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이케가미선(東急池上線)의 아담한 열차에서 내린 곳은 도쿄(東京) 교외지역의 쿠가하라(久が原)라는 자그마한 역이었다. 역을 나서자 평온하지만 분주한 오후를 보내고 있는 상가가 나타났다. 장바구니를 들고 주말의 끝머리를 만끽하고 있는 이들을 지나치자니 나도 무엇이든 골라 담아 주변의 주택가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도쿄에서 일상을 영유하는 유학생이 아닌 목적을 가지고 방문한 관광객 모드. 그럼에도 이런 저런 생활용품들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상가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길가의 소박한 팻말과 마주쳤다. 쇼와생활박물관(昭和のくらし博物館). 팻말 뒤로는 박물관이라 할 만한 건물은 보이지 않고, 양 옆의 주택 사이로 좁다란 길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자칫 그냥 지나친다 해도 아무도 탓하지 않을 것만 같은 수줍은 표식이었지만 길을 따라 들어가면 만나게 될 무언가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한 손짓이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그 표식만큼이나 차분한 쇼와생활박물관이 시간을 머금고 서 있었다.

쇼와생활박물관 내부도면

쇼와생활박물관은 쇼와 30년대(1955 ~1964)의 평범한 가족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건축면적 59.4㎡의 아담한 박물관이다. 이곳은 코이즈미(小泉) 일가-부부와 네 명의 딸-가 실제로 생활했던 곳으로, 건축기사인 아버지 코이즈미 타카시(小泉孝)가 고쿄의 교외인 오오타구(大田區) 쿠가하라(久が原) 지역에 직접 설계하여 지은 2층 집이다. 쇼와 25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주택정책의 일환으로 탄생한 일본주택금융공고(日本住宅金融公庫)의 융자를 받아 세운 공고 주택의 초기 형태이며, 재료를 절약하고, 좁은 공간을 낭비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당시 모두가 동경하던 서양식 공간을 만드는 등 설계와 건축 면에서 다양한 시도를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51년, 장녀가 고등학교 2학년 때(당시 17세)부터 이곳에 살기 시작한 코이즈미 일가는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하나 둘 차례로 집을 떠나갔고, 동일한 시기에 지어진 다른 주택들도 일본의 고도성장기와 거품경제시기의 재건축으로 하나 둘 사라져갔다. 하지만 이곳만큼은 장녀 코이즈미 카즈코(小泉和子)의 노력에 의해 사설 박물관으로서 새로운 시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일본의 가구나 가사도구, 그리고 주택의 역사를 연구하는 공학박사인 코이즈미 카즈코(小泉和子)가 자신과 함께 성장해온 이 집과 시간이 묻어있는 평범한 가재도구들이 전후의 서민 생활 자료의 일부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여 1999년 사설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으며, 2002년에는 일본의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니 햇볕이 가득한 마당을 품은 2층 건물이 나타났다. 차분하고 친절한 직원을 따라 건물로 들어가 가파른 계단을 딛고 바로 2층의 어린이 방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도 아이들이 놀다 버려둔 것인 양 주인의 손때가 그대로 느껴지는 여러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매일 열심히 책가방에 챙겼을 교과서, 시장에 가면 그 맛이 궁금해 엄마를 조르곤 했을 당시 처음 출시된 캐러멜, 그리고 그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었던 철완 아톰과 여자 어린이들의 아이돌 쿠루미짱(くるみちゃん)의 사진과 모형까지. 그들의 책상 앞에 앉아 서랍을 열어 다양한 물건들을 만져보고, 그들이 쳤던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자니 나도 당시의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어린이 방 옆의 전시실은 원래 하숙방으로 임대하는 방이었지만 지금은 기획전시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공교롭게도 당시의 재일조선인의 생활상에 대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일본의 전전과 전후에 대한 자기 서사에서 의식적으로 삭제되고 마는 일본의 타자이자 그들 자신, 재일조선인의 존재에 대해 잊지 않고 이야기하는 전시는 쇼와생활박물관이 가지는 역사적 입장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한복이며 미역국, 사물놀이지만 당시의 조금은 낯선 사진과 자세한 설명을 통해 전후 일본의 재일조선인이 경험했을 고된 삶을 마주하자니 먹먹해지는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쿠루미짱


아래층에 내려가서는 처음 현관에서 지나쳤던 서재부터 둘러보았다. 서재는 아버지 타카시가 주로 시간을 보내던 곳으로, 유일한 서양식 공간이기도 하다. 전후 일본인들은 여전히 다다미를 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곳의 서재처럼 모던한 스타일의 공간은 모두가 선망하는 유행의 첨단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모던함이 일종의 고즈넉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웃한 거실에는 가족이 단란하게 둘러 앉아 먹었음직한 계절 별 식사가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부엌은 거실과 바로 이어져 당시 수도나 가스 없이 카마도(かまど)아궁이에 장작불을 때고, 마당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양동이에 담아두고 식사를 준비하던 안주인이 당장이라도 뛰어나올 것만 같았다. 거실을 지나 마주친 작은 계단을 다시 올라가니 이번에는 코이즈미가의 둘째, 코이즈미 토모요(小泉知代)가 했던 염색 등 그래픽 작업을 전시해 놓은 공간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직접 시간을 보내고 생을 달리한 그녀의 흔적을 다른 외부 공간이 아닌 바로 이곳에서 다시 마주하게 하는 것은, 그녀를 위한 가장 뜻 깊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쇼와생활박물관 내부

작지만 알찬 쇼와생활박물관의 끝에는 널찍한 창을 통해 건물 밖 마당으로 다시 말을 거는 담화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안내하시는 분이 마련해 주는 차와 간단한 다과를 먹으며 일상사 관련 서적들과 박물관에서 주최하는 다양한 행사 정보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따뜻한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마당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자니 각 방에서 마주쳤던 쇼와시대의 일상들, 그리고 코이즈미 일가의 흔적들이 자연스럽게 되돌아왔다. 돌이켜보니, 결코 서두르지 않는 보폭으로, 각 공간에 느긋이 머물며 충분히 음미할 수 있도록 했던 다양한 장치들-예를 들어 관람을 기다리는 ‘박제된’ 일렬의 전시가 아니라 가구의 서랍을 열어 새로운 전시 물품들과 마주치거나 이를 직접 만지고 다루어볼 수 있게 한 구성 등-은 일상성의 강조뿐만 아니라 “단지 주택과 가재를 보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학습의 장소로서 생활의 철학에 대한 고민을 제시하고 싶었다는” 박물관의 의도를 매우 적절하게 구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코이즈미 일가의 생활과 삶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 실재성은 마치 누군가의 삶을 직접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그들이 살아온 시간의 켜와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의 켜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하였다. 이는 그들이 살아왔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이 모여 역사가 된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너무도 쉽게 누락되고 말지만 사실은 평범한 개개인의 삶을 이루는 조각들이야말로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이야기의 보고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쇼와생활박물관마당

담화실을 나서며 챙겨 나온 팸플릿은 쇼와생활박물관이 단지 기억과 흔적을 보존하는 곳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이들의 참여를 통해 새로운 시간을 덧입혀 나가기 위한 쇼와생활박물관의 활동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쇼와시대의 일상에 관한 기록 필름의 상연이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 활동, 그리고 관련 전문가들과 일반인이 함께하는 강의, 세미나 등이 그것이었다. 관람을 하는 동안 자신도 처음 도쿄에 올라왔을 때 이런 가구를 썼다든지, 자신도 당시에 이런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는 등의 이야기를 나누던 일본인 관람객들이 마침 4월에 있을 기록 필름 상연에 대한 이야기를 마당에서 나누고 있었다. 소중한 공간에 힘을 더하기 위해, 그리고 이곳이 지속적으로 살아 움직일 수 있게 하기 위해 나도 4월에 열린다는 기록 필름 상연에 참여해볼까 생각하며 대문을 나섰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용하지만 오롯한 존재감으로 우리의 일상과 그 의미에 차분히 이야기 걸어온 쇼와생활박물관에 나 또한 작은 지지라도 보태자는 의지를 다지며.

이미지 제공_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