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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현대소설을 말할 때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로 대표되는 소위 ‘붐 소설’ 작가들의 작품들만이 언급된다. 이들의 문학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라틴아메리카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공헌한 소설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 라틴아메리카 문학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형식적·이데올로기적 변화를 이야기해야만 하고, 이런 변화를 언급하려면 미겔 바르넷(Miguel Barnet)의 『어느 도망친 노예의 일생』(1966)을 빠트릴 수 없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사에서 미겔 바르넷의 『어느 도망친 노예의 일생Biografia de un cimarron』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소설 형식의 실험에 전념하던 ‘붐 소설’1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증언소설의 효시이자,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이 던진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과감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은 유럽과 미국의 학자들이 라틴아메리카와의 국제협력을 추구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문학의 사회적 참여를 다시 가능하게 만들어주었고 미국의 문학연구 프로그램이 재구성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게 라틴아메리카 소설의 틀을 다시 짜게 만든 이 소설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하여 아시아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현대 음악계의 유명한 작곡가 중 하나인 독일의 한스 베르너 헨체(Hans Werner Henze)에 의해 오페라로 제작되기도 했다. 또한 파리 국립극장을 이끌었던 장 빌라르(Jean Vilar)는 죽기 직전에 마지막 작품으로 이 책에 바탕을 둔 연극을 상연했다.

『어느 도망친 노예의 일생』은 노예제도를 겪고 노예제에 반발하여 봉기하며, 쿠바의 해방 투쟁에 참가하고 마침내 인생의 마지막에 쿠바혁명이라는 새로운 현실의 탄생으로 자신의 삶을 보상받는 한 인물의 인간조건을 보여준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104세의 에스테반 몬테호(Esteban Montejo)는 자신이 받은 박해와 그의 정치적 저항을 회상하며,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재조명한다. 바르넷이 그를 만났던 1963년, 몬테호는 당시 살아있던 도망노예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는 1860년대의 쿠바와 노예시절, 움집에서의 생활과 산으로 도망친 노예들의 생활, 사탕수수 농장에서의 또 다른 노예제도, 스페인과 맞서 싸운 독립전쟁 등을 생생하게 서술한다. 그는 이렇게 역사에 참여하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하위주체이자, 사회적·경제적으로도 극단적 주변성을 띤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그는 생동적이고 단순하며 투명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쿠바역사의 결정적 시기를 개인적 관점에서 재구성한다.

미겔 바르넷

바르넷은 이런 언어가 바로 증언소설을 쓰게 된 동기라고 밝히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언어는 역사과정의 결과다. 그것은 부르주아 역사학이 다루지 않는 언어를 회복하는 것이며, 수백 년의 전통에 의해 만들어진 중요한 언어다. 그들의 언어는 부르주아 문화에 기대지 않은 채 불안정하게 구성된 삶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말은 『어느 도망친 노예의 일생』이 라틴아메리카 문학사에서 지닌 가치를 내포한다. 즉, 아프리카계 카리브 해의 관점에서 노예의 경험을 서술하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실제로 20세기의 라틴아메리카 문학사는 주요 주제로 흑인 계급을 다루고 있지만, 이는 지배계급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용된 것이었다. 특히 반노예소설 혹은 노예폐지소설에서 흔히 다루어지던 노예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지배계급의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정치적·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쿠바의 흑인소설은 항상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노예들의 관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런 흑인들의 세계관은 흑인 피지배계급이 백인들로 구성된 지배계급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이용되었으며, 또한 새롭게 탄생하고 있던 신흥 부르주아 계급에게 유리한 사회적·정치적 개혁을 성취하기 위한 의도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에스테반 몬테호의 경우, 이런 흑인들과 달리 지배계급의 관점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데다 반노예주의 문학이 보여주는 흑인의 목소리와는 더욱 더 거리가 있다. 영원한 반항아인 몬테호는 도망노예의 정신과 자신의 가치 체계, 그리고 아프리카 신앙을 굳게 유지하고 있으며, 그래서 문학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존재다. 그는 자기의 근원도 잘 알지 못하고 자기의 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언제 태어났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항상 자신의 자유와 명예를 위해 싸울 만반의 태세가 되어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이 작품을 “그래서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은 거야. 앞으로 다가올 모든 전투에 뛰어들기 위해서 말이야”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

그는 수동적인 하위주체가 아니라 자신의 권리가 무엇이며, 자신의 종족이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지 의식하며, 그런 것들을 기억을 통해 고발하는 사람이다. 가령 몬테호는 “진짜로 잘못한 사람들은 쿠바인들이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사할 것들이 많아. 은폐되어 있었던 모든 문제들이 드러나는 날, 세상은 분명히 뒤집힐 거야”라고 말하면서, 개인이지만 집단적 주체로서의 능동적 역할도 수행한다.

이런 몬테호의 목소리는 지배계급의 산물인 권위주의나 도그마 혹은 객관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공식담론과의 차이를 통해 과거의 경험을 현재의 시점에 맞추어 전개해가면서 기존의 역사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즉, 지루하고 정확한 백과사전식 공식문서의 날짜나 자료가 아닌 것이다. 또한 몬테호의 삶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집약되어 있다. 그는 자기가 속했던 계급의 상황을 의식하는 개인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총체적 주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몬테호의 지난한 삶은 스페인과 미국의 억압과 수탈, 압제로 얼룩진 쿠바의 판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증언이 개인의 삶일 뿐만 아니라 집단적 주체의 삶이라는 사실은 라틴아메리카 증언소설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중요한 요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증언소설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증언자들의 증언에 바탕을 둔 구체적인 기록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다시 말하면 ‘붐 소설’의 현란한 형식적 실험에 반대하면서 ‘붐 소설’이 거부한 사회비판적 요소들을 회복하는 장르다. 하지만 종래의 소설에서 증언자는 단순한 정보원의 차원에 머무르는 데 반해, 증언소설에서는 작가가 증언자의 목소리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편집자의 역할을 맡음으로써 증언자는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증언소설에서는 누가 말하는 주체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언뜻 보면 증언자가 말하는 주체인 것 같지만, 정보원(화자)이 제공한 자료를 선별하고 축약하고 배열하며 각주를 통해 설명하는 방식으로 편집자(작가)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암묵적으로 증언과 병치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은 큰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증언자와 편집자의 관계가 진보적 지성과 하위주체의 유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증언소설은 지식인이 과거와 현재, 개인적 주체와 공동적 주체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름과 목소리를 되돌려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부르주아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 역시 민중의 일부이며, 민중과의 귀속감 속에서 지성인으로서의 합당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따라서 증언소설은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겔 바르넷의 『어느 도망친 노예의 일생』 출판 이후, 라틴아메리카 문학에는 증언소설이란 새로운 문학 장르가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멕시코의 틀라텔롤코 대학살 사건(1968),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중미국가들이 겪었던 내전이나 혁명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급박한 사회상황을 원동력으로 역사적 사실을 역동성 있게 파악하여 현실을 고발하는 문학의 필요성이 대두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발표된 대표적인 증언소설로는 지배계급의 마야 원주민 탄압을 고발하는 리고베르타 멘추(Rigoberta Menchu)의 『나의 이름은 멘추』, 틀랄텔롤코 대학살 사건의 진상을 이야기하는 엘레나 포니아토브스카(Elena Poniatowska)의 『틀랄렐롤코의 밤』, 볼리비아 광산 노동자의 삶을 서술하는 도미틸리아 바리오스 데 충가라(Domitila Barrios de Chungara)의 『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엘살바도르 내전의 참상을 고발하는 지오콘다 벨리(Gioconda Belli)의 『내가 경험한 국가』 등이 있다. 이렇듯 지배 이데올로기의 거짓을 폭로하고 역사의 패배자들이나 주변인들 혹은 억압받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려는 열망은 아직도 라틴아메리카 문학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어느 도망친 노예의 일생』은 거의 반세기 전에 출판되었지만 과거가 아닌 현재의 작품이며, 앞으로도 계속 지식인(문학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들 미래의 작품이기도 하다.