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연한 표정의 세 남자가 북소리에 맞춰 구호를 외친다. “커피 값은 내가 냈다, 진동 오면 네가 가라.” 세 남자는 여자 친구를 떠받드느라 너무나 힘들었던 처지가 새삼 떠오른다는 듯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부짖는다. KBS 2TV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 ‘남성인권보장위원회(이하 남보원)’의 한 장면이다. 남보원의 주장에는 치졸하고 유치한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 ‘남자다운’ 역할에 충실해야 했던 남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요소가 있다. 여기에는 누구도 언급할 수 없었던 사소한 것들을 공개적으로 발설하는 데서 오는 시원함이 있고, 이 사소하고 유치한 요구가 과장된 울분과 진지함으로 연기되는 데서 오는 익살이 있다. 또 구호의 운과 율을 맞추는 솜씨도 범상치 않다. 예컨대 이런 것들. “네가 울면 천상여자, 내가 울면 찌질이냐.” “뽕 넣는 거 인정한다, 키높이도 인정해라.” “벗어 달라 강요마라, 가을밤엔 나도 춥다.” 기타 등등. 이런 개그에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마냥 웃으면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다. 방송개혁시민연대(이하 방개혁)는 민노총 조합원, 사무직 노동자, 그리고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를 연상시키는 인물이 개그 프로그램에 등장해 머리띠를 두르고 북을 치며 구호를 외치는 데에 우려를 표명했다. 극단적이고 편향적인 집단의 행위가 친숙하고 일상적인 행동으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방개혁의 주장에 따르면 남보원은 결과적으로 특정 집단과 정당에 편향적인 효과를 생산한다. 남보원은 은밀하게 정치화된 개그이며, 그렇기 때문에 위험하다. 방개혁의 요점은 개그의 영역에서 정치성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대체로는 방개혁의 반응 자체를 개그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며, 개그를 개그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조야(粗野)한 취향에 대해 비웃는 듯하다. 그러나 개그는 개그일 뿐 오해하지 말자는 것으로 결론 내리는 데에 만족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개그는 그저 개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오히려 개그를 포함한 모든 방송으로부터 정치성을 제거하려는 방개혁의 의도에 이상한 방식으로 합류하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웃자고 한 것일 뿐’이라며 방개혁의 시각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개그의 정치성을 알아차린 방개혁의 시각을 보다 급진화시키는 것이다.

 
말 본연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개그는 무엇보다 말을 막으려고 입을 틀어막는 것이고, 또한 기억이 나지 않거나 말이 나오지 않을 때 얼버무리려 배우가 즉석에서 하는 연기다. 그러므로 개그는 언어활동 속에서는 파악되지 않는 몸짓이며,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정치라는 것은 정상적이라고 생각되는 행동양태와의 불일치이며, 사회적 조화를 강제한다고 생각되는 규칙의 예외다.1 이 두 정의를 비교해보면 정치와 개그의 상동성(相同性)에 대해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존의 통치질서에 대한 정치의 관계와, 언어활동에 대한 개그의 관계가 매우 닮아있기 때문이다. 통치질서에 대한 개그가 정치이며, 언어활동에 대한 정치가 개그다.2

‘남성인권보장위원회’의  한 장면 ⓒKBS | 2010

그러므로 개그에서 정치를 발견하고 거기에 어떤 폭발력이 숨어있다고 주장하는 방개혁의 관점에 완전히 동의하면서도 우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라면 사회학자 김종엽의 견해에 귀 기울일만하다.3 남성들의 권익을 주장하는 남보원의 우스꽝스러운 구호들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억압당하고 있는 여성들의 현실은 은폐한다. 또한 국지적인 남성차별 현상에 대한 비판은 노동운동의 몸짓과 구호를 조롱하는 효과를 낳는다. 혹은 계급정치의 목소리를 옹졸하고 징징거리는 어리광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해버린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방개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관점에서 남보원의 정치성을 문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제기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은 이런 물음들이다. 이것이 단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개그일 뿐인가. 반대로 이 개그가 진보진영이 약자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어떤 특권과 은밀히 연계되어 있음을 암시한다고 읽어야 하지 않을까. 계급정치의 준엄한 목소리로 성(性)정치를 희화화하는 남보원의 형식 속에서 진보진영 내부의 오랜 갈등, 즉 계급정치와 성정치 사이의 불화가 폭로되는 것은 아닌가.

 
그러므로 방개혁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하자. ‘남성인권보장위원회’의 표현형식은 은밀하지만 충분히 정치적이다. 단, 남보원은 진보진영의 구호를 친숙하게 하고 일상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진보진영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고 반성을 촉구하며 단련시키는 방식으로, 정치적이다. 이 개그의 정치성에 폭발적인 웃음으로 즐기며 동참하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