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영화 <흩날리는 것들>은 얼핏 가족에 대한 영화처럼 보인다. 이제 곧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남자가 있다. 인수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의 아버지는 사회과학 서적을 취급하는 낡은 헌책방을 물려주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감당하기 벅찬 채무 관계를 덤으로 얹어서 말이다. 채무자들의 빚 독촉에 시달리던 인수는 아버지와 인연을 끊는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선물’이 찾아온다. 자신의 목숨을 보험에 맡겼던 아버지 덕분에 빚을 갚고도, 장례식을 치르고도, 인수의 손에는 적지 않은 돈이 남겨질 것이다.

설명에 인색한 <흩날리는 것들>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아버지와 아들의 애증관계를 다룬 가족영화로 취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반복되는 어떤 존재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순간, 이 영화는 지금 이 시대에 대한 알레고리로 전환한다. 우리는 먼저 <흩날리는 것들>의 부제가 ‘새로운 세계의 유령들(Specters of The New World)’임을 상기해야 한다. 하나가 아닌 두 개의 유령. 그중 첫 번째 유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에서 제시된 두 개의 단서를 기억해야 한다. 아버지가 물려준 낡은 헌책방에 발견되는 낯익은 사진 한 장. 그는 바로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이다. 그리고 인수가 쓸모없는 책을 불에 태우는 장면에서 그의 손에는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arx-Engels Werke』 중 한 권이 들려있다. 그렇다면 부제의 ‘유령’이 무엇을 참고한 것인지는 너무도 자명하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에 출몰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공산당 선언』 서문의 첫 문장!

영화는 마르크스를 아버지의 자리에 놓는다. 오해는 말라. 은유의 화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본 사람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영화 첫 신의 화면구성을 놓쳤기 때문이다. “나란히 앉아 깃발을 만들어주던 아버지는 낡은 헌책방과 감당할 수 없는 빚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는 자막 이후, 영화는 헌책방의 실내를 비춘다. 전경의 책장과 함께 먼 옛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앉았을 높이가 다른 두 개의 의자가 중경에 배치되어 있고, 인수는 후경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다. 이때 책 도매상이 사회과학 서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말하며 아버지 의자를 화면 전경에다 슬쩍 옮겨놓고 화면 바깥으로 사라진다. 이제 화면의 전경에는 아버지의 빈 의자, 중경에는 인수, 후경에는 거울에 비친 마르크스의 사진이 보인다. 이때 김현성 감독은 전경(빈 의자)과 후경(거울 속 마르크스의 사진)을 직선으로 위치시켜 거울 속에 비친 마르크스를 그 의자에 앉힌다.

이제 영화에서 왜 붉은 깃발이 반복되는지 명확해지지 않는가. 토지 측량 기사인 인수는 붉은 깃발과 함께 일을 한다. 그에게 붉은 깃발은 하나의 ‘좌표’이다. 한때 붉은 깃발은 우리의 발길을 인도하는 좌표였다. <흩날리는 것들>은 아들에게 부채만 남기고 떠난 아버지를 마르크스, 또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붉은 깃발에 새기며 새로운 세계를 갈망했던 역사적 시대라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이름과 함께 높이 세웠던 ‘붉은 깃발’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다. 어쩌면 부채(負債)는 아버지가 남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망각하고 배신함으로써 짊어지게 된 역사적 부채이다. 우리는 그저 (아내의 대사처럼) 남들처럼 살고 싶은 건 나쁜 게 아니지 않냐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살아간다. 물론 마르크스가 꿈꿨던 새로운 세계를 가슴속에 품은 적이 없는 자들이라면 최면 따위도 필요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자본만이 새로운 세계를 향한 깃발일 터이니.

영화의 한 장면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관객을 세운다. 화면에는 두 개의 흩날리는 것‘들’이 있다. 하나는 인수의 손에서 흩날리는 돈다발. 다른 하나는 민둥산 중턱에서 흩날리는 붉은 깃발. 자본의 유령과 마르크스의 유령(혹은 역사적 부채의식), 혹은 ‘새로운 세계의 유령들.’ 그렇게 영화는 관객을 선택의 갈림길에 세운다. ‘당신이 원하는 새로운 세계는 무엇인가’라는 (관객의 선택이 너무도 자명한) 시대착오적 질문, 하지만 현 시대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과 함께. 물론 선택은 당신 몫이다. 문득, 홍상수 영화의 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우리, 사람은 못 될지언정 괴물은 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