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자의 주름이 깊어질수록 그 음악 또한 더욱 깊어진다. 2009년 늦은 가을에 접한 아코디언 연주자 심성락의 앨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이 잠언을 완벽하게 충족시킨다. 심성락은 음악 인생 50년간 최희준과 나훈아부터 신승훈과 김건모, 장윤정까지 당대 최고 가수들의 음반 작업에 참여했다. 국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아코디언 연주자이지만 지금까지 그 자신이 주인공으로 나선 적은 없었다. 공식 데뷔 앨범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통해 처음으로 전면에 나섰고, 평소 우리는 지나쳐왔지만 항상 그 자리에 있던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아코디언은 벨로우즈(bellows) 주름진 공기주머니에 바람이 담겨야 소리가 난다. 오른손이 건반을 누를 때 왼손으로는 끊임없이 벨로우즈에 바람을 불어넣어야 비로소 노래가 완성된다. 세찬 풍파를 넘어선 칠십대의 노(老) 연주자는 자신의 첫 앨범에서 제목처럼 바람을 일으켜 만든 노래들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수록곡은 <인어공주>, <봄날은 간다>, <효자동 이발사>, <달콤한 인생> 등의 영화, 드라마 삽입곡들과 새 창작곡들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적인 아코디언 연주자 리샤르 갈리아노(Richard Galliano)도 이번 앨범에 참여해 피아졸라(Astor Piazzolla, 1921~1992) 의 <리베르탱고Libertango>와 이봉조(1931~1987)의 <꽃밭에서>를 함께 연주했다. 이 앨범에서 심성락은 서정적이면서 때로는 비장하게 연주하지만 강변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아코디언과 함께 한 50년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그의 연주를 특징짓는 한마디는 ‘노래하는 아코디언’이다. 연주를 듣고 있자면 20세기 바이올린 연주사에 한 획을 그은 헨릭 셰링(Henryk Szeryng, 1918∼1988)이 연상된다. 셰링 특유의 따사로움과 친근한 연주는 심성락의 것과 흡사하다. 둘의 연주 모두에서 느껴지는 가슴 깊은 곳의 애잔함을 담은 음색 또한 인간미 넘친다. 심성락과 셰링은 대중에 알려지기 전 행보도 비슷하다. 1956년 연주여행 중이던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ur Rubinstein, 1887~1982)의 눈에 띄어 세상에 알려질 때까지 셰링은 콩쿠르 입상 경력은 물론 변변한 레코딩 하나 없었다. 그는 세상으로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동안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며 내적인 성숙을 이루고 통제하는 법을 배웠다. 때문에 그의 연주는 아무리 힘든 초절기교의 곡도 일견 편안하고 따스하게 느껴진다. 그는 웬만한 연주자들이 공들여 연주할 것을 마치 연습하는 것처럼 연주하는데, 거기서 나오는 음악은 놀라울 만큼 견고하고 안정적이다. 또한 감정의 기복 없이 평탄하고 덤덤하게 끌고 나가는 듯하지만 전체적인 구도가 완벽하게 잡혀있다. 감정과 기교의 조절로 탄탄한 안정감이 생기는 것이다.

[앨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앨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통해 만끽할 수 있는 심성락의 연주가 셰링의 연주와 흡사할 수 있는 이유는 감정과 기교의 조절을 통한 안정감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화려함 등의 외적인 치장을 거부하고 작품의 본질을 향해 묵묵한 걸음걸이로 다가가는 셰링의 베토벤과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앨범과 성격이 닮아있다.
방송국 악단의 멤버를 거쳐 스튜디오 세션맨으로 활동하며 50년 만에 첫 음반을 낸 심성락. 이 노 연주자의 앞으로 꿈은 병원에서 죽지 않는 것이다. 그는 녹음실이나 무대에서 연주를 하다가 쓰러져서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아코디언이 점점 무거워진다는 그가 정말로 쓰러지기 전에 우리 가요가 수록된 후속 앨범을 출시했으면 좋겠다. ‘뽕짝’이라고 불리며 다소 천한 대상으로 취급받는 우리 가요가, 한껏 부풀려진 그의 아코디언에서 울려퍼지는 따스하면서도 애잔한 음색을 통해 매력과 위대함을 알릴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