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기차마을


“아가 어서 가거라. 어서 가”

광주종합버스터미널. 곡성행 시외버스 안, 이별의 시간이 길다. 노인을 버스에 태워드리고도 딸과 손자는 선뜻 돌아서지 못한다. 늙은 어미의 손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딸, 할머니와의 헤어짐이 서운한 손자.

“전화해라.”

노인을 두고 모자는 발길을 돌린다. 딸과 손자가 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노인은 좌석에 앉지 못하고 내내 차창 밖을 응시한다. 더 이상 서로의 말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노인은 창밖에서 손 흔드는 딸과 손자에게 중얼거린다.

“어여 들어가. 나 왔다가서 돈 많이 써서 어쩐다냐. 추운데 빨리 들어가야지. 어여 들어가.”

창밖으로 걱정스런 손짓을 보낸다. 모자는 버스가 출발하고 시야에서 사라져 가도록 자리를 뜰 줄 모른다. 광주에서 불과 한 시간 남짓 거리, 곡성 땅에 살면서도 노인은 몇 년 만에 광주 작은 딸네 집 나들이를 하고 돌아가는 길이다. 노인은 “손지가 보고자서” 왔다가 손자를 보고 가니 마냥 기쁘다. 기쁨은 바이러스다. 한없이 따뜻한 풍경 앞에 나그네도 덩달아 행복해 진다.

한동안 제주에서 살았다. 나그네를 다시 뭍으로 부른 것은 산촌마을 곡성이다. 곡성 땅에서 부활했다는 증기기관차 기적소리가 물 건너까지 들렸던 것일까. 영화와 드라마, 기록 사진 속에서나 접했던 증기기관차가 관광용이지만 다시 철로를 달린다는 소식은 생각만으로도 심중을 자극하는 하는 무언가 있었다. 풍문을 들은 것은 벌써 오래 전이었지만 유행에 둔감한 나그네는 증기기관차보다도 느린 속도로 곡성에 도달했다. 곡성버스터미널. 날은 이미 저물기 시작해 어둑어둑하다. 읍내라고 하지만 군청 소재지인 곡성읍은 어느 산골의 면 소재보다 한미하다. 곡성은 이 나라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군 중 하나다. 그 덕에 어느 지역보다 난개발이나 막개발의 피해를 적게 입은 곳이기도 할 터이다.

오늘 증기기관차는 모두 운행이 끝났다. 그래도 나그네는 기차가 출발하는 옛 곡성역으로 간다. 전라선 철로가 직선화되면서 새 역사가 들어서자 기존의 곡성역은 옛 곡성역으로 바뀌었다. 2005년 3월 31일, 옛 곡성역의 철로와 건물들을 보존하여 테마파크로 만든 것이 기차마을이다. 기차마을의 중심 사업은 증기기관차와 레일바이크 운행, 심청이야기마을 팬션 운영 등이다. 특히 증기기관차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뜨거웠다. 기차마을이 ‘뜨면서’ 곡성이란 지명도 비로소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됐다. 그 전까지 대중들의 뇌리에 각인된 곡성은 그저 구례나 남원, 지리산 등지로 가는 길에 버스가 잠시 들르던 곳에 지나지 않았다. 돌아보라 당신은 혹시 곡성에 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가. 아니 곡성이란 이름을 기억이라도 하고 있었는가.

옛 곡성역


오늘 증기기관의 운행은 이미 끝났지만 옛 곡성역사에는 여행자들이 눈에 띈다. 증기기관차 앞을 서성이면서 사진을 찍는 여행자들. 그들도 나그네처럼 늦게 도착한 것을 아쉬워하며 역을 찾았으리라. 1933년 전라선 개통으로 지어진 옛 곡성역사는 2008년부터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낡은 목조 건물들이 살아남은 것은 곡성군의 혜안 덕분이다. 전라선 곡성역 복선 직선화 개량 사업으로 신역이 생긴 것은 1999년. 쓸모가 없어진 역사 건물과 폐선로는 철거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시 곡성군수는 주 5일제 근무가 실시되면 테마관광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철도공사와 협의해 옛 곡성역과 철로 13.2km를 매입했다. 처음부터 증기기관차를 염두에 뒀던 것은 아니다. 곡성의 가장 큰 자원인 섬진강을 관광상품화하기위해 어떻게든 철로를 활용해 볼 생각이었다. 곡성군은 철로 주변의 땅 45,000평까지 함께 매입해 테마파크화하기로 결정하고 2005년에 기차마을을 완공했다. 철로에는 전기기차를 운행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결국 증기기관차로 방향을 틀었다.

옛 곡성역사 한 켠에는 일제시대 경성을 재현한 영화세트장이 서 있다. 역사 앞에 경성역이라는 입간판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태극기 휘날리며>(2003), <토지>(SBS, 2004~2005), <경성스캔들>(KBS2, 2007), <야인시대>(SBS, 2002~2003) 등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이 세트장에서 촬영됐다. 철도공사의 여행상품 ‘내일로(rail 路)’를 사서 곡성을 찾은 청년들 셋도 세트장 앞에서 청춘의 마지막 한 시절을 담기에 여념이 없다. 대학 2학년생 동기인 이들은 셋 다 군 입대를 앞두고 추억만들기 여행을 계획하던 중 내일로 티켓을 구매해서 5박 6일 일정으로 남도를 여행하고 있는 중이다. KTX를 제외한 철도공사의 모든 열차를 7일 동안 무제한 이용하는데 드는 비용은 54,700원에 불과하다. 티켓 이용은 만 24세 미만이라는 나이 제한이 있다. 철도공사 전남본부에서 내일로 티켓을 끊은 덕에 청년들은 증기기관차, 레일바이크 무료탑승과 심청이야기마을 무료 숙박권까지 얻었다. 청년들은 목포와 광주, 담양, 보성, 순천을 거처 곡성까지 왔다. 기차마을이 아니었다면 청년들도 곡성에 올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영화세트장 좌_우


늦잠을 잤다. 어젯밤 곡성 읍내 매일시장 골목 목로집에서 막걸리 몇 병을 마셨다. 곡성의 물이 좋아 술이 맑았던 때문일까. 꿈도 없는 깊은 잠이었다. 머리는 맑고 몸은 편안했다. 막걸리의 힘이기도 할 터. 오전 11시 30분, 옛 곡성역에서 가정역까지 운행하는 증기기관차를 탄다. 여름철 성수기나 주말이면 예약을 해야 탑승이 가능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리지만 겨울이고 평일인 오늘은 승객이 30명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기차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달린다. 시속 30km. 세 량의 객차 중 한 칸도 다 차지 않았지만 객차 안은 기대와 설레임으로 가득하다. “뿌우” 증기기관차의 기적이 울린다. 그런데 아무래도 기계음 같다. 기관차의 굴뚝에서도 연기가 뿜어 나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분명 증기기관차를 탔는데, 어쩐 일이지.

의문은 쉽게 풀렸다. 실상 이 기차는 증기기관차가 아니다. ‘미카3 129호’ 겉모양만 증기기관차 모습으로 꾸민 디젤기관차다. 8톤 화물트럭의 엔진을 장착해서 경유를 연료로 움직이는 기차. 간간히 울리는 기적소리는 녹음된 기계음이고 화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는 성수기나 주말에만 만들어진다. 증기기관차의 상징인 우렁찬 기적 소리와 자욱한 연기 모두가 연출인 것이다. 하지만 승객들은 기관차의 구동 방식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설령 자신들이 탑승한 기차가 가짜 증기기관차라는 사실을 알더라도 크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이들이 욕망한 것은 증기기관차가 아니다. 증기관차라는 이미지다. 기차마을 또한 증기기관차의 이미지만을 재현해서 상품화한 것일 뿐 속이려는 의도는 없었다. 알고도 속고 속으면서도 즐거운 이미지 마케팅. 어차피 이미지 상품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심청이야기마을 팬션 또한 곡성이 「심청전」의 원형 설화 주인공인 원홍장의 고향이라는 구전을 상품화 한 것이다. 심청이야 판소리 속 허구의 인물. 심청의 이미지를 선점한 것도 곡성군의 능력이다.

미카3 129호


곡성 기차마을 테마파크 사업에는 총 178억 원이 투자됐다. 2009년에는 레일바이크를 포함해서 증기기관차 유료 승객이 40만 명, 매출은 16억 5천만 원이었다. 2010년에는 20억  원의 매출을 예상한다. 곡성지역 경제에 미친 파급효과까지 계산하면 기차마을이 창출한 수익은 더 클 것이다. 실제로 기차마을을 통해 곡성이란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면서 농산물판매에도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2008년에는 매출이 9억 원에 불과 했었다. 매출이 1년 만에 두 배 가까이 증가한 것은 곡성군이 직영을 하다가 2009년부터 코레일 관광개발에 기차마을 경영을 위탁한 덕분이다.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진 코레일과 연계한 홍보가 주효했다. 곡성군과 코레일 관광개발은 순이익을 정확히 절반씩 분배한다. 증기기관차와 레일바이크, 심청이야기마을 팬션 등 기차마을 테마파크에 근무하는 직원은 모두 40명. 이 중 3명만 코레일 관광개발 본사에서 파견된 직원이고 나머지 37명은 모두 곡성군 거주자들 중에서 새로 뽑았다. 기차마을이 지역민들의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했다.  

엔진이야 어떻든 기차는 이제 섬진강변을 따라 느리게 전진한다. 안개 자욱한 강변의 정취에 승객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셔터를 눌러댄다. 섬진강을 따라 가는 선로가 아니었다면 승객들의 열광이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을 파헤치지 않고서도 이토록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은 대설, 눈 대신 비가 내린다. 강변은 피어오른 물안개에 쌓여 형체를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승객의 대부분은 증기기관차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향수 때문에 기차를 탄 것은 아니다. 이들을 이끈 것은 미지에 대한 그리움이다. 기차는 레일 위를 달리지만 사람들은 시간의 선로에 몸을 싣고 과거로 회귀한다. 현실의 철도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곳. 증기기관차는 지금 그곳을 향해 가는 중이다.

레일바이크 타는 아이들                                역사에서 사진 찍는 아이들


기적 소리가 울리고, 종착역인 가정역에 도착했다는 차장의 안내방송이 나온다. 25분간의 시간여행이 끝났다. 기차는 섬진강변의 가정역에 잠시 정차했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리 건너 섬진강천문대도 안개에 쌓였다. 두가교와 두가세월교, 두가현수교 등의 다리가 강 이쪽과 저쪽을 연결시켜주는 통로다. 다리가 놓인 뒤 이동 수단으로서 나룻배는 사라지고 이제 체험용으로만 남았다. 가정역 주변 마을들은 온통 체험마을 일색이다. 두계 외가 체험마을, 가정 녹색체험마을, 봉조 산촌체험마을, 기차마을 팬션 단지까지. 그러나 가정역사 건물은 간이역에 어울리지 않게 덩치가 크다. 두가현수교의 모양도 너무 생뚱맞다. 관광단지에 온 느낌에 퍼뜩 정신이 든다. 그렇구나! 기차에서 내린 순간 우리는 다시 현재로 되돌아왔다. 과거로의 여행은 시간 열차 안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이미지 제공_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