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예술계를 보면 예술공간의 르네상스가 도래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1990년대 말 미술계에서 대안공간이 출현했고 이후 유휴공간의 예술적 쓰임에 대한 현장의 요구가 정책의 문지방을 넘는 순간 실로 어마어마한 사업비들이 창작공간사업에 투입되고 있다. 서울과 수도권을 넘어 지방 중소도시들의 문화예술정책에 대한 관심 또한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더불어 공모사업들의 상당수가 이런 공간들을 채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위한 현장 기획자와 예술가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것이 과잉일지라도 필연적 대세임은 확실한 것 같다. 이제 한국의 예술계는 그토록 갈망하던 자율적 창작공간과 다양한 표현의 공간을 안정적 재원 위에서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1990년 말 미술계에 대안공간의 등장과 독립예술제를 통한 다양한 장르-비주류예술의 표방은 문화적 담론의 신선한 파장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주류예술계와 공간으로부터 출가를 시도하면서 차별화된 색깔을 주장했다. 어쩌면 강력한 선언을 통해 경계선을 일탈했다기보다는 그들이 놀고 싶은 새로운 둥지를 만들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대안공간이 새로운 작가발굴의 통로역할을 목표로 10년을 걸어왔고, 주류미술계와 미디어는 이에 응답했다. 어찌 보면 목표를 이룬 셈이다. 그러나 그들은 또 다시 어떤 위기를 이야기하고, 새로운 모델을 찾아 다시금 모험을 하려한다. 그들은 이제 무엇을 부정해야 할까?

홍대앞 쌈지스페이스 전경 ⓒ씨네21

대안공간의 상징적 몰락: 쌈지의 경우
2008년 9월, 한국 1세대 대안공간의 하나였던 쌈지스페이스가 폐관을 공표했다. 당시 쌈지의 폐관소식을 전했던 언론보도 가운데 9월 11일자 <한겨레>는 폐관결정의 이유를 김홍희 관장의 이야기를 통해 밝히고 있다.

쌈지스페이스를 사실상 운영해 온 김홍희(60) 경기도미술관 관장은 “근래 들어 대안공간과 입주프로그램이 많이 생기고 미술관과 화랑이 젊고 혁신적인 작가들을 수용하면서 대안공간의 역할이 축소되는 상황에서 쌈지가 매너리즘에 빠져 비슷한 프로그램을 반복하고 있다는 자체 진단을 내렸다”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면 패러다임의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한데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중소기업인 쌈지가 지난 10년 동안 남다른 의지로 지원을 해 왔는데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어 아쉽지만 폐관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2010년 4월 초 쌈지스페이스를 후원했던 기업 쌈지가 부도처리 되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쌈지가 몰락의 징후를 보인 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다. 본업인 패션사업이 2000년대 이후 내수경기 침체와 해외 수입 명품 브랜드 강세에 밀려 고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소비자의 패션 욕구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1

두 기사의 발췌문을 읽어보면 기업 쌈지의 재정악화가 쌈지스페이스의 갑작스런(?) 폐관의 배경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기업의 든든한(?) 후원이 있었기에 재정이 탄탄하지 못했던 타 대안공간과 비교해 그 정체성을 의심받았던 쌈지스페이스가 후원자의 몰락과 함께 ‘아쉽게도’ 정리되어야 하는 운명이었다라고 하는 것은 마치 한 편의 통속소설을 보는 것 같이 “결국 그/이 정도였다”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1999년 동시적으로 등장한 한국 1세대 대안공간에 관한 ‘대안공간이 무엇이냐?’라는 정체성의 논란은 2005년 1세대 공간들이 주축이 되었던 ‘대안공간 네트워크’가 ‘(사)비영리전시공간협의회’로 바뀌는 지점에서 다소 분명해졌다고도 하지만2  사실상 비영리를 내세운 순간 대안공간의 본질적인 딜레마 혹은 아킬레스건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비영리는 후원(자)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것과 그 후원의 명분이 사회적 도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대안공간이 노무현 참여정부에 이르러 제도권으로 본격 진입되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소위 코드가 맞았기 때문에 정부가 대안공간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 것3 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다른 코드를 가진 정권이 등장한 2008년 이후이다.

쌈지 10주년과 폐관을 기념(?)해 기획된 “왜 대안공간을 묻는가, 대안공간의 과거와 한국미술의 미래”라는 주제강연에서 ‘한국 1세대 대안공간 연구: ‘중립적’ 공간에서 ‘숭배적’ 공간까지‘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한 반이정(미술평론가)은 쌈지의 폐관과 함께 대안공간이 처해있는 2008년 이후의 문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대안공간들이 당도한 곳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변화시킨 지형이 도리어 시장 경제적으로 체제 적응을 마친 화단 풍경이었고, 더 나쁘게는 자신들의 재원을 제도적으로 보장할 성 싶지 않은 2008년의 수구적 정치상황이다. 다들 ‘기분이 좀 뭐할 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 불행스런 현실은 대안공간이 처음 발호할 때의 초기 조건과 일면 닮은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대안공간은 또 다시 출발선 위에 서있다. - 위의 강연회 책, p31.

반이정의 분석처럼 2008년 이후 대안공간은 다시 (새로운) 출발선 위에 서있는 모양이다. ‘갤러리 루프’는 미술시장에 뛰어들었고, ‘대안공간 풀’은 운영진이 대폭 교체되었다고 한다.

2008년 10월

쌈지개관기념 공개강연회 토론 모습 ⓒ쌈지스페이스

지역기반 비영리전시공간의 경우
반면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관심대상이 있는데, 그것은 소위 ‘지역기반 비영리 전시공간들’이라 부를 수 있는 공간들이다. 안양의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인천의 ‘스페이스 빔’, 안산의 ‘커뮤니티스페이스 리트머스’, 청주의 ‘하이브’, 부산의 ‘오픈스페이스 배’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2008년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지역에 새로운 공간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광주의 ‘매개공간 미나리’, 최근 등장한 목포 ‘아트스페이스 알렙’, 대전 ‘스페이스 씨’ 등이다. 1세대 대안공간들이 위기를 맞이한 서울 중앙미술계의 환경과는 다르게 엄격히 말해 예술공간 인프라가 빈약하고 취약한 지역에서 대안공간에 대한 요구와 관심은 높은 편이다. 요구와 관심이 높은 만큼 이들 지역공간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 지역적 이슈가 되고 젊은 작가층의 흡입력도 상당히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수도권에 비해 공간을 중심으로 커뮤니티 형성이나 다른 비영리 영역과의 네트워크가 비교적 쉬울 수 있다. 또한 이들 공간은 중앙정부의 기금 외에도 지역문화재단이나 지자체로부터 재원을 확보하는 기획능력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살림살이가 넉넉한 편은 아니어서 비영리 전시공간의 운영에 대한 중압감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또는 커뮤니티나 지역 네트워크 안에서 지나치게 밀착된 맴버십에 의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호소하기도 한다.

대(大)안(案): 크게/넓게 생각하기
각 공간마다의 문맥이 다르기 때문에 대안 역시 그 문맥을 따라야 할 것이다. 다양한 이름 만큼 공간의 설립배경과 철학이 다르므로 무엇이 딱히 대안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이들 공간들을 ‘비영리 (전시)공간’이라는 정체성으로 묶을 수 있다면 재정문제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의 영리-상업공간들이 전시 대관수입과 작품판매를 주요 수익모델로 삼고 있는 반면, 비영리 전시공간은 후원과 기금을 주요 수익모델로 삼고 있다(초기에는 회비의 의존도가 높았을 것이다). ‘대안공간 풀’이 지금의 구기동으로 옮기기 전 인사동에 있을 때가지만 해도 비중이 높지는 않았지만 대관사업을 했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는데, “대안공간이 대관전시를 해도 좋은 것인가?”라는 시비가 생겼고, 자의든 타의든 대관사업을 중지해야만 했다. 결국 대안공간들은 (미국의 대안공간의 선례를 따라) 비영리화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상업공간들을 향한 비도덕성의 문제에 대해 비판을 한층 강화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영리로 인해 임대료, 공과금, 큐레이터 등의 인력에 들어가는 인건비 등 공간운영비 부담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초기 ‘대안공간 풀’이 그랬지만, 다른 비영리 공간들(기업쌈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던 쌈지스페이스를 제외하고)도 기금(사업비)의 일부를 운영비로 사용하거나, 인턴십 지원제도를 통해 필요한 인력을 보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고육지책에 지나지 않았음으로 문제를 여전히 안고 있었다.

광주 ‘매개공간 미나리’. 현재 다원예술매개공간 지원사업지 중 한 곳.
ⓒ강군

중소기업청의 ‘사회적 기업’ 제도를 활용해 보자는 이야기도 근래에 종종 등장하고 있는데, 기금처럼 제도라는 것을 잘 활용한다면 약이 되지만 종종 이것이 독이 되고 족쇄가 된다는 점도 가볍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각 공간은 공간에 형편과 조건에 맞는 나름의 재정마련에 관한 연구와 전략이 필요하리라 본다. 대개의 공간들이 기금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편중현상이 많은데, 그렇다고 딱히 소위 ‘돈 되는 작가들을 내세워’ 미술시장에 진출해 보라는 것은 비영리 공간의 정체성을 버리라는 이야기와 같을 것이다.(그런데 왜 다들 어려울 거 빤히 알면서 ‘비영리’를 고집하는 것일까?) 

예술의 새로운 후원자로서 국가(정부)의 등장은 세계적인 추세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2000년에 국가살림의 1%가 문화예산으로 책정된 이래로 그 규모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정부가 예술을 해야 하는 요구도 높아졌을 뿐더러 정부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당위성을 만들어 왔다. 문화의 세기, 문화민주주의, 창의한국과 같은 거대담론에서부터 한류와 같은 문화산업, 도시재생, 문화복지와 같은 여러 분야에 걸친 정책담론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지속적인 발전과 성장을 위해 예술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요구와 추세에 대해 예술은, 비영리공간은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

이제 미술시장에 팔리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공장으로서서, 국가대표급 스타작가를 홍보하는 예술인력중개시장으로서 대안공간의 패러다임은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을, 그 대안 세상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것. 그런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