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낮잠>포스터

연극 <낮잠>은 구매자가 선호할 만한 좋은 요소만을 뽑아서 구성한 명품 기획 상품의 느낌을 준다. 박민규 원작에 극작가 오은희가 각색을 하고 <8월의 크리스마스>로 멜로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허진호 감독이 연출을 맡고 이영하, 김창완, 오광록 등 인지도 높은 주연 배우들이 나와 흠 잡을 데 없는 상품성을 지닌다. 이영하, 김창완, 오광록 등 주연 배우들은 관객들이 다양하게 고를 수 있도록 했지만 뒷감당을 확실하게 해 줘야 하는 조연은 김기천, 김수영 같은 연기파 배우들로 고정해 놓음으로써 작품의 질감에 편차가 심하지 않도록 하는 영리함을 보여주었다. 또한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팬 서비스 차원의 배려도 잊지 않았는데 슈퍼주니어의 김기범을 캐스팅한 것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이 연극의 기획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의문이 드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원작 「낮잠」이 좋은 작품이긴 하지만 박민규의 작품으로서는 다소 예외적이다. 이 작품에서 박민규스러운 마이너리티의 감각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박민규라는 이름이 상기시키는 도발적인 무엇을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울 수 있다. 이상문학상을 받은 유명 작가의 작품으로 삶에 대한 보편적인 주제를 담았다는 점만이 원작의 가치에 부응하는 부분이다.

그 다음으로 허진호 감독이 연극 연출을 하게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이다. 영화와 연극이 극적인 측면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다른 장르이기 때문에 영화감독으로서 훌륭한 사람이 연극연출가로서도 그러하리라고 보장할 수 없다. 물론 장르 간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영역을 훌륭히 소화하는 연출가도 있고 장르 간 경계 허물기가 가져올 수 있는 시너지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연극에서도 영상이나 첨단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번 기획 “감독 무대로 오다” 시리즈 중 하나인 <낮잠>의 경우 도전적 실험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안전한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카메라가 담아내듯 사실적이고 정제된 장면과 연극의 현장 에너지를 결합시켜 대중들에게 좀 더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경우 허진호 감독이 지니고 있는 장점, 즉 멜로드라마를 절제의 미로 풀어내는 능력을 연극 무대에서도 발휘하기를 바랐다고 해석된다. 멜로영화 연출의 대가에게 한 수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실제 공연에서 허진호 감독의 미장센 무대에서의 등장인물 배치나 역할, 무대장치, 조명 등에 관한 총체적인 계획이 돋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젊은 시절 아름다운 첫사랑의 감정을 담아내는 배경으로서의 오솔길을 망사막을 활용하여 서정적으로 표현한 것은 허진호 감독의 강점이 잘 드러난 부분이다. 사실 연극에서 망사막을 사용하여 공간을 활용하는 것은 다소 낡은 방식에 속한다. 그림은 나올지 모르지만 연극적 생동감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카메라를 돌리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처럼 기억에 남는 아련한 장면을 만들어 냈다. 그렇지만 그의 이름값은 그 정도에 머문다. 주인공의 친구 정동필 역을 맛깔스럽게 살려낸 점, 주인공 한영진의 분신으로 고등학생 영진을 등장시킨 점 등이 연극적인 특징들인데 그가 이 부분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 알기 어렵지만 이는 각색자의 능력에 더 많이 좌우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각색을 맡은 오은희는 연극이라는 느낌을 살리면서 과하지 않게 전달할 수 있도록 이 부분을 소화해 주었다.

결국 <낮잠>이 명품 기획 상품의 느낌을 주는 것은 잘 계산된 기획의 힘으로 보인다. 엠벤처투자, 엠뮤지컬컴퍼니, S2엔터테인먼트가 함께 만들어냈다는 점 역시 이러한 의도를 가늠하게 해준다. 연극열전의 기획이 성공함으로써 연극의 고급화와 대중화를 함께 얻을 수 있었다. 연극계에서는 연극열전의 상업적 마인드에 대해서는 그다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지만 기획력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기도 한다. 좋은 기획이 연극의 예술성을 살려 대중성까지 확보할 수 있게 되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낮잠>의 기획은 연극열전 기획의 연장선에 있는 듯하다. 고급화와 대중화 전략 속에서 상업적 이득을 잘 계산했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해야 하나. 물론 대중의 수요를 꿰뚫고 이를 상품화하는 능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요구될 것이다. 그런데 이는 예술로서보다는 상품으로서 가치를 매기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낮잠>은 고급스럽게 잘 포장되어 선물하기 좋은 상품이다. 장르영화처럼 연극에서도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를 안 상태에서 어떻게 감동을 받을 것인지만 준비하면 되는 장르연극이 한편에서 자리를 잡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