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섭이 보여준 사진 작업, 특히 이번 <시간의 흔적展>에 내보인 <동구의 공장들> 연작은 우리들에게 도시와 현대인이 맺어왔던 관계를 반추해보라는 제안서이다. 그가 앵글에 담은 일군의 풍경은 비오는 날 북성부두에서 바라본 바다의 표정, 그리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목재공장의 굴뚝과 공장 전용 부두에 산더미처럼 야적된 원목더미들이 연출하는 포구 모습이다. 부두에 차곡차곡 야적된 나무들은 가지런히 ‘누워’ 있다. 마치 제재목이나 합판으로 가공되면 그들의 토막난 육체마저 하나의 무늬로만 남게 될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 듯이. 원목더미 너머의 굴뚝들은 모종의 집행관처럼 도도한 자태로 ‘서서’ 흰 연기를 내뿜고 있다.

또 다른 풍경은 한국유리공장의 철거 직전 모습이다. 이 풍경은 유리공장의 지붕과 외벽을 구성하고 있는 낡은 슬레이트가 압도하고 있다. 거칠고 조악한 슬레이트 구조물에서 보석같이 빛나는 판유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이다. 아마도 자신의 생산품으로 치장했음직한 이 공장의 유리창들은 빛을 투과시키는 임무를 마감하고 오직 폐공장의 컴컴한 내부를 강조하는 대조물 역할만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김보섭은 과연 무엇을 본 것일까? 물론 빛을 잃은 공장의 창문, 무너진 슬레이트 외벽은 시간의 무상감을 자아내기에 족한 오브제(objet)들이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추억과 향수(?) 그러나 이런 풍경이 추억의 대상이 되기엔 너무 을씨년스럽다. 1960~1970년대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공장의 신화는 퇴색한 지 오래. 오히려 제조업은 환경오염의 주범처럼 여겨지고 도시의 천덕꾸러기로 취급되기 일쑤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공장이 산업화와 근대를 표상하고, 항구도시 인천을 대표하는 공장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무채색의 공장 건물들은 또한 희뿌연 안개로 이름난 인천항의 소산물이기도 하다. 유리공장도 마찬가지다. 유리공장의 생산품이 현대 생활의 필수품이라는 사실도 그렇거니와 슬레이트 벽체와 지붕의 규칙적인 선이 연출하는 기하학적 질서는 근대와 도시의 메타포가 되기에 족하다. 김보섭이 폐허가 된 한국유리공장을 가리켜 “우리의 삶과 밀접한 인천의 상징”이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화수부두는 공장에 둘러싸인 바다로 이곳을 통해 해산물이 들어오고 포구의 어민들이 풍어를 기원하는 굿판을 벌이던 공간이다. 근대의 표상, 인천의 상징들인 공장에 대한 그의 마음은 흑백의 사진이 주는 느낌과 달리 뜨겁다. 그의 사진에는 가뭇없이 사라져가는 공장과 퇴락한 화수부두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난다. 그는 이 공장들을 통해서 인천의 과거를 보고, 한국의 근대를 찬찬히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진을 지배하고 있는 불투명성은 황량한 풍경을 호도하거나 애매모호성(ambiguity)을 기대한 기교가 아니라 디테일을 생략하여 개념을 강조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시간의 흔적-동구의 공장들展> 포스터

여기에서 공장과 포구에 대한 그의 속내가 드러난다. 그의 연민은 공장과 포구의 변화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다만 그것이 한 시대의 흔적일 뿐 아니라, 한 도시의 상징이라면 더 적극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바닷가의 공장이 자연과 어우러진 문화 지역으로 재탄생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을 견딜 수 있는 사물은 없듯이 변화하지 않는 풍경도 없지 않은가. 시간이 강요하는 풍경의 변화에 적응한다는 것은 고통을 동반한다. 풍경의 변화가 가속화하는 만큼 망각의 속도 또한 증대되어야 하고 풍경을 삶의 환경으로 삼고 있는 존재의 불안감을 증가시키기 때문일 터이다. 김보섭의 흑백의 파노라마 사진은 한때 우리 삶의 일부였던 공장이 일순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리는 현상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에서 출발한다. 그는 풍경의 급격한 변동에 저항할 방도가 마땅치 않다는 사실을 것도 알고 있기에 <동구의 공장들> 연작을 통해 소멸해 가는 도시의 근대 풍경에 대한 만가를 보낸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풍경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도 지속될 수 있는 방도(인천아트플랫폼 같은?)를 찾을 것을 진지하게 제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