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8인:최휘의 결사단>포스터 

1906년 혁명가들과의 비밀 회합을 위해 쑨 원(孫文, 1866~1925)이 홍콩으로 향한다. 청나라 자객 수백 명도 그를 암살하기 위해 홍콩에 잠입한다. 이를 알게 된 한 교수는 오랜 친구이자 대부호를 설득하여 쑨 원을 지키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뛰어난 무술실력을 갖춘 도박꾼, 대부호의 충성심 깊은 인력거꾼, 전설의 고수 걸인 등이 합류하여 8인의 호위대를 결사하는 것이다. 20세기의 여명기, 홍콩은 구중국과 신중국의 분기를 결정짓는 백척간두의 장소가 된다.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진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만큼 영화는 그들 모두의 영웅적 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8인: 최후의 결사단(十月圍城)> 또한 최근 중화권 블록버스터의 기본 골격이라 할 수 있는 다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애국주의 신파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중국을 위하여, 혁명을 위하여’라는 상투적이고 과장된 대사들이 되레 역사적 리얼리티를 희석시키고, 호쾌한 액션으로의 몰입마저 거듭 방해하는 것이다. 쑨 원이 홍콩에 도착한 이후 실시간으로 전개되는 긴박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수차례 실소를 터뜨리고 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드라마와 프로파간다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길을 잃은 난처한 형국인 것이다. 그리하여 눈물을 흘리는 쑨 원의 얼굴을 클로즈업해도 좀처럼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뜨악한 이물감마저 없지 않은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의 제작과 연출이 모두 홍콩인이라는 점이다. 이웃나라 관객들조차 공감을 사기 힘든 이 영화에 홍콩영화산업의 거대 자본이 투여되었음이 궁리를 더한다. 아시아 시장을 석권하고 기어이 할리우드까지 매혹시켰던 홍콩영화의 특징은 특유의 무국적성에 있었다. 역사가 소거된 장소성에서 길어 올린 매끈한 느와르에 수많은 청춘남녀들이 열광했던 것이다. 우 위썬(吳宇森)과 왕 쟈웨이(王家衛)는 씨네키드(cinekid)의 영웅이기도 했다. 홍콩 느와르는 중국을 에둘러 곧바로 아시아와 교감하고 세계로 직통했다.

대륙의 개혁개방과 1997년 홍콩 반환은 변곡점이 되었다. 적지 않은 홍콩영화계의 주역들이 태평양을 건넜다. 감독들은 톰 크루즈(Thomas Cruise)와 할리우드 액션영화를 만들었고, 배우들은 쌍권총을 버리고 대나무 숲에서 무협을 선보였다. 그 아시아의 빈자리를 한류가 대신했다. 기나긴 침체 끝에 홍콩 느와르의 부활탄을 쏘아올린 <무간도(無間道)>(2002)가 개봉한 것은 21세기하고도 3년이 지나서이다.

영화의 한장면

중국의 귀환은 홍콩영화에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무국적 도시 홍콩은 이제 적극적으로 ‘중화의 배꼽’을 자처하는 듯 보인다. 역사성을 부여하는 영화에서 쑨 원을 소환한 것은 퍽이나 영리한 전략이다. 쑨 원의 명망은 공자(孔子, BC551~BC479)의 명성조차 훼손당한 적이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륙과 타이완의 민감한 정치적 이슈를 피해 갈 수 있는 유일한 기표이기도 하다. 양안삼지를 넘어서 전 세계의 화교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유력한 소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국과의 재결합 이후 홍콩에서 생산되는 영화들은 대륙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국책영화와는 미묘하게 어긋나는 지점이 있다. 사회주의를 대체한 국가 주도의 애국주의라기보다는 화어(華語)문화권이라는 거대한 시장논리 속에서 역사와 혁명을 불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홍콩영화산업은 중국이라는 구체적인 육체성을 획득하고, 화어라는 드넓은 신경망을 확보한 후, 아시아를 대신하는 15억의 글로벌 시장을 되찾은 것이다. 홍콩은 이제 중국을 장착하여 세계와 만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에 애국주의를 결합시키는 독특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그 흐름의 정점에 저우 룬파(周潤發)가 있다. 1980년대 홍콩 느와르의 신화였던 그는 할리우드 생활을 청산하고 대륙으로 건너가 중화문명의 정수 공자를 연기한다. 『논어』의 구절을 보통화로 읊조리는 그의 모습은 홍콩의 현재와 밀접하게 조응한다. 반백 년 광동어에 길들여진 저우 룬파의 혀 근육을 재조직한 힘 역시 약동하는 시장애국주의이다. 20세기로부터 홍콩은 이 만큼이나 멀리 달려온 것이다. ‘8인의 결사단’은 끝내 뜻을 이룬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