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가 내려진 보수동 책방골목

부산의 봄은 유난히 춥다. 바다를 낀 도시의 특징인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이다. 일찍 핀 매화는 벌써 지고 있고, 개나리, 벚꽃, 목련이 하나둘 꽃망울을 터트리는데도 바람 끝은 여전히 쌀쌀하다. 오랜만에 보수동 책방골목을 찾은 날도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대청동 교차로에서 보수동 방면으로 접어드는 길목. 보수동 책방골목이 자리 잡고 있다. 정확한 지명은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 1가 보수동 책방골목이다. 추운 날씨에도 책방골목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나도 그 무리에 섞여 가게를 기웃거리며 책방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아이와 함께 책방나들이를 나온 어머니도 보이고, 새 학기를 맞은 학생들이 필요한 책이나 참고서를 구하러 나온 모습도 보인다. 초로의 신사가 천천히 책을 살피는 모습도 보기 좋다. 모든 책방이 다 같아 보이지만 책방마다 나름 특징도 있다. 고서와 신간, 전문서적과 대중서적, 예술잡지와 대중잡지, 외국원서와 번역본 등 가게마다 주로 판매하는 책도 조금씩 다르다. 같은 점이라면 팔고 있는 책이 대부분 헌책이라는 점과 책방마다 입구부터 천정까지 책이 쌓여있다는 점이다. 소설, 수필, 시, 철학, 인문학 등 분야별로 정리해 놓긴 했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뒤죽박죽 뒤섞여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게 재밌다. 시간 보내기 딱이다. 헌책에서 풍기는 특유의 냄새. 시간의 무게가 주는 쾌쾌하면서도 진중한 그 냄새가 그리 싫지만은 않다. 천천히 책장을 살핀다. 눈에 익은 책도 많고 증보판을 거듭한 책의 초판본도 보인다. 마치 보물을 발견한 것 같다. 무심코 펼친 책에 한때 주인이었던 누군가가 그어놓은 밑줄에 눈길이 머문다. 한 사람의 인식세계를 살짝 들여다 보는 것 같은 기쁨. 서점 한 쪽의 북 카페에 앉아 따끈한 커피를 마시며 골라온 책을 펼친다. 그 순간 현실의 시계는 잠시 멈춘다.

카페처럼 예쁜 서점

서점 내부

책방골목의 도너츠집

단발머리 여중생 세 명이 있었다. 1970년대 중반,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서대신동의 대티터널을 지나 괴정에 있었다. 학교에서 우리 집이 있는 영도까지는 걸어서 세 시간이 넘는 먼 길이었다. 토요일이면 친한 친구 둘과 가끔 걸어서 집까지 오곤 했다. 한 친구는 집이 보수동이었고, 한 친구는 충무동에 살았다. 셋이서 재잘거리며 대티터널을 지나고 서대신동 주택가를 지나면 보수동이었다. 보수동에서 친구를 보내고, 다시 충무동까지 걸어가 친구를 보내고 나면 나 혼자 남았다. 셋이서 걷는 것도 좋았지만 혼자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갈치를 지나 영도다리를 건너며 바다의 푸른 물빛을 바라보는 게 나는 참 좋았다. 우리는 새 학기가 시작되면 보수동 책방골목에 가서 참고서와 문제집을 골랐고(최대한 깨끗한, 새 책처럼 보이는 걸 골라야 했다.) 남긴 돈으로 책방골목의 유명한 호떡과 찹쌀도너츠, 찐빵 등을 사먹으며 공범자들끼리 은밀한 웃음을 나누기도 했다. 한수산의 소설 『바다로 간 목마』나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을 발견하고는 서로의 주머니를 다 털어 책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소설책 읽느라 밤을 꼬박 새기도 했다. 얼른 읽고 다음 차례의 친구에게 줘야했으니까. 그러면서 우리 엄마는 내가 공부하느라 밤샌 걸로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도 내가 소설책 읽느라 밤샌 걸 아셨을 것 같다. 엄만데, 어찌 그걸 모르셨을까! 

북 카페서 쉬었다가 책방골목으로 다시 나선다. 책방골목 3길로 이어지는 좁고 가파른 골목이 보인다. 최근에 그려진 벽화가 유명한 골목이다. 선명한 벽화가 먼저 눈에 확 들어온다. 글이 보인 것은 그 뒤였다. 

① 카멜레온은 늙은 곰이 있는
    아름다운 숲이 싫증나서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② 갈색 마을에서는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장사꾼처럼 갈색이 되었습니다.

③ 파란 마을에서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나무처럼 거리를 두고 친구가 되기를 꺼려했습니다.
    너무 추워서 나는 파랗게 변했습니다.

④ 더 추운 것은 ……
    열리지 않는 마음 때문일까요?
    나는 처음으로 늙은 곰의 잔소리가 그리웠습니다.

⑤ 나도 사슴처럼
    날씬한 다리를 갖고 싶어!
    나는 꿈이 있어 좋았습니다.

⑥ 그러나……
    곧 터져버릴 풍선 같은
    꿈이었습니다.

⑦ 지친 나에게 하얀 거북이가 말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해.”
    나는 늙은 곰이 그리웠습니다.

⑧ 다시 그곳으로 돌아왔을 때
    늙은 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갖가지 색깔의 나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집과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좁다란 골목길 담벼락에 그려진 만화 같은 그림. 색깔까지 알록달록 곱다. 좁고 한갓진 골목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림을 따라 가며 글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책방골목 담벼락에 마치 그림책 한 권을 펼쳐놓은 것 같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그림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모습도 보기 좋다.

텔레비전을 켜면 섬세하게 조작되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만들어진 광고가 시도 때도 없이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 아파트에서 살면 귀족이 될 수 있고, 이 차를 타면 경쟁에서…, 이 화장품을 바르면 …, 만져라 반응하리라, 당신의 노후는…. 이미지에 현혹된 우리는 멀쩡한 물건들을 냉정히 팽개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을 사들이고 소비한다. 그렇지만 늘 불안하고 무엇인가 결핍을 느낀다. 그 결핍은 또 새로운 소비를 유발시키고…. 정말 우리는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그런 세상 한 구석에 아직 이런 공간이 남아있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신선한지. 가치가 충분한 물건을 버리지 않고 다시 사용하는 것.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실의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은 공간. 자연과 나무에게 조금은 덜 미안한 마음이 생기는 곳. 보수동 책방골목은 디지털 세상의 아날로그 공간이다.

책방골목의 벽화들

보수동 책방골목은 1950년대 초 6·25전쟁과 함께 생겨났다. 미군들이 보던 헌 잡지와 학생들의 헌 참고서 등을 끌어 모아 파는 헌책방 4곳이 그 시작이었다. 포화가 미치지 않았던 부산으로 각 대학의 분교가 들어서고 구덕산 일대와 보수동 뒷산에는 피난 온 학교의 천막교실이 열렸다. 보수동 골목은 학생들 통학으로 언제나 북적거렸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이곳에 자연스럽게 노점 헌책방이 성황을 이루었고 그 노점들이 현재의 골목에 하나둘 자리 잡게 된 것이 ‘보수동 책방골목’의 시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게 변했고, 이곳도 세월의 변화는 비켜가지 않아 한때는 존폐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150여 미터에 걸친 좁은 골목에 50여 개의 서점이 빼곡히 차 있다. 오히려 옛날보다 책방이 늘어났다고 한다. 전국에서 하나 남은, 최대 규모의 유일한 헌책방골목. 다른 도시에서는 다 사라진 헌책방골목을 살리기 위해 부산시에서는 먼저 책방셔터에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려 개성 넘치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책방골목 벽에 이야기가 있는 벽화를 그려 셔터의 스프레이 그림과 연계시켜 이곳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창출해냈다. 고물, 구닥다리, 폐품 같은 헌책의 이미지를 골동품, 클래식, 향수(鄕愁)와 같은 이미지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벽화와 셔터의 그림만으로 변화된 것은 아닐 것이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디지털문화에 멀미를 느낀 현대인들의 새로운 문화욕구가 아날로그적인 헌책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은 아닐까?

책방골목은 지금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책방골목 한쪽에 짓고 있는 8층 건물이 완성되면 책 박물관과 공연장, 북 카페가 새로 들어선단다. 그 말을 듣자 슬며시 걱정이 생긴다. 책방골목만이 지닌 고유한 정체성을 훼손시키지 않는 선에서 그런 시설들이 들어서기를 바라는 노파심 같은 걱정 말이다. 현실의 시간을 잠시 멈춰 세울 수 있는 공간. 교환가치 대신 소비가치가 아직 살아있는 이런 공간이 자본의 탐욕스런 손길에도 꿋꿋이 살아남는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제공_ 朴鍾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