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6회를 맞이한 2010 아시아연극연출가워크숍은 작년부터 한 명의 극작가를 선정하여 작품을 만들었는데, 2009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에 이어 올해는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 ~1956)와 관련된 작품을 만들었다. 모두 세 편의 연극 중 <브레히트 여행의 궤적>은 일본 연출가 묘진 야스(明神慈)의 작품이다.

대사가 사라진 무대에서 연극의 다른 빛깔을 보다
이 연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배우들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이 사라진 무대. 과연 그곳에서 무엇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배우들의 대사가 사라진 순간 비로소 연극의 다른 기호들을 보게 된다. 배우의 얼굴 표정을 비롯한 신체의 표현, 의상, 조명, 무대구조, 배우들의 동선과 구도, 오브제(objet) 일상생활 용품이나 자연물 또는 예술과 무관한 물건을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하여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 등. 연극에는 배우의 언어에 가려 부차적으로 여겨지는 요소들이 많다. 연극을 본다는 것은 사실 배우가 대본을 잘 외우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몸을 비롯한 연극의 다른 매체들이 발산하는 모든 것을 온몸으로 감각하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풍부한 현상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연극 도입부는 연극이 전개될 방식을 보여주고 마지막은 연극의 의미를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도 그러한 특징을 보여준다. 어두움이 가득한 동굴 속 같은 세상. 낮은 계단이 있는 뒤쪽 좁은 공간을 제외한 텅 빈 공간에 작은 빛줄기들이 여기저기 내려온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간간히 울려 퍼진다. 빛과 어둠을 가로지르며 사람들이 세 명씩 네 그룹으로 나타나 각각 이리 저리 이동하며 자리를 잡는다. 고대 그리스 시민이 입었을 법한 한쪽 어깨에 걸쳐진 긴 옷자락을 입은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숨을 쉰다.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처럼 사람들은 오직 숨을 쉬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온몸으로 숨을 쉰다. 그리고 객석 가운데 통로를 따라 극장 밖으로 나간다. 무대에는 한동안 어두움과 빛줄기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잠시 후 사람들이 다시 무대 위에 등장하여 자리를 잡고 온몸으로 숨을 쉰다. 연극이 진행되면서 사람들의 이러한 ‘호흡’과 ‘이동’은 반복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나며 그것들은 매번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띤다.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브레히트의 긴 망명 기간
이 연극이 브레히트 망명 기간 동안의 단상들에 관한 것이라는 팸플릿 문구를 기억한다. 배우들이 끊임없이 무대의 안팎을 이동하는 것은 쫓기는 망명 생활을 한 브레히트 삶을 보여준다. 브레히트의 이러한 망명 과정은 첼로케이스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이 오브제는 이동하는 사람의 짐가방이며 노래, 음악, 서정성 등 예술과 예술가를 상징한다. 실제 브레히트는 1933년 독일국회의사당이 불에 타고 나치정권의 움직임이 가속화되자 다음날 독일을 떠나 체코 프라하, 오스트리아 비엔나, 스위스 취리히를 거쳐 덴마크의 스벤보르로 이동한다. 이후 1941년 나치세력이 북유럽까지 침입하자 스웨덴, 핀란드를 거쳐 모스크바를 통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거기에서 배편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까지 망명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독에 정착하기까지 브레히트는 15년 동안 그의 시 「후손들에게An die Nachgeborenen」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발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꾸었다.”

<브레히트 여행의 궤적-내게 묘비는 필요없으나> 포스터

호흡과 몸의 구도: 존재와 세계의 상태
이 연극에서 사람들은 온몸으로 호흡을 하며 그 호흡은 다양한 양상을 띤다. 배우들이 호흡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숨을 쉬고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은 항상 숨을 쉬지만 느끼는 감정과 처한 상황에 따라 호흡의 속도와 강도는 변한다. 이렇듯 호흡은 살아있음을 의미하며 존재들의 내면상태와 주변 생존 조건을 반영한다.

악기통을 맨 예술가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호흡은 매우 안정되어 있으며 평온하다. 사람들의 움직임은 부드러우며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본다. 이러한 평온함 속에 갑자기 한 남자가 무대 뒷부분 계단에 올라 손가락으로 사람들을 가리키며 짧게 호흡을 내뱉는다. 그의 표정은 매우 경직되어 있으며 위엄이 있다. 사람들은 일렬로 서서 명령하는 호흡에 맞추어 팔다리를 직각으로 세우며 행군한다. 순식간에 평온함은 사라지고 폭력적인 분위기가 형성된다.

 “굶주림이 휩쓸고 있던 혼돈의 시대에 나는 도시로 왔다” - 시 「후손들에게」

다음 장소에서 사람들은 우울한 표정으로 일렬로 서서 허공을 향하여 손을 내밀며 무엇인가를 구걸한다. 사람들은 두 손을 쭉 뻗어보지만 아무 것도 받지 못하고 한숨소리를 내며 배를 움켜쥔 채 흩어진다. 예술가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계속 이동할 수밖에 없다. 다음 세계에서 다른 남자가 ‘독재자의 계단’에 올라가서 짧은 호흡으로 사람들에게 명령을 한다. 악기통을 맨 예술가의 모습이 바뀌듯이 새로운 세계에서 권력자의 모습도 매번 바뀐다. 그것은 히틀러로 대변되는 나치권력이 예술가가 가는 곳마다 다른 형태로 사람들의 삶을 장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 권력이라는 것은 같은 ‘시민’의 옷을 입고 있는 허상에 불과하다. 남자들은 한 사람을 붙잡아 세운다. 여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첼로케이스를 맨 예술가는 무대 뒤편 벽면을 타고 기어올라 숨어서 이 광경을 지켜본다. 붙잡힌 사람이 총살 당하여 쓰러진다. 남자들은 주변을 위협한다. 예술가는 두려움에 떨며 몸을 숨기며 생각한다.

“참으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우연히 나는 살아남은 것이다.” - 시 「후손들에게」

예술가는 다시 이동한다. 사람들은 그를 감시하며 거리를 둔 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속삭인다. 예술가는 홀로 남겨진 채 배고픔에 지쳐 악기통을 베개 삼아 쓰러진다. 다시 이동하는 예술가. 그곳에는 폭력의 지배가 절정을 이루고 있다. 사람들은 바깥쪽을 향해 팔짱을 낀 채 원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결박하고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오직 밖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결국 사람들은 모두 쓰러진다. 다시 일어난 사람들은 대결자세를 취한다. 그들의 몸은 모두 긴장되어 있으며 강한 호흡과 동작으로 다른 사람을 죽인다. 
 

서정시를 노래하기 힘든 시대
아직 평화로운 세상. 한 여인이 예술가의 악기통에 관심을 가진다. 여인은 악기통에 귀를 갖다 대고 두 눈을 감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아름다운 것을 충만히 느끼는 듯 그녀의 얼굴에 사랑이 가득한 미소가 만연해 있으며 코에서는 부드러운 숨이 나온다. 그러나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긴장감을 조성하는 무리가 등장한다. 예술가는 여인이 그 위협을 알아차릴 것에 대해 두려워하며 고요히 잠든 여인을 보호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생겼지만 주변 세계의 위협으로 이 사람이 곧 사라질 것을 두려워한다. 이 세상은 참으로 예술가가 ‘서정시를 노래하기 힘든 세상1’이다.

여기서 “이 연극이 현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가”라는 연극의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전쟁과 같은 가시적인 폭력만이 아니다. 이 시대는 권력기관의 비물리적인 정책에 의해서도 위협받고 있다. 권력기관은 국민들의 기본권과 생계 보장을 외면하고 기득권층의 소득 향상을 위하여 자본을 투자한다. 또 그들은 강압적인 정책을 펼쳐 사람들의 삶을 통제한다. 이러한 세상은 폭약소리가 들리지 않을 뿐 전쟁터와 다름없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어느 날인가 그들은 평화로운 나라에 가고 싶었네” - 시 「소년 십자군Kinderkreuzzug」

사람들은 무대 전면에 일렬로 서서 평화와 희망의 빛이 비추는 세계를 향하여 손을 뻗지만 이내 쓰러진다. 중요한 상징을 띤 마지막 장면. 여행자가 들고 다니던 첼로 악기통은 열려진 채 무대 중앙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그 속에는 서정시를 노래하기 힘든 시대에 브레히트가 쓴 많은 시들과 편지가 있다. 텅 빈 공간에 시인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지금 너희가 사는 세상은 서정시를 노래할 만한 세상인가?”   

 

<브레히트 여행의 궤적-내게 묘비는 필요없으나>의 장면들(좌,우)

작은 비판, 브레히트적인 유머의 결여
이 연극은 대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이 연극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관객은 끊임없는 이동을 통해 브레히트의 망명과 여행을 떠올릴 수 있으며 그곳에서 벌어지는 가난, 폭력, 의심, 멸시가 브레히트가 망명 중에 접한 세상의 모습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완과 긴장, 평화와 폭력이라는 극의 비극적인 구도가 반복되어 이 연극의 관람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 암울한 시대를 표현할 다른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브레히트적인 풍자와 위트가 아닐까. 아무리 우울한 시대에서도 그의 작품 곳곳에서는 유머와 여유가 느껴진다. 그 예로 시 「분서Die Bucherverbrennung」에는 나치정권이 금서들을 불태우는 장면이 묘사된다. 자신의 작품이 금서목록에서 빠진 것을 알게 된 한 망명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진실을 담고 있지 않는 것이냐며 자신의 책도 함께 태워달라고 외친다. 이 연극이 암울한 시대에서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풍자했던 브레히트의 다른 면모를 표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미지 제공_ 한국연극연출가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