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출판사│2010

미래를 형성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이지만 우리는 그 과거와 현재를 흔히 다이제스트 방식으로 이해하는 데 만족한다. 그리고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가십으로서 흘려듣기 일쑤다. 하지만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밝은 면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의 공존, 착종 혹은 투쟁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가까운 과거였던 조선시대의 어두운 면이라고 하면 단연코 신분제를 꼽아야 한다. 신분제의 잔영(殘影)은 인간의 자율적 가치를 무시하고 출신성분에 따라 재단하는 그릇된 관념의 형태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 관념을 분쇄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택 불가능한 운명 때문에 재능을 지니고도 현실의 장벽 앞에서 좌절한 사람들이나 반역의 죄목으로 처단된 사람들, 스스로 반역의 길로 나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되읽으면서, 그릇된 관념을 분쇄하기 위해 떨쳐 일어날 용기를 우리 스스로 키워나가야 한다. 

이한의 『서얼: 새로운 세상을 꿈꾼 사람들』은 조선시대 양반 아버지와 양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庶子)와 노비를 비롯한 천민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얼자(孼子)들의 불운한 이야기를 정면에서 다루면서, 신분제의 그릇된 관념을 극복하라고 자근자근 타이른다. 

조선시대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역사의 주 무대에서 활동하였고 방대한 관련 기록을 남긴  양반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양반의 정치적 활동과 문화적 사업들이 이루어진 것은 양반들이 갖가지 방식으로 신분제를 고착시킨 결과이기도 했다. 중심의 역사는 배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때에도 신분 낮은 어머니에게 태어난 자식을 권력의 후계자로 지목하지 않으려고 한 일이 많았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종법 제도가 강화되고 양반 사회가 안정되어 가면서 서얼은 더욱 천대받게 되었다. 그럴수록 서얼 출신의 인물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대현실에 도전을 했다. 서얼들은 ‘결격품’으로서 구석에서 눈물짓기만 한 것은 아니다.

‘조선 서얼의 꿈과 좌절, 성공과 실패’가 부제인 이 책은 신분적 불만을 폭발시켜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친 여러 서얼들의 삶을 파노라마식으로 멋지게 다루었다. 책은 제1장 ‘서얼의 탄생’, 제2장 ‘조선의 서얼들’, 제3장 ‘서얼 허통의 노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제1장은 조선시대에 서얼에 대한 신분차별제가 성립된 경위를 다루면서, 야담이나 문헌에서 그 제도의 기원에 대해 논한 여러 설들을 하나하나 검토하여 그 진위를 밝혔다.

본편에 해당하는 제2장은 11명의 서얼을 대상으로, 개인의 삶을 조명하였을 뿐 아니라 시대 배경과 정치 사건들을 친절하게 조명하여, 그 자체로 조선의 역사를 구성해 보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유자광, 첩의 신분에서 정실부인까지 된 정난정, 정조 때 검서관(檢書官)1으로 활약한 이덕무, 근대의 선구자였지만 친일 반민족주의자로 돌아선 윤치호의 이야기는 독자들도 이미 익숙히 알고 있겠지만, 이 책은 그들의 삶과 내면적 고통을 더욱 친절하게 그려냈다.  

그렇다고 서얼들을 호명하여 흥밋거리를 제공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다. 서얼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때로는 온정적이고 때로는 냉엄하며, 구시대의 신분제도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비판을 하였다. 게다가 제3장은 서얼 차별의 신분제를 개선하고 족쇄를 완화시키고자 했던 허통의 노력들을 소개했다. 서얼 허통의 역사적 경험들을 반추하면서, 좋은 독자라면 차별을 조장하는 관념을 극복할 방안을 스스로 모색하게 될 것이다.

또 송익필의 시를 소개해 서얼이 느낀 내면의 고통을 매우 명료하게 드러내주었다. 곧, 「서울 소식을 듣고 즉흥적으로 몇 자 적어서 친구를 이별한다(聞京報走筆別親舊)」는 제목의 24구 가운데 제12구부터 제14구까지, 그리고 「객지에서(客中)」 두 수 가운데 첫째 수를 들었다. 앞의 시는 세 구절만 들지 말고 연(聯)을 고려해서 제11구부터 소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객지에서」의 마지막 두 구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면 어떨까 한다. 

상서로운 징조가 나오지 않자 아아 그만이로다 탄식하시고
바다로 떠나려 했던 공자님을 나는 사모하노라

出圖嗟已矣 浮海慕先師

『논어』에서 공자는 “봉황새가 오지 않으며 황하에서 하도(河圖)가 나오지 않으니 나는 끝났구나”라고 탄식했다. 또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 뗏목을 타고 바다로 향하려 한다”고 했다. 송익필은 그 두 구절을 끌어와, 상서로운 징조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도가 행해지지 않는 현실을 깊이 탄식했다. 어둠에 저항하는 힘의 크기는 너무도 작았던 것이다.

이 책은 골동품의 역사를 말하지 않고 역사 속에서 현재적 의미를 발견해냈다. 문체도 간결하고 또 맛깔스러워, 누구라도 단숨에 읽을 수 있다. 훌륭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