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강하다!”와 “빈 수레가 요란하다”라는 표현이 있다. 하나는 외형과 상관없이 실속 있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실속 없이 외형만 화려한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2009년 한국드라마의 지형도를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수많은 화제를 뿌렸던 KBS2 미니시리즈 <꽃보다 남자>에 어울리는 표현은 어떤 것일까? 비유컨대, “소리 없이 강한” 일본만화를 원작으로 “빈 수레가 요란한” 한국드라마가 되었다는 점에서 두 가지 표현 모두 적절할 수 있다. 한류(韓流)이기는 하지만, 그 뿌리가 일류(日流)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꽃보다 남자>에 대한 팬덤 현상과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한류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만큼은.

KBS2 미니시리즈<꽃보다 남자>

아시아 전역의 한류 열풍은 1997년 중국 CCTV에서 <사랑이 뭐길래> (MBC, 1991~1992)와 <별은 내 가슴에>(MBC, 1997)가 방영되면서부터였다. 전통적인 가장의 권위를 강조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남자 이대발최민수 분과 부드럽고 포용력 있는 가정에서 남부럽지 않게 성장한 여자 박지은하희라 분의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다룬 <사랑이 뭐길래>는 유교문화의 종주국인 중국에서조차 부러워할 정도로 전통적인 가족문화를 형상화한 홈드라마로 중국 시청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고아원에서 성장한 디자이너 연이최진실 분와 출생의 비밀 때문에 방황하는 가수 강민안재욱 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별은 내 가슴에>는 도시풍의 생활과 감각적인 사고방식을 소재로 젊은 계층의 취향을 파고든 트렌디드라마로 중국 젊은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통적인 유교문화와 현대적인 감성이 살아 있는 한국드라마가 각개 격파 식으로 중국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한류의 발원지가 되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한류는 이후 <겨울연가>(KBS2, 2002), <천국의 계단> (SBS, 2003~2004), <대장금>(MBC, 2003~2004)으로 이어지면서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보편적 감성에 근거한 멜로드라마나 한국적 소재를 앞세운 역사드라마가 단순하게 반복되면서 한류는 어느 순간 혐(嫌)한류의 거부감에 휘말리면서 뿌리 없이 흔들리는 위기에 직면했다. 출생의 비밀, 불치병, 기억상실증 등의 소재가 반복적으로 뒤엉키면서 한국드라마는 천편일률적이라는 아시아 시청자들의 비난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한국에서는 이른바 ‘막장드라마’ 논란이 불거지면서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다. 대한민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기반이라 믿었던 한류 열풍이 허장성세(虛張聲勢)가 된 것이다.

드라마의 핵심은 ‘창의적 상상력에 기반한 참신한 이야기’에 있다. 아시아에서 한국드라마가 한류 열풍을 선도할 수 있었던 힘도 바로 중국이나 일본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과 그럴 듯한 사건 전개가 돋보이는 참신한 이야기에 있었다. 그런데 한국드라마는 아시아 전역의 한류 열풍을 과신하고 참신한 이야기로서의 ‘원천 콘텐츠’ 발굴보다 ‘원소스멀티유스(one source multi use)’라는 미명 아래 한류 스타로 급부상한 일부 배우의 이미지를 상품화시킨 박제품 생산에 주력하면서 한류를 지속시킬 원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천국의 계단>을 복제한 듯한 <천국의 나무> (SBS, 2006)나 한류 스타의 이미지를 상품화한 것에 지나지 않을 <스타의 연인>(SBS, 2008~2009)이 ‘한류드라마’를 표방하고 나섰으나 한국은 물론 아시아 시장에서의 반응이 신통치 않았던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총체적인 관리 부실로 아시아에서 한류의 유통기한이 짧아진 사이, 일류는 소리 없이 아시아 시장을 장악했다. 한류가 화려한 수식어와 더불어 ‘열풍’에서 ‘거품’으로 그리고 ‘혐한류’로 이동하는 동안, 일류는 소리 없이 한류를 대신하면서 ‘명실상부(名實相符)’ 실속을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타이완과 일본, 한국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어 화제를 불러 모았던 일본만화 『꽃보다 남자(花より男子)』가 대표적이다. 1992년부터 2004년까지 12년에 걸쳐 36권으로 발행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꽃보다 남자>는 2002년 타이완에서 처음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이후 일본(2005)과 한국(2009)에서 시차를 두고 제작되면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콘텐츠로 자리매김하였다.

일본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인 만큼 한국의 <꽃보다 남자>는 방영 당시 신드롬을 일으켰지만 한국 현실에 적합하지 않은 상황 설정과 묘사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이 판타지 로망스’를 표방했으나 일본만화를 원작으로 한 <꽃보다 남자>의 폭력적이고 자극적이며 선정적인 상황 묘사에 대한 한국 시청자의 비난이 쉽게 수그러들지 않으면서 ‘막장 드라마’ 논란으로까지 확산되었다. 고등학생을 성적(性的)으로 대상화하고, 납치와 청부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묘사하는 것은 아무리 일본만화가 원작이라 하더라도 한국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막장 상황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4라는 꽃미남 4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꽃보다 남자>는 타이완과 일본의 드라마가 그러했던 것처럼 여성 시청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2009년 상반기 대한민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상징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이처럼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 한국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성공은 일류의 저력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KBS2 미니시리즈<공부의 신>

물론, <꽃보다 남자> 이전에도 일본 작품을 원작으로 한 한국드라마는 적지 않았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웰 메이드 드라마(well made drama)’라는 평가를 받았던 <연애시대> (SBS, 2006), 조직사회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 고뇌했던 천재 의사의 야망과 몰락을 다루면서 의학드라마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 <하얀 거탑>(MBC, 2007)은 일본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한국드라마이다. <연애시대>가 ‘영화 같은 드라마’로 영화와 드라마의 접점을 성공적으로 넘나들고, <하얀 거탑>이 ‘의사가 병원에서 연애하는 이야기’라는 의학드라마의 오명을 씻어낸 전문직 드라마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적 감성에 맞는 영상을 구현한 연출의 힘이 크다. 하지만 일본 원작 소설이 담보하고 있었던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과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가 아니었다면 각색 드라마의 성공은 보장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 원작을 각색한 한국드라마가 모두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종영된 <101번째 프러포즈>(SBS, 2006)와 <결혼 못 하는 남자>(KBS, 2009)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못했다고 해서 작품의 완성도까지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101번째 프러포즈>와 <결혼 못 하는 남자>가 결혼마저 조건에 맞춘 상품으로 인식하는 풍조 속에서 결혼적령기를 넘긴 남녀의 심리를 현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완성도 측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가가 한국보다 먼저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휘말리면서 연애와 결혼의 의미가 변질된 현상을 성공적으로 묘사했던 일본 원작의 힘에서 비롯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연애시대>, <101번째 프러포즈>, <하얀 거탑>, <결혼 못 하는 남자>, <꽃보다 남자>에 이어 2010년에도 일본만화 <드래곤 사쿠라(ドラゴンざくら)>를 원작으로 제작되어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공부의 신>에 이르기까지 일본 원작을 바탕으로 각색한 한국드라마는 작품성과 시청률 면에서 제법 쏠쏠한 재미를 본 경우가 많았다. 삼류 고등학교의 열등생들이 최고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해 특별 교육을 받는 과정을 다룬 <공부의 신>은 ‘학부모가 자녀와 함께 보는 드라마’라는 호평과 ‘학벌 지상주의를 자극하는 드라마’라는 악평을 동시에 받으면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교육을 소재로 한 일본만화 <드래곤 사쿠라>가 한국드라마 <공부의 신>으로 각색되면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과 일본의 교육 현실이 ‘입시 지옥’이라는 말을 공유할 정도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내용 없는 한류로 아시아에서 허장성세를 자랑하는 동안 일본은 일류라는 말이 낯설 정도로 용어나 일시적 현상에 개의치 않고 내실 있는 콘텐츠로 소리 없이 실속을 챙기며 명실상부하게 아시아의 문화콘텐츠 보고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처럼 일류가 소리 없이 강한 면모를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소설과 만화는 물론 드라마와 영화(애니메이션)로 대표되는 풍부한 원천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꽃보다 남자>에 이은 <공부의 신>의 상업적 성공에 자극받은 한국드라마 제작진은 일본 원작 소설이나 만화에 대한 저인망식 접근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산업에서 ‘문화’가 아닌 ‘산업’에 방점을 찍고 자본의 논리만 강조하는 제작 현실은 한류의 원천인 드라마 산업의 토대 구축을 어렵게 만들 뿐이다.

다른 나라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단지 천편일률적인 한국드라마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명분으로 창의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콘텐츠 개발을 게을리 하면서 다른 나라의 작품에 의지하려는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일본 원작 각색을 통해 명성을 쌓은 작가들이 이후 오리지널 극본 창작에서 정형화된 등장인물과 개연성 없는 허술한 이야기 구성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았음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오히려 드라마 산업의 토대를 구축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만약 한국의 드라마 제작자들이 ‘완성도 높은 극본’이라는 원천 콘텐츠 개발을 소홀히 한다면, ‘거품’ 걷힌 ‘한류’는 초라한 모습으로 흡사 1980년대의 홍콩영화처럼 빈사 상태에 빠지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빈 수레만 요란한” 한류가 허장성세에서 벗어나 일류에게 내어준 자리를 되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미지 제공_ KBS 홍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