永渡橋)청계천의 다리 중 하나에서 관원의 눈을 피해 부녀자들이 정순왕후를 도와주기 위하여 열었던 여인시장(女人市場)8, 단종을 그리워하면서 영월 쪽을 바라보았던 동망정(東望亭)과 동망봉9, 평생 혼자 살았던 정업원(淨業院) 옛터와 정순왕후가 비단을 빨면 자주색 물감이 들었다는 슬픈 전설이 어려 있는 자주동샘(紫芝洞泉)을 연결한다. 그리고 자주동샘의 자리는 지봉선생 이수광(李?光, 1563~1628)이 살았던 비우당(庇雨堂) 옛터와 같은 곳이고, 이 길은 서울성곽과 삼선동 골목길을 지나 낙산공원과 대학로 코스로 이어진다.

고샅길은 이제 시작이므로 고샅길이 제대로 운영되기까지는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앞에 언급한 것 이외에도 주제를 찾아 코스를 연결시키는 일, 길을 찾아서 따라오게 할 수 있는 표식과 표시판의 활용, 팜플렛 등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알리고 홍보하는 일 등등이다. 하지만 고샅길을 추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나의 거주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관광코스라는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동망정과 동망봉은 현재 지역주민들의 휴식처인 숭인근린 공원의 테두리 안에 있고, 주변은 창신동과 숭인동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생활지역이다. 고샅길을 관광하는 사람들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어떤 시선을 나눌지에 대한 생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고샅길 속에 있는 문화유산의 장소성을 충분히 재현한다면 주민들의 자랑스러움이 생기고 그것이 고샅길에서 관광객과 지역주민의 융화로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이미지 제공_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