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동양에는 지령(地靈), 서양에는 지니어스 로사이(genius loci) 라틴어로 토지의 수호신이라는 뜻 라는 개념이 있다. 건축론에서 지니어스 로사이에 관한 논자로는 노르웨이의 크리스찬 노베르그 슐츠(Christian Norberg-Schulz, 1926~2000)와 일본의 스즈키 히로유키(鈴木博之)가 있다. 노베르그 슐츠의 저서 『지니어스 로사이』(1980)는 현상학적 건축론의 하나로, 그는 건축을 지니어스 로사이의 구체화로 파악하고 지니어스 로사이와의 관계 속에서 건축의 실존적 의의를 찾으려 했다.

한편 스즈키는 저서 『도쿄의 지령』(1990)과 『일본의 지령』(1999)에서 도시계획과 제도를 둘러싼 역사가 아닌 개별 토지에 관한 역사의 집적을 그려냈다. 그는 이를 위한 단서를 18세기 영국에서 주목 받은 지니어스 로사이라는 개념에서 찾았다. 주지하듯이 그 시대의 미의식에서는 픽쳐레스크(picturesque)1라는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한 관점에서 지니어스 로사이는 조형의 출발점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스즈키가 참고로 한 것은 18세기 런던의 역사를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개발의 역사로 서술한 연구였다. 그는 미나토구(港區) 롯뽄기(六本木)의 임야청(林野廳) 일본의 농림수산성 소속의 임업(林業) 관련기관 숙사 터에 잠들어 있던 황녀 카즈노미야(??院宮, 1846~1877)일왕 닌코(仁孝, 재위 1817~1846)의 8번째 딸이자 도쿠가와(?川) 막부 14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川家茂, 1846~1866)의 부인에 관한 기억을 발굴하고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 1830~1878)메이지유신의 중심에 있던 소위 유신삼걸(維新三傑) 중 한 사람 암살 현장이었던 치요다구(千代田區) 키오이(紀尾井)거리 부근의 100년 역사를 돌이켜 보았다. 그것은 토지 소유자, 거주자 이야기에 담긴 메이지 이후의 근대사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료로는 지도와 사사(社史), 전기(傳記) 및 지적도(地籍圖) 등이 사용된다. 스즈키는 도쿄의 근대를 거주자들에 관한 전기의 집적(集積)으로 나타내고 있다.

스즈키는 지령의 개념 속에서 장소의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 배경과 그 성격을 풀어내는 열쇠를 찾아내려고 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적 구조를 해독하기 위한 개념이다. 지령론(地靈論)은 도시를 거대한 공간의 구조체로 파악하지 않고 개개의 장소가 뜨개질처럼 하나하나 짜임새 있게 만들어진 특수한 구조임을 나타내려 한다. 지령론이 밝히고자 하는 잠재적 구조란 무엇인가. 그것은 장소가 가지는 언어적인 구조로서, 도시가 지니는 텍스트성이다. 도시와 정원은 전통적으로 일본의 문학작품에서 기억과 관련한 장소의 집합체로 이용되어 왔다. 그러한 장소가 곧 명소(名所)이며 우타마쿠라(歌枕) 와카(和歌)를 짓는데 소재로 사용된 명승지이다. 아름다운 풍경은 예를 들면 오우미팔경(近江八景) 일본의 비와호(琵琶湖) 남서부에 있는 여덟 곳의 명승지과 같이 오우미(近江) 지방의 명소 여덟 곳이 하나의 세트로 묶여 기억된다. 스즈키는 이것을 ‘공간의 보편성과 특이성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외계(外界)를 장소가 연달아 이어져 있는 것으로 해석하려 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의 지령』 참조 성스러운 장소인 절이나 신사도 마찬가지로 세트화 되어, 서른 세 곳, 여든 여덟 곳과 같이 33과 88이라는 장소의 집합체로 기억된다. 그리고 이 33 내지 88의 장소를 순번대로 둘러보는 것이 여로가 된다. 시코쿠(西國) 33관음성지 순례, 시코쿠 88관음성지 순례 등. 정원과 도시에는 팔십팔경(八十八境), 백경(百景)과 같이 볼 만한 장소가 88 혹은 100 등의 숫자로 만들어져, 사람들이 그곳을 둘러보며 즐길 수 있게  했다. 도카이도(東海道) 일본의 옛 행정구역으로 에도(江戶)~교토(京都) 부근이 해당를 여행하며 머물렀던 53곳의 역참 풍경을 그린 토카이도고쥬산쯔기(東海道五十三次)에서도 같은 구조를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도쿄가 가지는 군도적(群島的)인 성격에 대응한다. 도쿄는 긴자(銀座), 우에노(上野), 아사쿠사(淺草), 신주쿠(新宿), 시부야(?谷), 이케부쿠로(池袋)라는 소도시의  집합체로서 군도적 성격이 강하다. 도쿄는 수많은 소도시로 이루어진 모자이크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도시를 연결하는 질서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도시와 정원의 군도적 질서를 모형화한 놀이, 스고로쿠(雙六)가 있다. 이것은 두 개의 주사위를 던져 나온 눈의 숫자만큼 칸을 이동해 결승점에 먼저 도착한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이와 비슷한 게임은 서양에도 존재하지만 일본의 스고로쿠는 게임 전체가 명소를 둘러볼 수 있게 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에도(江戶, 1603~1867)시대 때 서민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칠복신(七福神)복을 전해준다고 알려진 7명의 신 순례는 그 방법이 스고로쿠와 비슷하다. 이것은 7명의 칠복신들에 대응하는 7개의 절이나 신사를 정해 하루 내지 반나절 동안 걸어서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현재 도쿄의 각 구(區)는 칠복신 순례를 진행하고 있는데, 미나토구(區) 칠복신 순례, 아자부(麻布) 칠복신 순례 등이 있다. 칠복신 순례에는 군도적인 장소가 연쇄적으로 나타나 도시를 조직화하는 원리가 반영되어 있다. 명소를 방문해 도시를 돌아봄으로써 이미지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져 도시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고로쿠와 같이 도시를 둘러보면서 도쿄의 군도적 질서를 떠올리는 것이다.

한편 서른 세 곳, 여든 여덟 곳, 팔십팔경과 백경을 구성하는 수많은 장소는 하나하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명소란 문자 그대로 ‘이름이 있는 장소’이다. 결과적으로 명소를 다니면서  33개, 88개, 혹은 100개의 이름이 열거된다. 수사학적으로 보면 수많은 이름을 열거하는 것을 열거법(enumeratio)이라고 한다. 열거법은 세계각국의 고대문학에서 많이 보이지만 일본문학에서는 근대까지도 열거법에 의한 묘사가 종종 나타난다. 열거법에 의한 묘사는 신들에게 바치는 공물을 열거한 노리토(祝詞)를 기원으로 하기에 ‘말의 포틀래치(potlatch) 축하연, 파티’로서 주술적, 축제적 성격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열거법이 츠쿠시(盡くし)명사 뒤에 붙어서 관련한 것을 모조리 열거한다는 의미라고 불린다. 츠쿠스(盡くす)는 탕진을 의미하는 단어로, 88 혹은 100개의 지명을 ‘츠쿠스’하는 것은 지명을 탕진하는 포틀래치적인 축제를 행하는 것으로 도시와 정원을 축제의 장으로 바꾸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토카이도교쥬산쯔기                                       칠복신상                          키오이거리

우타마쿠라는 후세의 와카(和歌)에서도 이따금 언급 되는데, 그것은 하나의 고유명사를 넘어 문학적 텍스트를 연쇄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색인 기능을 하게 된다. 이 경우 장소의 수사학적 구조는 문학사적 기억과 밀접하게 결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일본의 문학사에는 장소의 기억이 묻혀있다.

어떤 장소의 역사와 기억이 응축된 언어적 표현으로 지명을 꼽을 수밖에 없다. 지명이야말로 집단의 기억이 묻힌 장소를 알려주는 무엇보다도 확실한 표식이기 때문이다. 지명을 열거하는 열거법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0~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모더니즘 문학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프루스트는 「장소의 이름-이름」이라는 장에서 여러 도시 이름을 열거하고, 발음에서 연상되는 감각적 인상과 그것이 가져오는 축제적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경우 지명에 관한 기억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지명은 단지 그 단어의 울림만으로 감각적인 기쁨을 환기하고 있다. 지명은 장소의 역사와 기억을 이야기할 뿐 아니라 소리의 울림으로 그 이미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한 현상을 ‘무의식의 시학’이라 할 수 있겠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에 따르면, 무의식은 레토릭(수사학)의 구사로, 무의식이 특히 애호하는 것은 인명과 지명과 같은 고유명사를 조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뇨렐리(Signorelli)라는 인명을 망각한 프로이트의 유명한 에피소드를 보면 알 수 있다. 헤르체고비나(Herzegowina)에서 마차여행을 하던 중 이탈이아 회화에 대한 대화에서 화가 시뇨렐리(1450?~1523)의 이름을 망각하는 대신 볼트라피오(Boltraffio)와 보티첼리(Botticelli)만 떠올랐던 경험을 분석한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에서 발췌

“바로 직전의 화제(話題)였던 터키인들의 죽음과 성에 관련한 상념을 억누르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독일어의 상대방을 부르는 칭호(고유명에 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헤르(Herr) 및 이에 대응하는 이탈리아어 시뇨(Signor)도 억압받아 시뇨렐리가 생각나지 않게 되었다. 헤르(Herr)는 지명 헤르체고비나의 앞부분에 있는 헤르(Her)와 연관된다.2 한편 헤르체고비나와 한 지역으로 인식되는 지명 보스니아(Bosnia)의 보(Bo)는 보티첼리(Botticelli) 및 볼트라피오(Boltraffio)라는 두 개의 단어를 끌어내는 색인이 되고 시뇨렐리의 말미 엘리(elli)는 보티첼리의 말미(末尾)로 이동한다. 게다가 프로이트가 불치의 성적장애 때문에 자살한 환자의 부보를 받았던 지명 트라포이(Traffoi)가 억압된 채 이동한 결과 볼트라피오의 뒷 철자에 출현하는 것이다.(그림 참조) 문채론(文彩論)으로 말하자면 헤르(Herr)와 시뇨(Signor)의 사이에 있는 것이 은유적 유사관계이며 헤르(Herr)와 트라피오(Traffoi) 혹은 보스니아(Bosnia), 보티첼리(Botticelli), 볼트라피오(Boltraffio)의 삼자 사이에 있는 것은 환유적(換喩的) 인접관계이다.”『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

참조

프로이트는 이렇게 단어의 은유적, 혹은 환유적 관계에 근거한 도치에 의해 무의식적인 욕망과 억압이 표현되는 논리를 밝혔다. 지명의 열거가 포틀래치적 축제성을 띠는 것은 이런 식으로 열거된 소리의 울림이 무의식적 정동(emotion)에까지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20세기의 건축론, 도시론은 주로 공간을 중심 개념으로 다뤄 왔다. 지령론은 공간이 아닌 장소의 다양성에 착안한다. 지령이란 각각의 장소가 지닌 고유성이다. 다양한 장소의 군도적인 질서를 통해 도시를 파악하는 관점은 근대적인 공간개념을 상대화(相對化) 하고 전통에 뿌리내린 도시의 경험을 발굴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여기서는 일본을 예로 들어, 지령론을 통해 보는 도시의 텍스트적 구조를 인문학의 입장에서 고찰했다. 유사한 구조는 한국과 그 외의 문화권에서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번역_李閔基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