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습적으로 따르던 화풍의 주인을 버리고 스스로 화풍의 주인을 자처해 간 화인이 있다. 아니 기존의 화풍과 산수화적 경향들을 참답게 배워 결별한 뒤 그 이력을 새 화풍의 골수로 삼아 자존의 화격으로 옮아간 붓이 있다.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년간부터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때까지 살다간 겸재 정선(謙齋鄭敾, 1676~1759)은 조선 산수화 골동(骨董)의 궤적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회화적갱신 원리이다.

당대 대부분의 산수화들이 중국의 화첩이나 화본을 임모하거나 참조한 북종화 중심의 관념 산수를 보편적으로 추구했다면, 겸재는 문기(文氣)나 문자향(文字香)이 강한 남종화를 자기 나름대로 체득하고 변형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겸재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당대를 풍미했던 중국 화풍에 반기를 든 배경에는 풍경에 대한 독자적인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조선에 살면서 중국의 산수 아니 관념 속의 산수인 비실재(非實在)를 답습해야 하는 조선 화인의 자괴감이 조선의 명민한 화인, 겸재의 가슴속에 잉걸불처럼 일었다.

풍경은 단순히 특정한 시공간의 권위적인 전경이 아니라 존재의 현실적인 둘레로서의 교감과 감흥의 영역이어야 한다는 독립적 인식의 개념이다. 그것은 기성(旣成)의 박래품으로서 영원할 수 없는, 실물로 느껴지고 표현되는 그 순간에 또 다른 이미지로 태어나는 가변적인 실체인 것이다. 이 실물과 실체는 당대 중국 화풍과 견줘서 비교되는 우리 풍경에 대한 회화적 인식의 객관적 대상물로 적잖이 소외돼 왔던 실재였다. 관념적인 상상, 혹은 상상적인 관념의 산수들이 떠도는허상이라면, 겸재가 당대에 보고 느낀 조선의 빼어난 산수 풍경들은 곧 대상으로서의 실물로 맺힌 것이다. 그 실물들이 화인의 감흥과 교응을 받아 나름의 준법(皴法) 동양화에서 산악·암석 따위의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쓰는 기법을 포함한 저간의 화법과 화의(畵意)에 의해 산수화로서의 예술적 반응, 즉 그 회화적인 몸을 얻음으로써 독창적인 화격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북종화 중심의 중국 산수들이 관념적 허상을 추종하는 것이라면, 겸재의 조선 산수는 실재적 실상에 대한 창의적 접근을 뿌리로 삼는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개의 유사 개념이 파생된다. 정선은 실물을 다루었지만 그 실물의 과학적인 실체 묘사
에 관심을 두었다기보다는 그 실체의 인상적인 진실에 더 초점을 맞춘 화법의 창안자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선, <만폭동도>(18세기)


이 유사하면서도 과정의 정도가 다른 두개념 중 실물은 실경과 닿아있고 진경(眞景)은 실경의 감각적 정신적 인상과 관계된다. 이를 다시 보편적인 개념으로 환원하면, 실경이 사실(fact)을 지시한다면, 진경은 그 사실로부터 경험되고 인상적으로 습득된 진실(truth)을 수렴하는 것과 같다. 일단 화인 겸재는 관념으로서의 당대 화풍을 충분히 체득하고 습작한 후에 이런 당대적 현실의 문제에 주목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바로 자신이 살았던 17세기 이후의 산수화적인 시공간이었던 셈이다. 그에게 남·북종화로 대표되는 중국회화는 하나의 교조적이고 교과서적인 화첩 이상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당대의 회화적 화두로 받아들인 것은 바로 조선의 산수가 가지는 현상으로서의 실물과 그것의 미적 구현으로서의 실체였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화인 한 사람의 개별적 미학의 완성이라기보다는 관습적이고 지배적인 당대 화풍에 대한 예인의 전복적인 미학의 자세이자 기율로 작용했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곧 당대라는 시대적 시점과 조선의 산수라는 공간적 배경, 거기에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미학이 하나로 어우러져 이뤄낸 조선 산수화의 자의식, 곧 조선 회화의 존재론적 양식화였던 셈이다.이런 탓에 비록 겸재의 그림이 남종화의 영향을 기본적으로 품고는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진경의 바탕이 아니라 진경의 여줄가리로 느껴질 만큼 주변부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준법을 비롯한 다양한 화법과 조선의 실경에 교응하는 겸재의 화의가 무엇보다 당대의 수려한 조선의 산수를 득의적으로 화면상에 해석해냈다는 데 뜻이 있다. 이는 곧 진경산수화가 존재론적인 회화이자 독창적회화 매뉴얼을 내장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그러기에 겸재와 겸재 이후 조선 산수화의 중요한 흐름은 고정된 진경이 아니라 ‘흐르는 진경’ 곧 ‘변모하는 진경’들로 그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겸재의 진경산수 개념은 고정된 화법이나 표현의 전범들을 규정하는 세목들이 아니라 언제든 새로운 실경의 인상을 받아들이는 열린 개념이다. 겸재가 진경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경이 겸재를 하나의 하위 코드로 지정하며 더 넓고 깊은시간 속으로 흘러간다.

이는 곧 <오늘로 걸어 나온 겸재展>의 의미와도 맥을 같이 한다. 겸재 자신으로부터 물길을 연 진경의 화풍은 그것을 수용하는 다양한 방식의 화의에 따라, 또 현장 풍경들을 다루는 화법의 기호에 따라 그 물줄기는 갈라지고 또 확산돼 간다. 그것은 비단 17세기 이후 시작된 진경산수의 기운에서만이 아니라 조선이 끝나고 현대회화가 태동된 이래 현재까지 화인들의 미학적인 존재론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구현되고 있다. 그림 도구와 소재, 미술 장르 전반으로 확산되는 경향과 기미까지 이 전시는 진경의 정신이 스미고 배이며 융화되는 맥락을 거느리고 있다.

실경은 쇠퇴하고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 풍경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고정된 실경을 담보할 수는 없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하나의 아름답게 고정된 실경에만 머문다면, 그것도 언젠가는 관념의 풍경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겸재 이후 진경산수가 가지는 맥락적인 실존의 영구성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경을 대하고 실경을 마음에 품어 느끼되 그 실경으로부터 뽑아낸 감흥의 진실이어야만이 진경의 아우라를 거느릴 수 있는 것이다.

진경의 의취를 몸소 깨닫고 그 뜻에 연대한 화인들-최북(崔北, 1712~1786), 이인문(李寅文, 1745~1812), 강세황(姜世滉, 1712~1791), 장승업(張承業, 1843~1897) 등-에게서 고정된 진경의 면모를 찾기란 쉽지 않다. 설사 같은 현장의 풍
경을 그렸다 해도 화인들의 그림에 나타난 것은 저마다 다른 감흥의 세계로 각자 도드라진다. 문사(文士)적인 기질로 바라본 현장의 실경은, 관념이 아니라 정취였고 화법이 아니라 화의를 먼저 선취케 하는 정경이자 절경들로 다가왔을 터이다. 중국의 관념 산수의 하나인 남종화의 기운이 당대 조선 산수화의 분위기에 삼투되어 있는 이유도 이런 화인 그룹들의 신분과 일정한 연관이 있다. 몰락한 양반 가문이나 위항인(委巷人)이라 불리던 서인이나 중인 출신들인 이들 화인들은 비록 그 현실적 여건은 넉넉하지 못했으나 그 정신세계는 기존의 양반 사대부들의 인문적인 취향이나 사유체계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신분으로나 정신세계로나 경계인이었던 화인 그룹들이 안팎 세계를 보는 열린 마음을 자연스레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열린 시야를 지닌 겸재를 비롯한 당대의 열린 화인들은 관념이 실재를 지배할 수 없다는 당위에 서 있던 ‘산수의 현실주의자’였던 셈이다. 실재가 관념을 낳을 수는 있어도, 괴리감을 느껴오던 기존의 관념들이 실재를 언제까지나 지배할 수는 없다는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관념이 산수화를 관습적으로 저작해내는 동안 조선의 실경을 보는 감각의 눈은 퇴화되거나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산수 실경에서는 관념적 산수가 가진 분위기나 정신적 품격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일까. 그 해답은 관념 산수 자체가 실경에 대한 상대적인 인식이 없는 그림이라는데 한계가 있다. 중국의 산수나 조선의 산수를 굳이실경 차원에서 겨뤄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지만, 그우열의 결과를 어느 일방의 것으로 낙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 맥락에서, 절파(浙派) 화풍 중국 명나라 말기에 유행한, 필묵이 웅건하고 거친 산수화 유파의 화풍이나 안견(安堅, 1418~1452) 화풍조선 초기 궁중화가 안견이 중국의 다양한 화풍을 종합하여 독자적으로 이룬 화풍의 이상적 관념과 도가적인 화풍은 하나의 참고사항에 지나지 않을 수없었다.

화법은 가감하여 취하되 화의는 따를 수없었다. 관념 산수를 이뤄낸 화법상의 여러 준법을 비롯한 필법은 수렴하였다. 관념 산수를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념 산수를 넘어서기 위해 그 풍경의 진상을 표현해 줄 기존의 화법과 산수 준법들을온몸에 물들인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 관념을 이루는 화의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오로지 조선의 산수 진경에의 천착을 위해 나름의 산수화 준법을 개척했다. 겸재는 금강산 같은 수직 바위산들을 그림에 있어 자신이 고안한 수직준법을 썼다. 그래야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 봉우리들의 절개와 위상이 고스란했다. 또 부드러운 흙산 능선이나 둥근 봉우리
를 묘파함에 있어서는 반두(礬頭)준법 산봉우리나 언덕에 집결된 암석의 모양을 윤곽선으로 표현하는 방식 같은 부드러운 필법을 분별해 썼다. 그러나 이런 겸재의 산수 준법들이 결코 오늘날까지 진경산수의 범위를 규정짓는 화법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림을 그리는 화인의 붓놀림과 스타일의 문제지 그가 그린 그림의 진경 여부를 결정짓는 요소는 결코 아니다.

겸재는 중국 북종화나 기존의 틀에 박힌조선 산수화풍에 반기를 들면서 마음에 품은 것을 다름 아닌 ‘실체, 즉 실경에 대한 느낌을 화인의 품성’으로 되새김질해 ‘존재론적인 풍경’으로 해석해 낸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겸재는 일견 인문화가에 가깝다. 그러나 그런 인문화가적 산수가 자칫 기존의 국내외를 막론하고 관념 산수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을 누구보다도 경계했을 것이다.

17세기 겸재의 시대와 21세기 오늘의 동양 산수화나 서양 풍경화가 서로 맥을 같이 하는 지점은 실경에 대한 독특한 화인의 해석과 그 표현력의 진기함에 있다. 관념을 감각의 대상 위에 올려놓을 수 없다는 것이 겸재의 진경에 대한 오의
(奧義)였다. 이런 화의의 관점에서 심사정(沈師正,1707~1769)이나 이인문(李寅文)의 산수에 등장하는 말발굽이 한 획의 점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자.

그것은 화법이기 이전에 실물에 대한 본능적인 접근법이고 필법의 쾌척이다. 심사정의 <하마선인도(蝦磨仙人圖)>는 다리가 세 개 달린 두꺼비를 금전이 달린 줄로 희롱하는 선인(仙人)이 나오는 선종화인데 그 전체적인 느낌은 실경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실경의 요소를 실오라기처럼 끌어낼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선인의 복색이다. 어느 신분
에도 얽매이지 않은, 어찌 보면 거렁뱅이의 초라한행색일 수도 있는 자유로운 옷차림을 현재(玄齋)심사정의 아호는 진경의 정신으로 묘사해 본 것은 아닐까.산수화는 아니지만, 그의 다른 정치한 필치를 감득할 수 있는 <맹호도(猛虎圖)>의 극사실성은 <하마선인도>의 선적(禪的) 진경과는 달리 감각적인 진경의 형태로 외따롭게 배어난다. 실제 산수의 풍치를 대하듯 인물이나 영모 같이 실물에 대한 감각으로 그리려했다는 점이 부분적으로 유효하다면 말이다.

관념 산수와 대척되는 지점에서 당대의 기존 화풍을 수렴하면서도 그 화법과 화의에서만은 화인 각자의 미감과 미의식을 갖는 것이 진경의 요체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유춘(有春)이인문의 아호이나 강세황, 최북, 장승업 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경의 기율이자 맥락이다.

고희동, <명경대>(1940년대)

조선회화의 말기 혹은 20세기 초에 등장한 춘곡 고희동(春谷高羲東, 1886~1965)이나 심전 안중식(心田安中植, 1861~1919) 혹은 소림 조석진(小琳趙錫晉, 1853~1920) 같은 경우에도 특정화되지 않은 진경의 화의에 기본적으로 경도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그들은 자신의 스승이나 관습적으로 내려온 화풍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사와 화법의 체득을 위한 습득의 과정이고 그들 본래의 창의적인 산수의 비결은 그 어떤 화풍에도 물들지 않으려는 자기만의 화의를 담은 진경에 대한 해석학적 관점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고
희동이 즐겨 썼던 ‘고예독왕(孤詣獨往)’ 외롭게 홀로 개성적 표현의 길에 매진해야한다는 뜻의 정신처럼 시대를 뛰어넘
는 보편적이고 창의적인 진실을 향한 버릴 수 없는 화두였던 셈이다.

당대 산수의 실경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 실경이 화인의 내면적 정취를 도드라지게 하는 자기만의 화법에 대한 탐구로 본격화되는 면모를 보인 것도 당연하다. 남종화의 기조는 풍경을 다루는 화법상의 경향과 화의의 취향이 큰 편차 없이 완연하지만 진경화는 기법과 구도, 제재 등 다양한 형태로 모색되어 분분하다. 이런 산수화만이 진경산수의 전범이다,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특정 그림 자체의 형태적 유형에 한정할 수 없는 진경의 오의 때문이다. 그것은 표현 대상과의 감각적 조응과 정신적 발견을 통한 화인의 고투만이 진경의 또 다른 유형으로 갱신될 수밖에 없는 전형화된
형태나 유형을 거부하는 진경산수의 정신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이런 넓은 뜻에서의 진경산수에 대한 개념 규정은 특정 화가나 특정 화풍에 권력적 지향점과 우월한 미의식을 부여하지 않는 대승적인 차원의 진실에 공감하려는 화엄의 정신과도 일정부분 맞닿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진경은 실경 그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실경을 소화해내는 화인들 각자의 미의식의 고투,대상 실경과 통섭하는 자의식의 붓끝에서 우뚝해진다. 무엇보다 현대 산수화로 넘어가는 분기점이 되는 이들 진경의 마지막 전통주의자들은 그들에 의해 보여진 새로운 감각의 진경, 그 탈각의 진경을 스스로 예비하고 담보한다는 점에서 현대 진경의
비조라 일컬을 만한 세대들이다. 바야흐로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이르러 겸재의 진경이 서양 근대미술과 만나면서 이뤄낼 미적 스펙트럼은 그 자체만으로 새로운 화풍의 진작과 전통 산수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한 자장을 형성하는 계기가아닐 수 없다.

배가 불룩한 어미 거미가 명지바람에 수많은 새끼들을 산지사방으로 퍼뜨리듯 현대 한국화의 한 축은 정선의 진경산수로부터 다양한 미적 의 미망을 팽팽하게 거느리게 된다. 단순히 산수화가 풍경화로 개념의 폭을 넓히고 그 소재와 표현도구,표현대상이 다양화되는 표면적인 것만을 추수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현대회화의 다양한 장르만큼이나 내적인 결속의 폭과 깊이가 확대된 진경의 풍모가 현대회화에 장르적으로나 양식적으로 내면화되고 있음을 뜻한다. 정형화된 조선의 산수화처럼 진경산수의 고전적인 운치가 덜해진 반면에 현대회화는 여러 실경들을 개별 하위 장르나 표현 소재에 구
애됨이 없이 자유분방하게 추구하고 또 여러 측면에서 실험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병춘, <라면풍경>(2007)

인들이 혈통적으로 겸재 정선의 피를 물려받지는 고희동, 겸재 정선이라는 거미의 모체에서 불려나간 수많은 새끼 거미들이 만들어내는 거미줄이 우리가 흔히 봐왔던 규격화되고 평면적인 그런 거미줄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규칙한 방사형의 입방체일 수도 있고 깔때기 모양을 한 것일 있을 수도 있으며, 기존의 정형화된 평면에다가 새로운 형체의 거미줄이 가미된 혼성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특정한 형상을 지향하지 않은 채 그들 각자 새끼 개미들의 취향과 목적에 따라 다양한 응용력이 발휘된 거미줄이 태어난다. 아니 만들어진다. 이미 어미 거미는 내장이 다 파 먹힌 채 너덜너덜하던 몸껍질마저 다 갉아 먹히고 흔적도 없다. 허공이다. 오직 실물로써 있는 것은 없고 그 실물을 파먹고 태어난 수많은 새끼 거미들의 몸속에 유전하는 거미라는, 진경의 유전자라는 뿌리칠 수 없는 유전적 지향만 언제까지나 돌올할 따름이다. 이는 오늘날 현대로 걸어 나온 겸재가 아직도 그 실물화된 전범과 규정된 방법론의 몸으로서가 아니라 그 유전하는
정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경우에 화답한다.

현대 화가 김억의 폭이 2미터에 가까운<동방에 해를 맞는 독도> 같은 판화 대작은 전통적인 그림 재료로 살릴 수 없는 미감을 아주 조밀하면서도 투박하게 구현해낸다. 겸재의 <만폭동도(萬瀑洞圖)>나 <금강전도(金剛全圖)>에서 보여주는 시점상의 부감법 그림의 시점을 높은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리는 방법이 아주 시원스럽게 우리 땅 독도와 그 주변 동해의 실경을 집약하듯 진경으로 조감해내고 있다. 18세기의 부감법과 21세기의 부감법이 서로 화통하는 지경은 화법상 매우 인상적이다. 전통 산수화와 목판화라는 표현방식의 차이를 넘나들이하고 있다는 점도 ‘진경의 아우라가 어디까지인가’라는 의문을 반갑게 받아들이게 된다.

또 같은 현대 화인인 박병춘의 설치작품<라면풍경>은 라면을 주재료로 만든 집이나 장난감 비행기 같은 미니어처를 첨가해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의 한 단면을 아주 사실적으로 구현해내고 있다. 붓에 찍어 발라 그리는 먹이나 물감 같은 것이아니라 수많은 곡선을 품고 있는 라면이라는 식품을 주재료로 평면 회화와 고정화된 사물의 이미지에 도전하고 있는 진경의 측면이 아닐 수 없다. 그외에도 수많은 사진들이나 입체화된 종이들, 설치영상 같은 다양한 표현소재를 통한 현장의 사실감과 화인의 존재론적 미의식을 결합하는 데 주목하고 있다.

표현소재의 무궁무진한 개발과 표현대상의 다변화는 <오늘로 걸어 나온 겸재전>의 전반적인 양상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역시 겸재 정선은 현재도 그가 동원한 다양한 화법과 표현대상의 범위로 삼은 우리 산수를 아우르는 그의 독창적인 화의, 곧 진경에 몰입하는 미학적인 자세로 화인들의 피에 유전한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 수많은 화인들이 혈통적으로 겸재 정선의 피를 물려받지는않았지만 그가 펼친 진경의 정신을 미학적 자산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순전히 그 자신의 ‘진경의 피’로 환원되는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조선시대의 산수에서 현대의 풍경으로 넘어간 것은 단순히 표현대상의 확대와 거기에 따른 개념의 수정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17세기의 겸재가 가진 화인으로서의 패기, 관습적으로 따르던 화풍의 주인을 버리고 스스로 주인을 자처해 간 화인의 기질이 곧 그의 생물학적인 죽음을 넘어서고 있음이다. 어떠한 현대미술 사조가 유행하고 새로운 혼성 장르나 독립적인 회화양식이 도래한다고 해도 겸재가 일찍이 품고 있던 독창적인 갱신의 득의는 현재진행형으로 현재와 미래의 화인들 가슴속에 맥 놀이 할 터이다. 이는 살아가는 매순간 마주치는 실경들을 고풍스런 관념의 풍경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 진경의 피를 나눈 화인들의 소명이자 거부할 수없는 신명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의 분파적 한계를 넘어서는 지점에 겸재의 진경이 가지는 미학적 계보의 의미는 고통스런 갱신을 거듭하며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은 실물로서의 실경을 찾아 나선 화인의 사랑이 물들여내는 실체로서의 진경에 다름아닐 것이다.

살아가는 현재와 삶의 풍경으로서의 둘레,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 감각과 정신을 화폭에 옮기는 데 진경은 진실에 대한 소박한 기초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서로 넘나들이 하는 광의의 화법이자, 모든 대상을 천수관음처럼 가슴으로 보듬어 붓 끝에 옮기려는 동시대와 동시대인의 삶에 대한 화답으로서의 화의인셈이다. 진경은 그렇게 매순간 자기복제가 아닌 도저한 자기부정을 통해 새로운 면모를 확인해나갈것이다. 진경의 몸, 진경의 얼굴이 따로 있느냐 물으면, 아마 겸재 자신마저도 고개를 가로 저을 것이다.

심의평-미술평론
생산적인 관점과 유려한 글쓰기


김영호_미술평론가, 중앙대 교수


「진경의 변모와 그 계보학적 미래」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겸제의 독창적인 화격인 ‘진경’의 개념을 변모하는 열린 개념으로 설정함으로써 동시대 미술을 해석하는 비평원리로 다루어질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점이 인정되었다. 한국미술의 방향성을 가늠할 비평안이 아쉬운 현실에서 대지를 적셔줄 단비 같은 신선함이었다. 겸제의 화격이 난해한 현대미술을 진단하는 체계적인 틀로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로 품평을 뇌까렸던 기억이 납니다.

당선소감

상찬과 비평의 눈길을 가진 붓


유종인


시를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그림은 계보가 불분명한 근친이 아닐까 싶습니다. 옛 말씀에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 했는데, 그 말은 저에게 언감생심 미술비평의 작은 돌파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특히 동양화는 그런 제 미욱함을 다독이듯 잡아끄는 한 정처가 아니었나 여겨집니다. 어린시절 저는 그림도 잘 못 그리면서 운 좋게 학교 대표의 일원으로 사생대회에 나간 적이 있습니다. 스스로 그림에 젬병인 것을 자인하며 그림은 뒷전이고 출전한 학생들의 그림을 둘러보다 눈총을 받거나 제멋대로 품평을 뇌까렸던 기억이 납니다.아둔한 그림 솜씨를 가진 저는 그리는 붓과 쓰는 붓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하여 제 붓은 상찬과 비평의 눈길을 가진 붓으로 다가서려 합니다. 용렬하고 어리석은 글이나마 그것이 진경화에 대한 애정으로 깊어질 수 있게 해주신 심의위원과 인천문화재단, 그 외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