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어 맨하튼

5년 전 뉴욕에 맨 처음 도착해서 느낀 인상은 건물들이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새로 생긴 것들은 트라이베카(Tribeca) 지역의 은행건물과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 부근의 몇몇 건물뿐이었다. 나머지 지역에서는 직사각형의 빼곡한 건물들 사이로 지나가는 노란 택시를 마차로 대신한다고 하더라도 별로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글을 쓰기 위해 머물고 있던 할렘(Harlem)의 집도 70~80년은 족히 넘은 건물이었다. 내부는 리모델링을 했는데 외부는 시의 규제 때문에 고치지 못한다는 주인의 말을 들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현관 입구의 장식과 창틀 위의 무늬가 맨해튼 브리지(Manhattan Bridge)를 지은 건축가가 디자인한 것이라서 그렇다나. 세계 최고의 도시라면 모든 것이 최신식에 가까워야 한다는 생각은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보존할 것은 싸워서라도 보존하지만,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면 상상을 뛰어넘는 아이디어로 발전시키는 사람들이 뉴요커들이었다. 개발과 보존, 예술과 경제의 균형감각을 가진 시민 의식이 세계최고의 도시를 만드는 핵심적인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할렘 

뉴욕의 외관과 거주민, 산업 활동은 보이지 않는 경계선으로 뚜렷이 구분되어 있다. 로어 맨해튼(Lower Manhattan)은 뉴욕의 발상지로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한 금융업이 발달했다. 금융 자본을 뽐내기라도 하듯 현대적인 고층빌딩이 밀집해 있으며, 9·11사태(2001)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자리는 기념관과 함께 현대식 교통 허브를 구상 중이다. 그 위로는 스카이라인이 낮아지면서 차이나타운, 이탈리아타운, 소호(Soho)와 첼시(Chelsea) 지역이 나타난다. 소호는 고급 패션, 가구점이 밀집되어 있고 첼시에는 갤러리 타운이 형성되어 있다. 미트 패킹(meat-packing) 공장을 개조해서소호 쇼핑몰과 갤러리로 만들거나 폐허가 된 지상철을 복합 문화공간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소호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좀 더 위쪽은 미드타운(midtown)으로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Empire State Building)과 타임스 스퀘어, 링컨센터(Lincoln Center)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뉴욕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이 밀집해 있다.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펜역(Penn Station), 동쪽에는 그랜드센트럴역(Grand Central Station)이 있는 교통의 중심지기도 하다. 북쪽으로 가면 센트럴파크(Central Park)가 자리하고 있다. 뉴욕의 시내가 답답하더라도 북쪽에 숲과 들판, 호수가 있는 공원이 있다고 생각하면 숨통이 트인다. 공원의 동쪽에는 박물관들이 즐비해 있고 어퍼 이스트(Uper East)에는 상류층이, 더 나아가면 라틴계 사람들이 모여 산다. 센트럴 파크 북쪽부터 할렘이 시작되고 서쪽에는 콜롬비아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할렘은 예전 유럽인들이 거주했던 양식 그대로의 집과 교회가 남아 있어 이채롭다. 이런 각 지역마다의 특색은 미리 계획했다기보다는 도시가 발달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변화한 것으로(소호가 공장 지역에서 갤러리 타운, 고급 패션 중심지로 변했듯), 뉴요커들의 머릿속에는 맨해튼이 그런 식으로 구분되어 있다. 물론 여타 대도시들도 특성에 따라 어느 정도 구분이 되어 있지만 과연 뉴욕만큼 자연스럽고 명확한지는 의문이다. 뉴욕이 특정한 이미지의 도시가 아닌 다양성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산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구분은 행정기관이 나서서 해야 되는 일은 절대로 아니지만 말이다.

센트럴파크

보이지 않는 경계선으로 이루어진 뉴욕의 지도에 가장 크고 푸른 지역은 센트럴파크다. 이곳은 뉴욕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시민들에게 사랑받으며 보존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다. 1860년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 1822~1903)와 복스(Calvert Vaux, 1824~1895)의 설계로 완성된 센트럴파크는 놀랍게도 공원 전체가 사람의 설계로 이루어진 인공 공원이다. 면적이 하도 넓어(가로 800m 세로 4㎞) 하루 종일 걸어도 구경을 다 못할 정도다. 언젠가 이곳의 숨은 곳곳을 알고 싶어 투어에 참여한 적이 있다. 투어는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참가비도 물론 무료였다. 목소리 작은 할머니가 진행하던 서쪽 중심에서 동쪽을 가로지르는 투어, 그리고 북쪽의 정원 투어, 청소년들이 직접 훈련을 받아서 진행한 투어, 센트럴파크의 숨겨진 식물과 동물에 관한 투어 등에 참여했다. 관광객이 오기도 하지만 주로 근방에 사는 뉴요커들이 와서 센트럴파크의 숨겨진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매년 여름 잔디밭에서 열리는 뉴욕 필하모닉 공연, 노천 야외극장에서 열리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oeare, 1564∼1616) 연극 무대, 그리고 각종 무료 공연이 수놓아지는 곳. 오후만 되면 아이팟(i-pod)을 꽂고 달리는 사람들로 붐비는 센트럴파크가 제대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시민들의 힘이 가장 컸다. 실제로 공원은 비영리 단체인 센트럴파크보존위원회(Central Park Conservancy)가 시의 위탁을 받아 운영한다. 공원을 각 지역별로 나누어 효율적으로 관리하며, 적재적소에 자원봉사자들을 투입하고 후원 행사도 지속적으로 진행한다. 내가 참여한 모든 투어는 이 단체에서 진행했다. 물론 누구나 투어 가이드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역사와 공원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쓰레기를 치우거나 행사 진행 도우미 등의 단순한 자원봉사도 할 수 있다. 센트럴파크를 사랑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녹색 티셔츠를 입고 청소하는 광경은 공원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랜드센트럴역                                       유니언 스퀘어역                                    펜역

한편 맨해튼의 곳곳을 동맥처럼 연결해주는 것은 지하철이다. 언제나 러시아워인 뉴욕의 지상 교통 수단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뉴욕의 명성만큼 지하철도 멋질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뉴욕의 지하철은 어둡고 지저분하고 복잡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만들어진 지 100년이 넘은데다(1904) 워낙 복잡해서 한꺼번에 수리할 돈이 부족한 것이다. 1900년대 초 뉴욕에 초고층 건물이 세워지고 많은 사람들이 일할 수 있게 되자, 좀 더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옮기기 위해 지하철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중절모자를 쓴 신사와 우아하게 옷을 차려입은 여인들이 타고 다녔지만, 지금은 하루에 5,000만 명의 이용자들이 26개의 노선, 468개의 지하철역에서 승차하며, 368㎞의 루트를 따라 24시간 쉬지 않고 이동한다. 지하철에서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지하철 환승장에서 첼로나 키보드를 연주하는 사람, 지하철 안에서 묘기를 부리거나 노래를 하며 동전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서비스를 하며 팁을 바랄 뿐, 믿을 수 없는 사연이 적힌 종이를 던지며 구걸하지는 않는다. 지하철에서 지도를 보는 관광객들, 일을 하러 가는 샐러리맨과 학생들, 나처럼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사람들까지 그들은 피부색과 언어, 국적이 다르지만 모두가 뉴욕의 시민들이다.

모두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지하철역들이 미묘하게 다른 것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역명이 새겨진 타일 문양이 다르고, 벽에 그려져 있는 것들도 시대별로 다르다. 집필실이 있던 할렘 116번가 역의 벽을 자세히 보면 이곳에 살았던 유명한 사람들, 사건들, 볼만한 곳 등이 타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니언스퀘어역(Union Square Station)에 청동으로 만들어진 꼬마 난장이들이 과연 몇 명인지 지나갈 때마다 살펴보게 된다. 자연사박물관역에는 고래와 물고기들이 춤을 춘다. 100년 전의 지하철 회사였던 IRT의 로고를 아직까지 볼 수 있는 역도 있다.

맨해튼을 ‘the city’라고 부르는 것은 세계인의 마음속에 ‘도시’라는 이미지가 뉴욕으로 각인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의 환상 때문이든, 혹은 다른 영화나 책 때문이든 상관없다. 관광객으로서 뉴욕을 방문한다면 그런 환상을 쫓는 것에 만족할 수 있겠지만 뉴욕에 조금만 더 머물러 본다면 이 도시가 오래되어 보이는 이유와 왜 오래된 것들이 최신식으로 바뀌지 않는지, 복잡하고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어울려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뚜렷하게 구분된 곳에서, 150년도 넘은 센트럴파크에서, 지저분하지만 신기하게도 잘 운행되는 100년이 넘은 지하철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