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세 종류의 새로운 인생이 있다. 하나, 르네상스의 대표적 시성(詩聖) 단테의 처녀작『새로운 인생La vita nuova』. 단테가 아홉 살 때 만난 운명의 여인 베아트리체는 그를 뮤즈의 세계와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했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에게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여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도다.” 둘,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의 로드소설 『새로운 인생Yeni Hayat』. 평범한 공대생 오스만이 돌연 학업을 중단하고 진아(眞我)를 찾기 위해 터키 곳곳을 버스로 순례하게 된 계기는 한 권의 책과의 조우였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셋, 통일독일 문단의 기린아 잉고 슐체(Ingo Schulze)의 전환기소설 『새로운 인생Neue Leben』. 반체제 작가의 야심을 품던 동독의 문학청년 엔리코를 신문사 창업주이자 사업가로 변모시킨 결정적 사건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였다. 이후 변화된 세상 앞에 그가 던진 출사표는 자못 위풍당당하다. “새로운 인생을 위해서라면 난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기 위한 청년의 결단으로부터 통일 이후 동독인들이 맞닥뜨린 실존적 불안을 씁쓸히 감지한다. 요컨대 이 소설은 동독이라는 ‘과거’가 통일 이후 동독인의 삶과 운명을 어떻게 조종하고, 자본주의라는 ‘현재’가 이들의 일상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그리고 희망이라는 ‘미래’가 좌절과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어떻게 다시 추동하는지를 치밀하게 그리고 있다.

슐체는 동독이 사라진 통일공간에서 오히려 기지개를 편 동독문학, 이른바 포스트 동독문학 시대를 주도하는 동독출신 신세대 작가다. 그가 새로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서독이라는 ‘두 체제’와 ‘두 문화’의 경험을 통해 통일독일을 진단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독문인과 구별된다. 둘째, 봉건사회주의의 허위를 보고 자란 그는 통일을 단절과 불안이 아닌 새로운 계기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기성 동독작가들과도 차별된다. 장벽 붕괴가 그에게는 검열의 폐지, 소재의 확장이었다. 셋째, 그의 개성은 동독 제3세대 작가군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토마스 브루시히, 야콥 하인 등 대부분의 작가들이 동독이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유년의 기억으로 복원하는 데 반해, 그는 ‘여기 지금 엄연히 존재하는 통일독일’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동독인의 희비극을 형상화하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통일로 재구성된 ‘새로운’ 삶의 현장에 주목하는 것이다.

『새로운 인생』은 통일공간이라는 역사적 전환기, 즉 1990년 1월부터 7월까지 주인공 엔리코가 친누나 베로츠키, 약혼녀 한젠, (동성애적)친구 요한에게 보낸 편지들로 정교하게 짜인 서간체 소설이다. 이는 냉전시대를 종식시킨 역사적 사건인 독일의 통일을 에둘러 이야기하기 위한 전략으로, 이렇게 평범한 일상성과 정치적 드라마를 결합시켜 ‘진부한 극적 긴장’을 빚어내는 특유의 글쓰기 전략을 ‘슐체리얼리즘(Schulzerealismus)’이라 일컫는다.

소설의 매력은 평범한 동독인 엔리코와 주변 인물들의 ‘단순한’ 이야기 속에 통일이 개인에 미치는 ‘단순하지 않은’ 변화 양상, 예컨대 심리적 갈등, 가치관의 변화, 가족의 해체 등을 형상화함에 있다. 말하자면 작은 일화 속에 통일이라는 큰 이야기가 으밀아밀 스며있는 것이다. 거시적 안목과 미시적 관찰을 아우르는 균형감각의 소유자답게 슐체는 자신의 문학관을 이렇게 요약한다. “나에게 문학이란 물방울 속에서 세계를 보는 것이다.” 

이 소설이 갖는 사회문화적 함의도 주목에 값한다. 우선 작가의 체험과 상상력으로 복기한 통일공간은 분단국가만이 지닌 ‘문화변동’의 작은 실험장으로 읽힌다. 통일 이후 동서독의 다른 가치, 즉 사회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체제이념과 공동체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생활양식, 관료주의 문화정책과 시장경제원리의 문화산업이 서로 충돌하고 변화하는 양상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통일이 동독인들에게 미친 변화와 일상 속 혼동과 갈등, 좌절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이 소설은 통일이란 거시적 차원의 체제통합이 아니라 미시적 생활세계, 요컨대 ‘종잇장’ 위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완결되는 것임을 조용히 웅변한다.

냉혹한 자본주의 논리에 적응해가며 전개되는 엔리코의 새로운 인생, 분단과 통일의 역사가 초래한 변화. 소설 말미에서 그는 고백한다. “난 내 낡은 인생을 등 뒤로 보낸 것입니다. 아니 더 좋은 표현이 있습니다. 지금에서야 난 비로소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그는 끝내 파산하고 도주한다. 그는 진정 새로운 인생을 살았던 것일까. 엔리코의 꿈과 시련과 파멸, 미래의 통일한국에서 마주할 어느 북한 청년의 모습을 본 것만 같다. 이러한 가상공간을 암울히 그려낸 이응준의 소설 『국가의 사생활』 주인공 리강은 엔리코의 극단적 분신이다. 인민군 출신으로 폭력조직원이 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란 게 결국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바다야. 어디에도 육지가 없는 바다. … 정박할 땅이 없는 배가 바다를 이길 순 없다. 파도를 타고 떠돌다 운이 다하면 가라앉을 뿐이야.”

ⓒ문학과지성사 ㅣ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